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사목' Category

부활 – 상처가 서로 만나서

Sunday, April 12th, 2015

부활 – 상처가 서로 만나서 (요한 20:19~31)1

17세기 화가 카라바지오의 그림 <의심하는 토마>는 우리가 당연하듯 생각하는 토마의 불신앙을 더욱 과장하여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림에서 토마는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자기 손가락을 후벼 넣습니다. 상상만 해도 아물지 않은 상처의 쓰라림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주변의 두 제자마저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상처를 파고든 손가락을 향합니다. 과연 토마는 자기 신앙의 증거를 찾으려고 남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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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지오, <의심하는 토마>, 1601~2)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직후, 제자들 사이에서 긴박한 대책회의가 있었을 법하지만, 가리옷 유다가 빠진 제자단 열한 명 가운데 왜 유독 토마만 빠졌을까요? 스승의 죽음에 절망하여 낙향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여드레 뒤에 그가 다시 제자단 모임에 돌아온 것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에게 나타나 ‘네 손으로 확인하라’고 하셨을 때도, 토마는 카라바지오의 그림과는 달리, 곧바로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반깁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세상 밖을 헤매던 이가 아니고서는 이 반가움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정작 문제는 ‘무서워서 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있던 상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따른 자기폐쇄의 벽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두려워 말고 평화가 있기를” 하며 건네신 말씀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인사입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님 잉태 소식을 전할 때 건넸던 인사입니다. 이 인사는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때도 들려왔던 말씀입니다. 같은 인사가 부활의 경험 속에서 다시 울려 퍼집니다.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자신의 안녕만을 위하는 일이 불신앙이요, 그러한 두려움을 넘는 일이 신앙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닫아둔 벽과 마음’을 꿰뚫고 들어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숨’이 들어오는 틈을 마련할 때라야 우리는 생명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완벽하고 건강하게 ‘닫힌’ 몸과는 달리, 우리 삶에서 얻은 찢어지고 터진 상처야말로 하느님 은총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통로라는 뜻입니다. 꿰뚫고 들어오는 생명에 자신의 상처를 여는 일이 용기이며 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몸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삶의 상처와 고통을 없애려는 일이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하여 삶이 지닌 고통의 깊이를 살피는 일입니다. 그 상처를 새로운 창과 렌즈로 삼아 세상에 즐비한 다른 상처와 아픔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아물지 않은 예수님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 세상의 고통과 만나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이 하나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부활일부터 성령강림주일에 이르는 오십일의 부활절기는 터지고 열린 상처들이 만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교회가 탄생하는 과정입니다.

가슴이 휑히 뚫린 자신의 상처를 안고 토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만났습니다. 그 맞닿은 상처 안에서 토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 12일치 []

예수의 정체 – 배신자는 누구인가?

Sunday, March 29th, 2015

예수의 정체 – 배신자는 누구인가? (마르 11:1~11, 마르 14:1~15:47)1

예수님의 생애는 역설과 반전의 연속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합니다. 며칠 뒤 이들의 태도는 돌변합니다. 그들의 즐거운 환호는 한 사람을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성난 외침이 됩니다. 그 며칠 사이에 사람 마음을 그토록 잔인하게 바꾼 것은 무엇일까요? 성지주일-고난주일을 맞아, 종려가지를 흔들며 순행하면서 성찬례를 시작한 우리가 곧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생생한 수난복음을 읽고 듣는 기막힌 전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리스도교 교리에 익숙한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의 배신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제자들의 행태는 인간의 나약함과 배신을 분명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깨어서 함께 기도해달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지키지 못하고 제자들은 잠에 취하고, 제자 가리옷 유다는 스승을 팔아넘깁니다. 어떤 젊은 제자는 알몸으로 도망가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동안에 베드로는 그토록 따랐던 선생을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제자단의 일원이라 으스대던 남성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가고, 여성들이 그 참혹한 시간을 지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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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배신의 행동과 결과는 나타나지만, 그 동기는 아직 뿌옇습니다. 이때, 역설의 신앙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배신의 혐의를 예수님께 둘 법합니다.

세상이 환호하는 왕으로 오시는 분이라면 말을 타고 개선행진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배신하고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면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혁명조직 결성이 시급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배신하고 한가롭게 가난한 사람을 편들고 병든 사람을 고치시며, 행실이 의심스러운 여인을 보호합니다. 구세주라면 주류 종교지도자들과 협력하여 정통 신앙으로 사람을 결속하라는 기대가 큽니다. 예수님은 이를 배신하고 그들 종교권력의 거들먹거림과 끝내 불화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한 장본인입니다. 자신의 기대와 소망의 틀 안에 하느님을 욱여넣으려는 종교심을 향한 거절입니다. 자기의 안녕과 보호라는 틀 안에서 하느님을 측정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속 좁은 신앙심을 향한 배신입니다. 그 배신에 분노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자신이 세운 기대와 요구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배신감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나누는 관계, 친구들과 누리는 관계를 깨뜨리고 내던지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대와 소망을 여전히 배신하며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우리가 멋대로 세운 기대를 ‘비워서 내려 놓으라’(필립 4:7)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간직하여’ 세상이 말하는 성취의 가치, 승리의 질서를 배신하라는 초대입니다. 종교와 세상이 한통속이 되어 으스대며 휘두르는 권력의 질서를 배신하고,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의 질서와 하느님 나라에 순종하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세상의 질서와 권력에 대한 배신이 진정 예수님의 정체요,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의 배신에 담긴 진실에 우리 몸과 마음을 내어놓고 복된 역설의 성주간을 시작합시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29일치 []

구원 – 오직 사랑만이

Sunday, March 15th, 2015

오직 사랑만이 (요한 3:14~21)1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종교는 사랑을 쉽사리 신의 속성이라고 가르칠는지 모릅니다. 철학은 사랑을 행복의 원리로 말하기도 합니다. 과학은 사랑을 인간 생존본능의 한 표현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사랑은 움직이지 않는 속성이나 원리나 분석 대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역사와 삶 속에서 경험하고 기억하며 서로 선물로 주고 받는 사랑이기에 우리를 구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거룩한 수고와 숨결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실패가 반복되어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늘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그러나 사랑에 겨운 나머지 사람은 딴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이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보살펴 해방을 베푸셨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불편과 고통을 내세워 변덕을 부리고 사랑을 의심합니다.

여기서 사랑이 나뉩니다. 히포의 어거스틴 성인은 두 가지 사랑의 분열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룩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높은 도성에 속한 탓에 공동선을 생각하고, 다른 하나는 그 오만하여 공동선마저도 자기 개인의 것으로 만든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다른 하나는 반역한다. 하나는 진리에서 멀어진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칭송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나는 벗이 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다른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하나는 이웃의 선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하지만,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력을 휘두른다. 이 두 가지 사랑은… 세상 속에 섞여 있어 역사 속에서 계속될 것이지만, 마지막 심판이 그것을 가를 것이다”(De Genesi 11:15.20).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사랑도 자칫 자신을 향한 좁고 인색한 이기심이 되기 쉽습니다. 종교가 이를 조장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여전히 많은 종교가 자신을 향한 축복을 우선순위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정의와 자신의 축복을 분리하면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마련하여 우리에게 숨결처럼 불어넣어 주신 넓고 깊은 사랑은 인색하고 고약한 자기 사랑이 되고 맙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사회와 개인을 분리하면 종교의 가르침이 딴 곳으로 갑니다.

이처럼 분열된 사랑이 만드는 단죄와 심판을 거두시려고 예수님은 인간 고난의 극치를 몸소 겪으셨습니다. 무책임한 정치 권력이 그분을 십자가에 높이 매달았고, 부도덕한 종교 권력이 그분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축복의 결핍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통의 땀과 상처의 피가 새로운 삶의 새싹을 틔웠습니다. 춥고 어두운 땅에 갇혔던 씨앗이 봄(lent)의 빛과 생명으로 돋아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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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리는 회개로 사순절 여정을 시작한 우리는 이제 눈을 들어 높이 매달린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세상 곳곳에 퍼진 고통을 느끼고 그 신음을 듣습니다. 사랑의 작품인 우리가 겪는 고통에 안타까워하시며 하느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건네시는 손길에 응답하여, 우리도 하느님 사랑의 동료인 이웃에게 사랑의 눈길과 선물을 건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선물이어야 합니다.

오직 이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15일치 – 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