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전례' Category

산마루에 서서 – 마틴 루터 킹

Friday, April 4th, 2008

위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세속 달력과는 달리, 교회력(Church Calendar), 혹은 전례력(Liturgical Calendar)은 성인이 죽은 날을 축일로 지킨다. 그 죽음은 하늘 나라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은 곧 부활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는 1968년 4월 4일 밤,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그 생애 마지막 연설을 하고 돌아와, 작은 모텔 발코니 앞에서 총격을 받아 숨졌다. 만 서른 아홉의 나이였다. 그리고 40년 전 오늘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미 그는 죽음을 예견했던 것일까? 성인은 자기 삶의 끝을 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연설에서 자신의 운명을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운명과 포갰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이들을 탈출시킨 뒤, 40년 간의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높은 산에 올라 그 약속된 땅을 바라보던 모세였다. 모세처럼 그는 산 꼭대기에 올라왔지만, 그 약속된 땅을 바라보고도 들어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미련이 없었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의 끝을 아는 사람이다. 모세처럼 그는 소임을 다했다.

그가 지상에서 산 생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약속된 땅”에 들어섰는가? 바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 그 상징적인 징표가 될 수 있을까? 그가 산마루에서 바라보던 그 약속된 땅은 아직 안개에 묻혀 있다.

그가 죽어 새롭게 태어난 해의 막바지에 세상에 나와 그 생애 만큼 살았으나, 그가 올라섰던 산에서 몇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내 자신과 우리 사회를 돌아 보며, 나는 작은 다짐의 기도만 올리고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 모세의 손을 쓰시어 당신의 백성을 노예 생활에서 이끌어 내시고, 종내에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교회가 당신이 보내신 예언자 마틴 루터 킹의 모본을 따라, 주님의 사랑의 이름으로 억압에 저항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자유의 복음을 지켜나가게 하소서.”

(미국성공회 Lesser Feasts and Fasts 본기도)

 

부활 밤: 시간의 탄생

Sunday, March 23rd, 2008

부활은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다. 창조 이후의 역사를 한번 마감짓고, 새로운 창조의 시간을 여는 사건이다. 그래서 모든 사건은 이제 부활이라는 빛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과거를 재해석하는 현재의 시점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강조때문에 고대의 신앙인들은 창조의 시간인 7에 하나를 덧붙여 8일이라는 숫자로 이 새 시간을 표현하려 했다 (7+1=8). 창조의 시간보다 더 풍요로운 시간이라는 뜻이다. 제 8요일이 바로 부활일이며, 제 8요일로서 모든 주일은 이제 부활에 대한 기념일이 되었다. 이 시간은 이제 “위대한 50일”로 확장된다. 같은 셈법이다 (7*7+1=50). 부활절기와 성령강림일은 구별된 교회 절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의 확대인 “부활 축제”의 전체 기간이다.

제 8요일과 그 숫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익숙하게 되었다. 팔각형의 세례대(혹은 세례당)이나, 대축일과 관련한 8일부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결국 새로운 시간에 접어들었다는 자기 인식이었고, 이에 대한 축제였다. 이 축제를 일상으로 하자는 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일테다.

이런 의미의 해석이나 추적이 전부는 아니다. 전례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행동에 관련된 것들에 어떤 의미를 대입할 수는 있다.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또한 교리적으로 이건 이랬노라고 찾아봐서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이런 의미에 대한 지식은 그 의미를 좀더 깊이 돌아다 볼 수 있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의미 이전의 사건, 다시 말해 의미를 만들어낸 사건을 잘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사건을 감추는데 사용되기도 하고, 의미 과잉은 사건과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많다. 신학 논쟁이 허튼 길로 들어서는 건 이런 의미 과잉과 관련되어 있고, 이게 더 추악한 종교 재판으로 가는 것은 이 의미를 독점하는 권력과 관계할 때다.

부활 사건 또한 “의미” 이전에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만남”이다. 보라, 복음서의 부활 기사는 언제나 만남과 연결되어 있다. 그 만남의 지극한 인간적인 면들은 이미 이번 부활일 설교에서 귀에 밝히도록 들었을테다. 새벽에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과 천사의 만남, 여인과 부활한 예수의 만남 (예수께서 여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여인은 그분을 알아 보았다). 또 부활절기의 본문들은 모두 이런 만남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만남이 전례의 근본적인 기반이요, 목적이다. 전례는 하느님과 만나는 시공간의 사건이며, 그 사건을 통해서 전례의 공동체는 부활한 몸이 되고, 새로운 시간을 살아간다. 어떤 전통적 형식이나 설교, 또 다른 어떤 요소들은 이 만남의 사건의 종속된다. 다만 전통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험의 축적인 이상 그 만남의 경험들을 어떤 틀 속에서 보존하고 이어주기 때문이다. 전통 안에서 그 만남은 단절된 현재 만의 만남이 아니라, 지속되는 만남, 신앙의 선조들과 우리들의 그 경험을 이어주어 더욱더 풍요롭게 하려는 작은 안전 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전례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징들은 의미만을 담지 않고, 이 만남을 주선하는 매개체로서 먼저 자리 잡아 움직인다.

전례에 대한 개혁이나 혹은 또다른 어떤 실험들도 이런 “만남”에 더 깊이 기대야 할테다. 또한 그 만남이 “부활하신 예수의 신비”인 한, 이 신비가 가져다 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자신의 마음을 열어 맡겨야 한다. 그때 우리는 부활을 살아가는, 부활한 몸의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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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금요일 – 전례의 뒷 이야기

Friday, March 21st, 2008

세월은 망각때문에, 혹은 피할 수 없는 접촉과 영향때문에, 때로 반목했던 역사를 화해시키기도 한다.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에게 좋은 쪽으로 새 역사가 열린다면 이를 마땅히 즐길 만하다. 시간 속에서 창조와 모방과 변화가 늘 일어나 뒤 섞이는 탓에 누구에게 진본을 구하려는 것도 부질 없은 일이다.

성 금요일 전례 행사에서 도드라지는 두 예식은 십자가 경배와 성찬례 없는 영성체이다.

서방 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실제로 달렸던 십자 형틀을 기어이 찾아내어 이를 유물로 삼아 십자 경배를 했다고 한다(그래서 십자 경배에서는 십자고상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만 쓴다. “보라, 십자 나무. 거기 세상의 구원이 걸려 있네.”) 이 예식은 4세기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에게리아(Egeria)의 기록물에 등장하는데 아마 이를 전후로 서방에 유입되어 성 금요일 전례의 전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반면 동방 교회는 대체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묻는 것을 재현하며 이를 기리는데 초점을 두었다.

13세기 서방 교회에서 마리아 신심이 높아졌을 때 “애통하는 성모 마리아”(Stabat Mater)가 자식을 잃은 마리아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어 발전했다면, 동방 교회는 이미 죽어 내려진 예수의 시신과 성모 마리아와 십자가 주변에 남았던 여인들(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요한복음은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의 슬픔이 성 금요일(“위대한 금요일”) 전례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 관계는 우연일까?

성 금요일은 성찬례가 없는 유일한 날이다. 경우에 따라 전날 축성한 성체를 영하거나, 아예 이 마저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부재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는 예식이 있는데, 십자가 상에서 했다는 예수의 마지막 일곱 말씀을 복음서에서 뽑아 만든 묵상 예식이다. 최근에 성주간, 최소한 성금요일을 지키려는 개신교의 일각에서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실상 이 예식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미 페루에서 시작했던 예식이었다. 이게 이후 서방에 다시 역수입되고, 작곡가 하이든은 이 마지막 일곱 말씀에 따른 음악을 만들도록 주문을 받기도 했다.

국경과 문화와 시간을 뛰어넘는 음악의 힘 때문이었을까? 가상칠언 예식은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 더 쉽게 받아들여져 널리 퍼졌다. 아마도 성주간이나 성 금요일에 특별한 예식이 없는데다, 성서에 드러난 예수의 말씀에 초점을 두는 개신교 전통에서 아주 적절한 성 금요일 예식의 대안이 되었을 법하다. 각각의 말씀에 대한 설교나 혹은 묵상 안내로 저마다 훌륭한 예식이 되었다.

종교개혁이라는 격변 속에서 서로 상극으로 등장한 예수회 전통과 개신교 전통이 성 금요일 한 청년의 죽음 앞에서는 하나가 되는 것인가? 역사의 또다른 아이러니다. 하기야 요즘은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예수회 영성에 닻을 대려는 개신교 신학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역사적인 상극성과 영성적인 상동성은 또다른 문제이겠고, 어쨌든 서로 배우며 풍요로운 유산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참 좋은 일이기도 하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곱 말씀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34)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요한 19:26-27)

4.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5-46)

5. 목마르다. (요한 19:28)

6. 이제 다 이루었다. (요한 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가 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