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전례' Category

성 금요일: 정지된 시간

Friday, March 21st, 2008

성 금요일이 처음부터 “좋은 금요일”(Good Friday)이었던 건 아니다. 누군가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두고 “좋은 일”이라고는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할 말이 아니다.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처형 방식이었던데다, 본때를 보여서 전면적인 공포 정치를 널리 알리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죽음과 그 공포는 시간을 정지시켜 버린다.

성 금요일의 사건은 예수의 체포, 심문, 판결, 그리고 처형으로 신속하게 흐른다. 이런 빠른 속도의 원동력은 두려움이다. 그것이 기득권을 지키려는데서 나왔든, 책임을 벗어나려는 행동이든, 아니면 기대와 실망에 대한 집단적인 분풀이든, 자기 보존과 안이의 인간 본능은 두려움에 힘입어 그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범죄에 자신을 내 맡긴다. 두려움에서 나온 증오가 사람들을 삼켜 버린다. 두려움은 어떤 대상을 설정하고, 그 대상을 심판하여 스스로 정당한 벌을 내린다. 여기서 권력과 대중은 상호 대결을 피하는 대신 그 경계에 있는 희생양을 처단한다. 이 합의된 폭력을 파시즘이라고 하든, 집단적 광기의 살인이라고 하든, 실상 이런 으스스한 말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니라, 자기 본능의 한 축으로 늘 잠재해 있다. 사람은 그걸 조절하고 있을 뿐이다. 그 조절 과정은 느리고 깊은 성찰로서만 지켜낼 수 있다.

십자가 처형 사건은 단순히 말해서 폭력에 대한 고발이다. 세상의 온갖 폭력과 죽임, 그리고 그 세력에 대한 고발이다. (이 단순성을 에둘러서 신학적 구원을 대뜸 운운하려는 것은 잘못된 신학의 첫걸음이거나 그 결과이다.) 예수께서 숨은 거두는 순간에 일어났다고 하는 현상들은 일상적인 시간의 정지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낮이 멈춰 밤이 되고, 멀쩡한 성전 휘장이 찢어질리 없고, 무덤이 터져 나올리 없다. 그리고 폭력이 계속되는 한 이 인간의 시간은 정지된다.

그제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죽임의 행진을 시작한지 5년째 되는 날이었다. 세계의 악동 부쉬는 이라크를 다 “부쉬”고도 여전히 전쟁을 계속할 것이란다. 계속되는 군인들의 죽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민간인과 어린이들의 주검을 계속 보는 한, 세계의 시간은 멈춰 있다. 지난 세기로부터 이어지는 전쟁과 야만의 시기가 이어지는 대신 인간의 시간은 멈췄다.

사리와 사욕에 가득 찬 정권을 뽑아 놓은 우리 사회도 여전히 두려움에 가득차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내가 그만큼 크거나 높지 않으면 내가 당하리라는 경험과 두려움이 편만한 사회는 시간의 초침을 돌리지 못한다. 이런 정권들에 동조하는 심리와 행태가 “죽이시오, 죽이시오”라고 외쳤던 2천년전 어느 총독부 뜰의 풍경과 겹쳐지는 것은 나만의 과장된 생각때문일까?

성 금요일이 “좋은 금요일”인 탓은 한 청년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이 헛도는 두려움과 미움과 죽임의 궤도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은 이 사건을 한(恨)-단(斷)의 변증법으로 풀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 사건의 시선에서 본 사건 후의 해석 작업 혹은 의미 부여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에 대한 신앙인들의 책임적 행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두려움이 인종주의로, 성차별로, 지역차별주의, 학벌주의 등으로 계속되는 한, 자신의 일 밖에 대해서는 눈감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한, 시간은 죽음 속에 묻혀 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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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목요일: 켜켜이 쌓인 시간들

Thursday, March 20th, 2008

성삼일(Holy Triduum)은 교회력 혹은 전례력에서 경첩점(hinge point)이라 하겠다. 구속사의 모든 사건들이 성목요일과 성금요일, 그리고 부활 밤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러 새로운 사건으로 도약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성 목요일은 이런 전환의 시작점이다. 사순절의 끝나는 지점에서 성삼일이 시작된다. 무엇보다 이 날은 예수와 함께 했던 세월들이 다다르는 수렴점이자, 그 수렴의 끝에서 새로이 드러나는 또다른 시간이다. 이 날은 그래서 켜켜이 쌓인 시간들, 혹은 시간의 중첩이다. 예수께서 공들인 삶은 오늘 있은 두 사건에 집적되어 있다. 세족과 마지막 만찬이 그것이다.

예수께서는 종의 일을 주인의 일로 전복시켰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는 그들도 그렇게 섬기며 살라고 당부하셨다(Do This!). 그게 없으면 예수와는 상관 없는 삶이다. “주의 종”이란 말이 오염되어 어처구니 없는 “교회 권력”의 표현이 된 이율배반은, 곧 이 신앙 전통에 대한 배신이다.

세상을 섬기로 온 자신을 드러낸 예수께서는 아예 자신의 몸을 주어 먹고 마시라고 한다.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는 분부가 있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이것은 내 몸 혹은 피” “이다”(is)에 집중하며 교리적인 논쟁을 벌여 왔다. 어떻게 떡 혹은 포도주가 예수의 살”이고”(is) 피”이냐”(is)를 두고 지금도 갈라져 싸운다. 자기 식대로 믿지 못하면, 자신의 성찬례에도 초대할 수 없다는 게 법이 되었다. “이 일을 행하라”(DO THIS)는 말씀은 안중에 없다. 이 역시 이 신앙 전통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인류학자 기어츠(Geertz)는 삶에 대한 해석과 기술은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이어야 한다고 했다. 당연지사 그건 삶이 투텁기 때문이다. 이미 한껏 두터운 사건(thick event)인 성 목요일의 예수 사건들은 교회 역사 안에서 더욱 복잡해졌다. 오물로도 역사는 쌓여가듯 역설과 아이러니가 범벅이 되어 천연덕스럽게 오늘의 전례 행사를 이룬다. 이 역시 또다른 시간의 중첩을 만든다.

전통적으로 성 목요일에는 성유 축복 미사(Chrism Mass)를 드린다. 기름은 그 복잡한 용도에서 다양한 의미로 발전되었다.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는데 쓰였고, 연고의 원료인 탓에 기름 자체가 치료제로 사용되었고, 요즘 식으로 향수로 쓰이기도 했다. 기름의 제의적 사용과 의미 부여가 이어졌다. 세례식에서는 작은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사람)가 되는 상징으로, 병자들에게는 치유 성사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직 서품식에서는 어떤 특권의 전이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 기름을 성 목요일에 축성했던 것은 부활 밤에 있을 세례식과 견진에 쓰도록 하려는 편의에서 비롯했다. 더구나 주교가 축성하는 이 기름을 다 받으러 와야 하니 교회 일치의 상징으로도 보기 좋았겠고, 그런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지역 교회로 돌아가 성찬례 제정 기념 미사를 드리는 것도 의미가 컸겠다. 여러모로 성 목요일은 다양한 전례와 그 의미로 한층 두터워졌다.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발명은 이를 더 두텁게 한다. 성유 축복 미사와 함께 하는 “사제 서약 갱신”이라는 것이다. 성공회에서도 어느 틈엔가 일반화되다시피 한 이 순서는 사실 1970년대 로마 가톨릭 교황 바오로 6세가 강력히 권장하여 퍼진 것이었다. 교황은 이 날을 “사제들의 축일”로 보았다. 지역 교회에서 성유를 받으러 사제들이 모이는 날인데다, 성찬례 자체가 제정된 날이니, 이 날처럼 교회의 일치(혹은 주교와 사제의 일치)와 사제들의 분명한 권위를 세우기 좋은 날이 어디 있으랴. 이 무렵은 성공회와 천주교가 갈라진지 400여년 만에 대화와 협력을 강력하게 모색하는 시기였으니(교황 바오로 6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마이클 램지), 이게 성공회에 흘러드는데 별 무리가 없었을게다.

그러나 이게 성유 축복 미사를 원래대로 잘 드러내는가? 내 경험에서 보나, 교황의 확신에서 엿보이는 생각은 이 날은 “사제들의 축일”이지, 성유의 여러 용법들과 의미들,그리고 사목적인 교회의 일치가 다시 확인되는 것 같지는 않다. 풍요로운 축복과 치유의 상징은 성유의 빈약한 사용도에서 보듯 축소되고 위약해진다. 그 틈 사이로 한편에는 사제들의 자의식 확인이, 다른 한편으로 주교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확인하려는 위계 질서의 기대가 끼어든다. 그러나 이 역시 시간의 한 층일뿐, 나무란다고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니다. 성 목요일 자체의 두 사건에 대한 아이러니이되 시간은 이를 삼켜서 오늘을 남기니까.

다시 말해 시간은 이러한 배반과 아이러니 안에서 축적된다. 그리고 현재의 전례 행사와 우리의 삶을 일구어 나간다. 시간 안에서 드러내고 숨기는 일들이 반복된다. 그래서 성 목요일은 켜켜이 쌓인 시간들로 촘촘히 박혀서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을 이룬다. 이 시간의 중첩은 한무더기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모순된 우리 삶의 자화상을 비춘다. 계몽을 위해 이 날 전례 행사의 어떤 통일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은 이미 빗나간 욕망이며, 시간이든 역사이든 단번에 뛰어넘어 본질을 정화해내서 보여주겠다는 단언은 광신이다. 오히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포장하려는 속셈이 빈번하다. 그러니 이 시간의 중첩 앞에서 다만 우리를 비추어 성찰할 일이다.

성 목요일 전례 행사의 마지막은 제대의 모든 장식을 벗기는 일이다. 제대보를 걷으면 제대는 화려함 뒤에 숨겨왔던 몸을 드러낸다. 예수의 몸이 벗겨진 상징이라고 단답형 답을 들이 밀기 전에, 우리 자신이 이 시간의 중첩 안에서 스스로를 발가 벗기는 일이 더 중요하리라. 그래야 비춰 볼 수 있을테니까. 그 비추인 나신이라야만 역사와 그에 깃든 상처 사이 사이에 박혀 관계하는 예수의 세족과 성찬례가 흐릿하게나마 다시 돋아나리라.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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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 테네브레 Tenebrae

Tuesday, March 18th, 2008

 

Tenebrae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께 돌아오라.” 

테네브레 Tenebrae는 “어둠” 혹은 “그늘”이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이름을 딴 촛불 예배를
성주간 마지막 3일 동안에 드렸습니다.

세상의 빛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촛불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개의 촛불들이 마련되어 있는 둘레에 혹은 그 앞에 모여,
탄식의 시편들을 읽고, 예레미야 애가를 노래하고,
그리스도 수난의 순간을 담은 복음을 읽으면서,
차례로 촛불들을 꺼나가며 드리는 기도 예식입니다.

마침내, 하나의 촛불을 제외한 모든 불들이 꺼지고,
그 마지막 촛불마저도 어딘가로 사라져 가서,
우리는 모두 침묵이 지배하는 어둠에 묻힙니다.

그 어둠 속에서 울려나는 굉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리고,
어둠이 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제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흩어질 뿐입니다.

정말 이렇게 속절없이 끝나고 마는 걸까요?
(200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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