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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대주교는 ‘좌파’? – 공동체와 민주주의

Thursday, June 9th,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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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의 New Statesman 지(紙)에 쓴 글을 두고 영국 내 정치와 언론에서 논란이 거센 모양이다. 그의 글과 논란을 읽고 얻은 생각을 정리한다. 모처럼 긴 글이어서 차례를 먼저 적는다.

  1. 세속 정치와 성직자, 그리고 ‘정교분리’
  2. 성공회 전통 안에서 사회에 대한 시각과 실천
  3. 캔터베리 대주교들의 대(對) 사회 발언과 실천
  4.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는 ‘좌파’? – 공동체와 민주주의

1. 세속 정치와 성직자, 그리고 ‘정교분리’

성직자는 ‘세속’ 정치에 관하여 발언하면 안 되는가? ‘정교분리’는 성직자의 ‘세속’ 정치에 대한 발언을 막는 논리인가?

다른 교단의 입장은 차치하더라도, 성공회 전통에서 보자면, 성직자가 세속 정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성공회 전통과 역사와 신학을 다시 배워야 한다. 진심이다.

한편, ‘정교분리’라는 논리는 성직자의 세속 정치 참여, 혹은 그에 대한 발언을 막는 논리가 아니다. ‘정교분리’는, 한마디로, 특정 종교의 이념과 신념 체계를 정치에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로 발전된 것이다. 종교가 세속 정치에 발언하는 것을 반대하는 논리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정교분리’ 논리가 악용되는 사례는 미국과 한국의 보수적 교회에서 뚜렷한데, 실제로는 보수 교회들과 지도자들이 이 논리를 특유의 성속/영육 이원론과 섞어서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는 데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질 나쁜 정치 참여를 한다.

세계 성공회의 최고 지도자요, 영국 성공회를 치리하는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최근 UK 연립 정부(보수당-자유당)의 정책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해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대정부 발언을 두고 정치인들과 언론이 찬반으로 다투고 있지만, 캔터베리 대주교가 정치에 대해 발언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소리는 없다. 그의 비판 내용과 논리가 바른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서로 논쟁할 뿐이다.

2. 성공회 전통 안에서 사회에 대한 시각과 실천

그 내용을 살피기 전에, 한국 성공회 신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대정부 비판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그동안 한국 사회와 정치가 거의 60년대 수준으로 뒷걸음치면서, 교회 역시 보수화 물결에 올라타고 있다. 성직자들이 특정 정당과 정부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두고, ‘정치 발언’을 그만두라는 불평의 언성이 높다고 한다. 나 자신이 한 명의 신자요 사제로서, 이 현상을 바라볼 때, 두 가지 근거를 두고 생각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인 됨의 시작인 세례 언약이요, 둘째는 성공회의 경험과 전통이다.

첫째, 모든 신자는 세례 언약을 한다. 부활 밤 전례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세례가 있을 때면, 우리는 이 세례 언약을 갱신이다. 그 마지막 질문과 다짐은 이것이다.

여러분은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힘쓰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겠습니까?
예, 하느님의 도우심을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자인 성직자는 이 세례 언약에 근거를 두고, 성직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권고와 다짐을 받는다.

부제는… 교회의 신자들과 함께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웃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세상과 교회를 섬기며 봉사해야 합니다.

그대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이웃을 돕고 보살피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며 이 세상을 지키는 파수꾼과 청지기로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이끌어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새 언약의 성사를 거행하여 이 세상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도록 힘쓰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서 다짐하는 언약이 세상의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둘째, 성공회의 역사적 경험과 전통은 세상 정치에 대한 무관심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한 참여가 각별했다. 성공회가 시작된 ‘영국’ 성공회가 여전히 국교이다(현재 세계 성공회에서 영국 성공회만이 영국의 국교일 뿐,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교파 교회로 존재한다). 그 역사적인 발전에서 나타난 관계 변화를 고려하더라도, 이는 교회가 세속 정치와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대표적 사례이다. 종종 잘못 이해하고 있는 ‘국교'(Established Church)는 원래 ‘국민 교회'(National Church)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했다. 나중에 이것이 ‘국가 교회'(State Church)로 변하면서 문제가 되긴 했지만, 성공회는 이 ‘국민 교회’라는 생각으로 교회의 사회 참여, 특히 예언자적 참여의 경험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 경험 탓에, 성공회의 신학과 영성 전통 어디를 봐도, 일상의 삶, 사회 정치적인 삶과 동떨어진 주장이 없었다. 발생 당시의 영국 복음주의가 얼마나 사회 참여와 그 개혁에 적극적이었는지, 성공회-가톨릭주의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실천을 통해서 그 신학과 영성을 얼마나 깊이 발전시켰는지를 보면 안다. 성공회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3. 캔터베리 대주교들의 대(對) 사회 발언과 실천

이런 점에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대정부 비판은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그동안 왜 주저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역대 캔터베리 대주교 가운데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사목적으로 훌륭했노라고 기억되는 분들은 대체로 세속 정치에 대한 발언이 더욱 강했다.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 대주교는 2차 세계 대전 중인 영국 국민을 위로하면서, 전후 UK 복지 국가 모델의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Christianity and Social Order, 1942). 그는 주교로서는 처음으로 한때 노동당 당원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교회는 자기 내부의 일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지상의 유일한 사회이다.”

최근 예로,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마가렛 대처 총리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영국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며, 대처 정부의 강압적인 노동 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대처 총리는 당시, 런시 대주교의 정치적 비판을 두고 “그러면, 광부들과 석탄을 먹고 살던가” 라고 대꾸하여 사회적인 공분을 샀다. 또, 영국이 아르헨티나와 벌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대처 총리가 ‘승전 기념 미사’를 드리자고 제안하자, 런시 대주교는 하느님 앞에서 전쟁의 승자와 패자는 없으며, 오직 전쟁의 희생자들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는 양국 ‘희생자들을 위한 기억의 위령 미사’를 드렸다.

4.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는 ‘좌파’? – 공동체와 민주주의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번 대정부 비판에서는 ‘좌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뜻이 비친다. 이 말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 정치 세력들이 역사 속에서 좌파가 추구했던 가치를 무시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그 가치는 바로 그리스도교 전통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공동체’에 대한 생각과 잇닿는다. 이 가치를 위해서라면 당신 자신이 논쟁을 일으키겠다는 각오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현재의 UK 연립 정부(보수당-자유당)가 추구하는 ‘큰 사회'(Big Society) 정책이 매우 모호하며, 이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검토를 거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검토되지 않고 모호한 정책의 실효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지난번 정권이 잘못해서 그렇다,” “경제가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만 둘러댄다고 비판한다. 특히 교육 정책, 복지 정책 등에서 가난한 이들의 삶이 위협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영국 사회가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만들어 온 바른 가치, 즉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좌파’적이라면, 그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현 정부를 성토하겠다는 의지마저 읽힌다.

윌리암스 대주교가 문제라고 지적한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그 정책에 대해 평가할 능력이 없다. 다만, 윌리암스 대주교가 지적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공동체에 대한 가치 회복은 우리 사회와 교회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점을 우리 안에서 성찰하여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면, 우리 사회나 교회는 계속해서 가난의 희생자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세례 언약에서 다짐한 “정의와 평화”는 고사하고, 맛을 잃어 길에 버려져 밟히는 소금 처지가 될까 두렵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종교와 신학을 온정주의라는 차원에 말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우리가 되새겨야 할 신학 전통이 있다. 이 전통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온정의 대상이 아니라, 지탱 가능한 공동체의 본질로 본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마치 몸을 도는 피와 같은 존재이며,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 내는 힘이다. 이 전통은 다른 사람들과 집단의 능력을 세워준다. 그리하여 이들이 다시 사회에 생명과 책임을 가져다주도록 한다. 놀랍게도 이것이야말로 성 바울로 사도가 생각했던 공동체이다. 하느님은 이런 공동체를 원하신다

민주주의는 이런 이상을 평가하는 잣대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정책에서라도 민주주의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즉, 민주주의를 통해 한 사람과 집단이 얼마나 넉넉하게 참여하는가,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다른 사람과 집단에 풍요로운 복지를 제공하도록 하느냐는 문제이다. 초기 생디칼리스트의 말을 빌자면, 국가를 ‘공동체들의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이나 다수결주의를 넘어서며, 지역이기주의를 초월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공유하는 필요와 희망과 진정한 포용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후원: 한누다 교우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

번역 후 잡감 – 신학, 식민지성, & 역사의 맥락

Saturday, January 29th, 2011

1. 세계 성공회 관구장 회의가 열리고 있다. 우간다 성공회를 포함한 아프리카의 여러 성공회 관구장들은 이 관구장 회의를 반대하며 참석하지 않았다.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가 여전히 제재 없이 참석한다는 이유였다. 함께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들 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브라질 관구장 마우리치오 주교는 “에큐메니칼 대화도, 다종교간 대화도 가능하다면서, 왜 성공회 주교끼리는 대화할 수 없단 말인가?” 되물으며 그 보수적인 관구장 주교를 비판한 바 있다. (기사 연결)

2. 한편, 우간다 성공회는 우간다 정부가 추진 중인 동성애자 처벌법을 지원하고 있다. 이 법은 동성애자를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다. 국제적인 비판이 지속되지만 안하무인이다. 그러던 중에, 우간다 동성애자 인권운동가 한 사람이 혐오 범죄 행위의 대상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관구장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박사는 곧장 동성애 혐오 범죄 행위를 규탄하며, 영국 정부에 우간다 동성애자들의 망명을 허용하는 조치를 촉구했다. (기사 연결) 그러나 알만한 이들에게 그의 목소리는 늘 한발 늦으신 것 같다. (cf. 배신, 식민주의, 그리고 캔터베리 대주교)

3.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 저작을 내기도 해 살핀 바 있는, 젊은 신학자 테오 홉슨(Theo Hobson)의 영 가디언 지 칼럼을 하나 읽는다. 그는 오랫동안 아나키적 교회 문화를 꿈꾸며 거리 예배 등 매우 파격적인 교회 실험을 해 오던 실천적인 신학자이다. 칼럼을 보니 그가 아예 미국으로 이주했나 보다. 그가 추구하는 교회의 실험을 확장하기 위한 것일게다. (어떤 이의 ‘귀여운’ 부탁도 있고, 읽으며 마음먹은 바 있어서 전문을 번역해서 따로 올렸다.)

4. 복잡한 이유로 미국 유학행을 결심했을 때, 많은 이들은 ‘성공회라면 당연히 영국에 가서 공부해야지’하며 걱정 반 빈정거림 반으로 묻곤 했다. 물론 내 이유와 결심은 상당히 확고한 것이었지만, 그리 자주 설명한 기회가 없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성공회=영국 성공회=국교”라는 잘못된 등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아예 귀를 열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서 미국 신학생들에게 “성공회 신앙 전통과 삶”을 교수 신부님과 함께 가르치는 마당이지만, 한국에서는 내 ‘미국 성공회’ 경험은 ‘모(母) 교회 영국’이 아닌 변방의 목소리라고 치부되곤 한다. 혹은 미국물 먹어서 이상한 목소리를 들고 사람을 선동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애처로운 일이다. 우리 교회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5. 여러 이유에서 한국에 있을 때부터 세계 성공회 소식을 신자들과 나누려고 애썼고, 이곳에 와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요즘은 시들해졌다. 편견에 싸우는 일에 지친 탓도 있다. 미국 성공회, 아니 세계 성공회에 대해서,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으로 성공회 신앙의 전통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모 교회’를 숭상하든 어떻든, 신앙은 특정한 시공간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하느님 경험에서 비롯한다. 그 신앙의 다양한 경험을 보편적 언어와 논리로 풀어서 소통해보려는 노력이 신학이다. 이 점에서 신앙과 신학은 모두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6. 성공회 신학자들의 신학과 성공회 전통의 신학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손꼽히는 성공회 전통의 신학적 대가들과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이야기하는 일은 좀 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성공회의 경험이 없이는 성공회 전통의 신학을 다루기도 말하기도 어렵다. 그 경험 중에서 스코틀랜드 성공회와 미국 성공회의 경험이 가장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스코틀랜드 성공회는 국교의 위치를 점한 적이 없었고, 늘 소수자로 존재했다. 또 미국 성공회는 소위 신대륙 식민지에 이식된 영국 교회에서 최초로 독립한 성공회다. 이 독립된 성공회를 기초로 세계 성공회(Anglican Communion)라는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그 식민지 경험와 독립, 그리고 그 와중에서 마련된 자기 정체성 찾기가 독특한 성공회의 기풍을 만들었다. 이 경험에서 배우지 않으면 우리 역시 식민지 교회를 벗어나기 어렵다.

7. 앞에 올려놓은 테오 홉슨의 칼럼(우리말 번역)은, 영국 성공회 안에서 자라나, 그 도저한 문제들에 환멸을 느끼고 실험적 교회 운동을 벌이다, 미국 성공회까지 경험을 확장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고민이다.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야 비로소, 식민지 경험에서 독립하여 그 경험과 전통의 대화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려 노력했던 미국 성공회의 역사 한 가닥을 겨우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다. 미국 성공회는 홉슨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다른 어둔 면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니까. 이 어둔 면을 발견하여 그의 비판과 실험을 밀고 나갈 수 있을 때라야, 그는 정말 그의 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모델은 만들어 나갈 것이지, 발견할 대상이 아니다. 그가 그 모델을 만들어가길 빈다. 나 역시 우리 맥락에서 어느 모델을 만들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해야 한다.

“여성 혐오의 승리에 길을 잃은 신앙인들”

Wednesday, January 19th, 2011

2009년 10월 천주교 교황청에서 성공회를 탈퇴한 보수파 인사들을 위한 특별 조치가 발표된 바 있다. 문제의 핵심은 성공회의 여성 성직이었다. 세계 성공회 안에서도 뒤늦게 영국 성공회가 1992년에 여성 사제직을 인정하고, 여성 주교직의 걸림돌도 제거한(2014년 이후 가능) 마당에, 성공회 내 보수 인사들이 탈퇴 이후를 교황청과 논의하면서 나온 조치였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직후에 로마에서 있는 교회 일치에 대한 강연에서 성공회의 여성 성직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2010년 교황의 영국 방문과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시복식과 더불어, 탈퇴한 성공회 성직자들에 대한 조치는 더욱 탄력을 받았고, 지난 11월에는 영국 성공회의 몇몇 주교들(은퇴 주교 포함)이 천주교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셋이 천주교에서 부제와 사제로 동시에 재서품을 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영 가디언지는 이례적으로 사설에 이 문제를 다루면서, 천주교의 조치와 이 사건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여성 혐오”가 교회 권력 사이에서 힘을 얻는 동안에 정작 신자들을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고 경고한다.

사설을 아래에 옮긴다.

“여성 혐오의 승리에 길을 잃은 신앙인들”

지난 9월 교황 베네딕트의 영국 방문 끝에 그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앞에 펼친 기세와 호의는 영국 천주교에 도전을 가져다 주었다. 거리낌 없는 (여성 성직) 반대자들이었던 전직 성공회 주교들을 부제서품과 사제서품을 단번에 연결해서 재빨리 천주교 사제로 서품한 일은 대부분 사람들이 원하는 우선 과제는 아니었다.

영국 천주교를 이끄는 빈센트 니콜스 대주교는 개인적으로 불편하게 생각하던 일을 어제 행사에서 최선을 다해 잘 처리했다. 모양을 냈을 지언정, 이는 천주교가 성공회에 대해 사람 빼내기에 집중했다는 사건이다. 이로써 종교개혁 이후에 잃은 점수를 천주교는 만회했는지 모른다.

여성 성직에 반대하면서 성공회를 탈퇴한 사람들을 위한 천주교의 특별 자치 교구는 천주교 내부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양 교회의 긴장을 야기할 뿐이다. 그리하여 다시한번 그 관심은 그리스도교의 다른 교단들 사이의 논쟁에 쏠리게 될 것이며, 종교를 실제 세상과는 관계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할 것이다.

가난의 문제, 기후 변화, 자연 재해 등 우리 지구가 직면한 모든 도전들을 염려하는 판국에, 종교 기간들이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로 언쟁하면서 소진하는 모습은 빈정거림의 대상이다

이제 종교 만이 여전히 여성을 이등 시민으로 다룬다. 천주교가 자신과 더불어 제도적인 여성 혐오를 나누면서 성공회를 탈퇴한 한 줌의 변절자들을 모집하는 일이 계속 잘 될 것이라 믿는다면, 이는 오산이다.

이 와중에, 교회가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들, 즉 사회 정의를 위한 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일들은 다시한번 무대 밖으로 밀려난다. 이런 교회 권력의 정치 게임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대부분의 영국 천주교 신자들은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다른 종교의 신앙인들이나 무종교인들, 그리고 좀 더 깨어있으며 관대한 이들은 분노를 가지고 점차 그들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영 가디언, 2011년 1월 16일치 http://goo.gl/yb9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