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사목' Category

교회 – 진리의 반석 위에 서서

Sunday, August 27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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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 진리의 반석 위에 서서 (마태 16:13-20)

영국의 옥스퍼드사전 위원회는 지난 2016년 세계의 새로운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습니다. 객관적인 진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소문이 진실인 양 떠도는 현상을 말합니다. 근거가 불분명하고 확인하지 않은 이야기를 자기 신념과 감정에 따라 진실이라고 우기는 태도를 뜻합니다. 이른바 뒷말과 소문은 이런 ‘탈-진실’의 현상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과정이어서 공동체의 신뢰를 크게 훼손합니다. 그러나 큰 진리를 향하여 작은 진실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과정은 답답하도록 느립니다. 신앙인은 이처럼 느리고 불편한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누룩’은 헛된 과장과 소문을 일컫습니다. 누룩의 용도는 빵을 만드는 것이나, 잘못 쓰면 음식을 썩게 합니다. 입과 말은 진실을 담아 전달하는 통로지만, 잘못 쓰면 헛된 소문으로 사람의 분별력을 막습니다. 인터넷이나 문자로 전달되는 소문이 난무한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남에게서 들은 소문과 자기 입에서 나오는 고백의 차이를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에 관해서 여러 사람이 ‘예언자’라고 수군거리는 모양입니다. 그리 나쁘지 않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예언자’라는 말에 담은 속뜻은 저마다 다릅니다. 권력을 비판하며 정의를 외친다는 칭찬일 수도 있지만,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해서 철없이 일찍 죽게 되리라는 비아냥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의 고백을 묻습니다. 풍찬노숙을 같이하며 길어 올린 배움과 진실의 공동체에 귀 기울이라는 의지입니다. 조금 생각이 다르더라도 함께 생활하고 대화하며 배우는 공동체에 먼저 신뢰를 두는 태도입니다.

공동체 대표 베드로의 고백은 또렷합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교회의 삶에 살아계신 분입니다. 개인의 종교적 신앙 대상에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아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을 이끄시는 왕입니다. 우리는 자기 길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베드로는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료 공동체 안에서 그분의 정체를 고백합니다. 남의 입에 발린 소문에 기대지 않고, 친구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정체와 진실을 확인하고 선언합니다.

신뢰와 진실의 고백만이 믿음의 터전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하늘에서 온 고백이라 칭찬하셨습니다. 자기 신념으로 조작하거나 자기감정 안에서 왜곡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에 바탕을 둔 튼튼한 믿음 만이 교회가 제대로 서는 반석입니다. 이런 믿음 만이 세상과 교회의 복잡한 일을 해결하고 화해를 이끌어 나가는 열쇠입니다. 세상의 풍파나 유혹, 그리고 생존의 위협도 이 믿음의 반석 위에 선 교회와 신앙인을 흔들지 못합니다.

선교 – 차별의 벽을 넘어

Sunday, August 2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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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 차별의 벽을 넘어 (마태 15:21-28)

테러와 전쟁의 위기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도 예외가 아니어서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신앙인의 마음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함께 어울려 서로 돕고 사는 일이 참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동시에, 이 같은 극단적 대결과 공격이 어디서 나오는지 헤아려서 신앙인의 태도와 행동을 바로 잡아야 할 사명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마침 오늘 복음은 테러와 전쟁의 명분이 되는 종교적 배타성, 이념적 대결과 차별주의가 예수님과 한 이방인 여인의 만남 안에서 무너지고 새로운 신뢰와 신앙으로 확장되는 길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선교 여행은 익숙한 유대 땅을 훌쩍 넘어 이방인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전통에 머물러 우쭐대는 위선을 질타하신 참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이 자기 신앙에 눈이 멀어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남들도 잘못 이끌고 마는 세태를 크게 비판하셨습니다. 그 뒤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 가나안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가나안 여인’에 담긴 뜻은 분명합니다. 유대인의 눈에 그는 상종하지 못할 이방인입니다. 우상 숭배자이며 정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여자’입니다. 현대 세계의 잣대로 보면, 종교와 이념, 지위와 성에 관련한 모든 차별이 다 적용되는 상황입니다. 새로운 땅으로 건너가는 모험을 하셨건만 유대인 남자들인 제자들과 예수님은 그 차별의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상종 못 할 ‘이방인 여인’이 다가와 건네는 요청을 거부하는 쩨쩨한 사람입니다.

여인은 ‘유대인 남자들’과 전혀 다릅니다. 한 생명을 보살피고 건지려는 간절함에는 종교의 벽이 없다고 확신하여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여인의 품 넓은 환대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리고 모멸감을 주는 언사를 견디며, 높은 사람과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깨우쳐 줍니다. 경계가 환하게 넓어집니다. 이로써 소위 ‘갑질’하려는 남자는 ‘을’의 처지에 있는 여인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고정관념을 거둡니다. 역할이 역전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현실에 도전받으며 다시 배우고 자신 생각과 행동을 고쳐나가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도전과 배움에 열려 스스로 깨지며 새롭게 깨달으시는 마당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기득권과 관습에 안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든 자기 생각과 경험만이 잣대일 수 없다는 일갈입니다. 온갖 분리와 차별의 벽을 넘어서 오직 생명이라는 가치에 신뢰를 두어 겸손하게 자신을 맡기는 일이 신앙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테러와 전쟁은 종교의 탈을 쓴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순혈주의에서 비롯합니다. 자기주장과 신념만이 옳다는 이념의 노예가 된 탓입니다. 자기 영역이 조금이라도 침해받으면 안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기득권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허위와 노예근성의 기득권을 훌쩍 넘어서 새로운 신앙의 도전으로 예수님마저 바꿔 놓았습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고 새로운 배움과 변화를 신뢰할 때, 예수님의 선교는 더 넓고 풍요롭게 확장합니다. 교회는 이렇게만 성장하고, 갈등과 대결의 세상에 평화와 신뢰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Sunday, August 13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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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마태 14:22-33)

희망은 고난으로 단단해집니다. 신앙은 풍파로 흔들리는 삶의 진실 안에서 자라납니다. 믿음은 여리고 아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성큼 다가옵니다. 삶의 상처는 쓰라려서 우리를 주저하게 하지만, 잠시 멈추어 세상의 아픔까지 헤아리게 합니다. 새로운 용기와 신앙의 은총은 여린 상처 안에서 조용히 솟아오르려 꿈틀거립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셨다는 오늘 복음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이어 나오는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을 흔드는 상처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참담한 죽음 탓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뱃속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던 사이였습니다. 두 분은 세례로 연결되었고, 요한이 갇히자 예수님께서 세상 전면에 나서셨습니다.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인간이 처절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주님은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 속에서 요한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홀로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병자들과 배고픈 이들이 따라나섰을 때, 그들의 처지가 마음 아팠습니다. 친구를 잃은 슬픔 속에서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슬픔의 눈길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바라보며 펼치신 성찬례였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슬픔을 안고 땅과 하늘이 만나는 거룩한 시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쟁으로 몸부림치며 성취를 향해 달음질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려고 멈춰서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상처와 슬픔을 하느님께 내보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희망과 신앙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기대와 달리 ‘조용하고 가녀린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듯이,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상실 안에서 눈물의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우리를 넘실거리며 위협하는 파도는 절망과 상실의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것을 피하며 허둥댈수록 그것들은 우리를 더욱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그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눈물 속에 내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의 바다에 몸을 던져서 그 눈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깨닫고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삶의 고난과 상실을 잊으려 하고 귀찮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삶의 무게가 파도가 되어 그를 두렵게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과 행복에 눈을 팔 자,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배고프고 가녀리고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깊은 슬픔과 눈물을 살피고, 함께 밥을 굶고, 함께 밤을 새우며 함께 깊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그 눈물의 바다 위를 걷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슬픔과 상처의 눈물 위를 예수님과 함께 걷는 신앙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