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예수님과 국가보안법 2

Thursday, December 16th, 2004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이 지난 13일부터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이어 15일에는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대한성공회 대책위원회”가 마련되어 이를 지지하며 성탄 전야 24일까지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고 결의했다.

태평양 건너 있는 처지라 그분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기도라는 연대의 틀이 있다는게 감사하다. 눈에 선한 국회 앞 천막 농성장 찬바닥에서 성무일과로 단식과 농성과 기도의 삼위일체를 만들어내는 신부님들은 역시 삼위일체 신앙인들 답다.

오늘은 복음서 독서를 통해서, 분열 속에서 증오를 키우는 일들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함께 예수님처럼 세상의 아픔에 대한 “예민함”과 치유에 대해서 속내를 나누었고, 대림절기의 기대처럼 “평화”에 대한 아름다운 희망을 펼쳐내며 그 희망의 주인공들은 오늘도 배를 비웠다.

또한 두려움과 공포가 곧장 권력의 횡포와 폭력의 다른 이름이라는 깨달음을 통해서 여전히 거꾸로 가려는 과거 권력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생떼쓰기와 여기저기 포진한 목쉰 교회 권력자들의 불안함을 간파하며 안스러워 했다.

함께 나눈 복음 묵상의 끝에 단식 끝나고 나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로 서로를 달래며 웃음으로 허기를 채우는 그 여유로운 얼굴에서 나는 여전히 예수님을 본다. 국가보안법이 휘두르는 공포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도사린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더 무섭다. 그 두려움이 죄의 실상이요, 억압의 실상임을 꿰뚫어 보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 다름들을 넘어, 아니 오히려 이를 축하하며 서로들 둘러 앉아 토닥이며 격려하며 훌훌 자유롭게 걸리지 않고 살아가는 넉넉함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찬바닥 천막 속의 신부님들은 내 안에 따뜻하게 자리 잡고 계시다. 먼 세월이었지만 예수님의 그 넉넉함과 자유로움이 나를 감싼다.

예수님과 국가보안법

Wednesday, December 1st, 2004

지난 11월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거의 밤을 세울 작정으로 한가닥 희망을 붙들어보리라는 기대는 밤 12시가 넘으면서 거의 절망으로 바뀌어갔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한동안 다른데 관심 두지 말아야지 했는데… 결국 그 후유증은 며칠 갔다. 루카스라는 태권도 3단 소유자인 1년차 신학생은 죄없는 송판만 몇 십 장 주먹으로 격파하는 걸로 분노를 삭였노라고 말해주기도 했었다.

다시 기억해서 건질 것 없는 이런 생각이 다시 찾아든 것은, 어제 지도교수 신부님들과 함께 내 공부 계획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는 마당에 잠시 미국 정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70년대 미국 인권운동의 한 가운데서 계셨던 노 신부님과, 평생을 작은 신학교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살아오셨던 칠순의 신부님은 절망과 안타까움으로 금새 물들었다.

게다가 나는 이 * 만한 부시가 재집권하는데 이른바 우파 기독교인들(천주교,개신교 모두에 거만하게 포진하고 있는)의 총집결이 있었다는데 더 크게 실망하고, 위험스러운 것이라고 했더니, 이 분들 역시 “위험천만하다”고 거듭 입을 모으셨다.

그 위험스러움에 대한 우려가 그 근본주의-극단적보수주의-우파 기독교인들의 충실한 후예인 한국 기독교인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당연하다. 불신지옥에 대한 위협으로 신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치졸한 방식은 테러에 대한 위협으로 사람들을 공포감 감속에서 자기만의 안정을 추구하려는 반절 이상의 미국인들과 똑같다.

재밌는 사실은 9/11 테러 공격을 받았던 뉴욕 시민의 80%는 부시의 낙선을 희망했다는 것이다.

이런 미국 우파 기독교인들의 후예들인 한국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본색이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와 더불어서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미 그들의 거대한 군중 동원에 힘입어 올해 안 개폐가 물건너간 처지에서 그들은 어떤 감사를 드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 감사의 대상이 되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이 참에 상지대 김정란 교수의 글을 읽는다. 몇번이고 곱씹어 읽어도, 근래에 읽은 것 중에 이만큼 신앙적인 글이 없다고 생각한다.

김정란: 극우기독인에게 고함-“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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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없는 깨달음

Tuesday, July 6th, 2004

파블로 네루다 탄생 1백주년을 맞아서, 그 기념 행사가 대단한 모양이다. 독재자 피노체트 아래서 감금되어 죽음을 맞이한 후 자기가 바라는 자리에 묻히지 못했다가, 유언대로 이장된 것은 20년 후의 일이었단다. 어쨌든 그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네루다 메달"을 수여하는데, 한국에서는 역시 "정현종 시인"에게 돌아간단다.

스페인어 시 제목이 난무한 뉴욕타임즈의 네루다 기사를 읽다가, 곧장 한국의 정현종으로 생각이 이어지더니, 10여년 전 대학원 시절 기숙사방 한귀퉁이에 붙여 놓았던 정현종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뭐 짧은 생각의 경로이긴 하지만… 그 시를 좋아했으니… 아직도 좋아하므로…

깨달음, 덧 없는 깨달음

정현종

부처님
큰 깨달음은 당신의 몫이구요
중생은 그나마도 드문 자질구레한
깨달음으로 징검다리를 삼기에도
어려운 물살입니다
가령 무슨 이념 무슨 주장 무슨
파당 무슨 조직에 앞서는 게
눈앞의 사람 아닙니까
우선 그냥 한 사람의 눈앞에 있습니다
그 이상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기야 스스로 죽지 않고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있다면 그저 깨달음 놀이지요
제 짐작이요만
迷妄은 생명의 떡이요
꽃 한 송이는
迷妄의 우주니까요.
그러니 부처님
그저 이렇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살아 있는 한 저는
깨닫지 않겠다구요.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