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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성사 – 두 단어, 혹은 한 단어?

Monday, March 17th, 2008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의 소식지에 보내느라 쓴 글인데, 여기에도 실어서 나눈다.

“말씀과 성사” – 두 단어인가, 한 단어인가?

(이야기 전에 한가지 넋두리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한국에서 성공회 신자로 살아가는 일의 고달픔입니다. 그 깊고도 오래된 전통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회를 설명하거나, 우리의 신앙 생활 형태를 다른 이들과 쉽게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마디면 ‘파박~’하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리저리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명쾌한 단답’을 바라던 사람들은 금새 지치고 맙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교회가 겪는 현실입니다. 또 특정한 신앙적-신학적 흐름이 지배하는 바람에 우리가 사용하는 신앙적-신학적 언어들이 그 틀에 갖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수정되기까지는 우리의 전통을 자세히 공부하고 설명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당연한 두 단어를 두고, 이런 제목을 붙이는 건 좀 튀어버려는 속셈이 아니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목이 비추듯이, 그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교회는 오랜 동안 “말씀과 성사”를 한 단어로 이해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이를 서로 대립되는 다른 두 단어로 이해된 데는 사연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사연을 잠시 훑어 보면서 “말씀과 성사”가 결국인 하나인 이유,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말씀과 성사에 대해 구구한 말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개신교는 말씀 중심의 교회, 천주교는 성사 중심의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 연장 선 상에서 우리는 성공회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한마디씩 평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짐짓 성공회의 훌륭한 균형 감각 찬탄하는 결론을 내면서도, 개신교나 천주교에 대한 비아냥과 부러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찜찜’한 평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해놓고도 개운치 않습니다. 혹은 둘 중에 어느 한 쪽으로 명확히 가야한다는 대범한 주장을 펴는 경우도 왕왕 듣습니다. 그런데 위의 말을 잘 살피면, “말씀과 성사”가 서로 대립하게 된 연유에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자기 주장 때문이라는 것과, 또 “말씀과 성사”에서 성공회와 정교회 같은 신앙 전통이 이해하는 바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게 드러납니다.

우선 쉽게 이해하는 대로 “말씀”과 “성사”를 떼어 놓고 이야기해 봅니다. 당장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신-구약 성서를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설교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도 아니면 성서를 읽거나 설교를 통해 느껴지는 어떤 감동의 물결을 말하는 것인가요? 어느 것도 시원한 대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창세기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십시다(창세기 1장).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라는 선언입니다(요한복음 1장). 여기서 “말씀”은 성서도 아니요, 설교도 아니요, 우리의 감동도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어떤 분, 바로 하느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항상 어떤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사건들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건으로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은 “성사”의 원칙과도 같습니다. “성사”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정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보이도록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그 원초적인 성사의 사건은 무엇보다도 창조의 은총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육신의 은총이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눈으로 보이는 성사의 사건입니다. 유대교나 초기 그리스도 교회들은 말씀을 성사요,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을 뇌에서만 작용하는 어떤 의사 소통 수단이나, 지식 정보의 전달 수단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가 “머리” 중심의 그리이스 철학 전통과 교류하면서 이런 변화가 있었노라고 말합니다. 이 탓에 말씀과 사건(성사)의 연결점이 약화되었습니다. 이후 교회 전례의 발전 속에서 “말씀”은 설교로 축소됩니다. 사람들은 몸으로 느끼고 만지는 경험에 더 끌리는 경향이 있는 지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설교보다는, 겉으로 분명히 보이는 성사의 행동들에 지나친 관심을 두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잊혀졌던 “말씀”의 위치를 회복하자는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많은 경우 “성서”와 그에 대한 짐짓 “올바른 해석”(교리)에 대한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사와 전례 안에서 그 위치와 관계를 되살리기보다는, 다시 성사와 대립하고 대결하는, 그리고 성사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흐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다른 극단입니다.

성공회 전통은 이 행복하지 못한 관계를 세 가지 방법으로 화해시켜려 했습니다. 첫째로, 먼저 기도서의 전례문들을 성서의 근거에 따라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이는 세례와 성찬례뿐만 아니라, 다른 사목적인 성사들에도 해당합니다. 둘째로, 성찬례 안에서도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두 부분을 대등하게 배치하려 했습니다. 물론 유기적인 관계라기 보다는 양적인 균형잡기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세번째로는 매일기도(성무일도)를 수도자나 성직자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되살려서, 공동체 안에서 말씀의 잔치(성서 독서, 찬양, 중보 기도)를 회복하도록 했습니다.

성공회 전통은 다른 전통들, 특히 정교회 전통들과 대화하면서 말씀과 성사의 관계를 좀더 깊이 발전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일치 운동과 전례 쇄신 운동이 활성화된 20세기에는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이 말씀과 성사에 대해서 좀더 일치된 이해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 잠정적인 결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과 성사는 하나인 전례의 두 축입니다. 한 축이라도 빠지면 온전한 전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없는 성사는 없습니다. 성사는 말씀인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 앞에 드러나는 “가시화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성사없는 말씀도 없습니다. 말씀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형태를 갖고 선포되어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의 구조는 그 관계를 아주 잘 드러냅니다. 말씀의 전례는 말씀의 선포와 경청이 주를 이룹니다. 독서(구-신약, 시편, 복음서)는 그 자체로 설교와 대등할 만큼 중요한 말씀 선포의 사건입니다. 독서 자체가 말씀 전례의 핵심입니다(이런 점에서 독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전례 행동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는 독서에서 읽은 말씀을 우리의 상황 속에서 가져다 주는 길잡이이며, 이를 통해서 뒤에 이어질 성찬의 전례에서 일어나는 신비를 비추어 줍니다. 그래서 설교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가교입니다. 앞에서 일어난 말씀 듣기와 길잡이가 우리 몸에서 살아나는 까닭은 성찬이라는 살아있고 구체적인 상징 행동때문입니다. 성찬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말씀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함께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고, 영성체를 통해서 그 말씀을 먹고 마십니다. 이것이 말씀과 성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다른 성사들에도 저마다의 특징 속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참에, “말씀”과 “성사”에 대한 분리된 강조점을 각각 “저교회”와 “고교회”의 틀에 대입시키려는 흐름을 잠깐 짚었으면 합니다. 이런 대입법이 그렇듯하게 보이지만, 그 역사적인 기원과 속성을 따져서 쉽게 말하자면, “저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지 않는 교회 흐름이고, “고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는 교회의 흐름입니다. 성찬례 거행의 스타일을 가지고 그걸 구분짓는 것이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요즘 개신교의 여러 교회들이 성찬례를 중심으로 한 전례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말씀을 포기하는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새로운 말씀 선포와 그 경험의 영역을 성사 안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말씀 중심의 예배라고 했던 것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사 우위를 고집했던 교회들은 말씀의 성사성을 다시 발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전통은 지금 “말씀은 성사를 비추고, 성사는 말씀을 구체화하여 우리 몸으로 느끼게 한다”는 고대 교회의 진리를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점은 “말씀과 성사”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교회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사의 전례인 성찬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뤄집니다. 총체적인 전례를 경험하는 공동체를 통해서만이 성서를 말씀으로 해석하고 이를 구원의 사건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사는 그런 말씀 경험의 틀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과 성사의 의미와 관계를 이렇게 거듭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사를 통해서 말씀을 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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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그리고 T.S. Eliot

Wednesday, February 6th, 2008

1.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Remember that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Memento, homo, quia pulvis es, et in pulverem reverteris.”
“Homme souviens-toi que tu es poussière et que tu retourneras en poussière.”

2.
사순절기 참회 연도(Litany of Penitence)

3.
T.S. Eliot,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I

다시는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희망하지 않기에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이 사람의 재주와 저 사람의 기회를 탐내는 일
더이상 이런 것들을 얻으려 애쓰지 않기에
(늙은 독수리가 왜 날개를 펴야 한단 말인가?)
여느 통치의 권력이 희미해진다고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다시는 알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또렷했던 날의 허약한 영광을
단 하나의 참다운 힘도 덧없음을
알지 못하리라고 알기에
거기, 나무가 꽃 피우고, 샘이 흐르는 곳에서
마실 수 없기에
다시는 거기에 아무 것도 없기에

시간은 늘 시간이고
자리는 늘 자리일 뿐
실재는 한 순간만 실재하고
한 자리에만 있음을
알기에
있는 그대로인 사물을 즐거워 하고
축복받은 얼굴을 거절하며
그 목소리를 거절하련다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그리하여 나는 기뻐한다 기뻐해야 할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기에

기도하라, 하느님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하라, 스스로 너무 많이 토론하고 설명했던 이것들을
잊게 해달라고.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이 말들이 답하게 하라
이제 일어났으니,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에
우리를 향한 심판이 너무 무겁지 않게 하소서

이 날개들은 더 이상 날지 못하기에
공기만 부딪히는 날개죽지일 뿐
이제는 너무나 작고 메마른 공기
의지보다 작아지고 메마른 공기
마음 쓰고 마음 쓰지 않도록 가르쳐 주시라
가만히 앉아 있도록 가르쳐 주시라

기도하라,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지금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기도하라, 우리를 위하여 지금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번역: 주낙현 신부)

예언자적인 종교와 예배

Sunday, October 7th, 2007

로버트 벨라(Robert N. Bellah)는 버클리 대학(UC Berkeley)에서 가르치다 은퇴한 사회학자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그는 종교의 사회적 현상, 특히 미국 사회와 종교의 관계를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종교의 사회에 대한 공적 책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왔고, 미국 사회와 종교의 지속적인 개인화 현상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거듭해왔다. 성공회 신자이기도 한 벨라 교수는 이러한 사회의 공공성을 공동선에 입각해 재구축하는 일에 종교와 그 예배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여러 글을 통해서 밝히기도 했다. 특히 공동체 예배를 중시하는 성공회 전통의 신자였던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민주 사회 안에서 예언자적 종교”(Prophetic Religion in a Democratic Society, 2006)라는 에세이 끝에서, 그는 “예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종교 전통들이 공동의 삶에 가장 깊이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지를 논의하면서 내 말을 마치고자 한다. 우리는 종교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 참여함으로써 좀더 넓은 시각을 공공 영역에 가져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예배의 자리이고, 영적 실천의 자리라고 믿는다. 주요 종교들 안에서, 예배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배는 공적이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고,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적극적 행동의 원천이요 목표이다. 예배는 우리가 지극히 의식적으로 궁극적 실재와 연결되는 곳이며, 이 힘든 세상 속에 우리의 사명을 갖고 나가도록 하는 힘을 얻는 곳이다. 무엇보다, 예배는 우리의 비전이 살아 움직이며, 거듭날 수 있는 곳이다. 앞서 나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고전 철학 사상을 두고 화산의 “용핵”(molten core)이라 표현한 이미지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도움이 된다. 바로 예배 안에서 우리는 우리 신앙의 “용핵”과 만난다. 바로 예배 안에서 우리의 종교적 상상력이 응축되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거룩한 비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다. 그리고 신앙인들도 때로 이러한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종교 전통에 있든지 간에 그 신앙인들이 자신들을 규정하는 종교적 실천들을 무시한다면, 그 신앙인들은 세상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신앙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차이란 무엇인가? 종교 사회학자로서 나는 종교와 영성 전통이 대체로 기존 질서(status quo)를 옹호하는데 열심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생각이 다르더라도 침묵하고,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종교와 영성 공동체들을 통해서 위대한 문제 제기가 터져 나오고, 그 사회에서 그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넘어서서 궁극적인 실재에 비추어 이 문제들을 검토하는 이들이 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때로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거부하고 비판했다. 아무래도 신앙인들은 계속해서 이 거부와 비판 사이에서 움직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대낮같이 환하게’ 실천한다.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그들의 대안적 현실을 좀더 넓은 사회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이 없이는 공공 영역은 급격히 퇴락하고 만다. 신앙인들 어느 누구도 그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다. 하지만 함께하여 서로에게서 배운다면, 신앙인들은 우리가 맞딱드린 곤경에서 우리를 꺼내어, 덜 파괴적이며, 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를 위해 좀더 건설적인 삶의 형식으로 안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종교사회학을 기능주의로 보든, 그의 주장을 어떤 책임주의 명령에서 나온 것으로 바라보든 간에, 전례 전통의 교회들이 예배를 두고 사회와 세상에 대한 새로운 대안적 질서(order)의 표현이요, 그 질서의 본연인 “천상 전례”의 반영이라는 시각을 발전시켜왔으니, 그의 생각이 이런 교회 전통의 이해에서 비롯되거나 맞물려 있을 법도 하다. 전례 혹은 예배는 새로운 사람살이의 틀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실천이다.

후기; 벨라 교수를 주일 교회 미사에서 그리고 몇몇 특별 강연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의 충실한 독자는 아니었으나, 다시 지난 몇몇 글들을 들춰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눈에 띈다. 그는 마르크스-베버-뒤르켕을 학문적 토대로 하며, 틸리히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재발견하여 성공회 신자가 되었고, 알리스터 맥킨타이어(After Virtue)의 윤리학적 전망을 줄곧 인용한다. 깊이에 차이가 심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궤적과 관심의 흐름에서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