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와 브룩스의 “메시아 콤플렉스”
Monday, January 11th, 2010아거(gatorlog)님이 전문 번역한 뉴욕 타임즈 데이빗 브룩스의 [아바타]에 관한 글 “아바타와 메시아 콤플렉스”를 읽고 갑자기 부조리한 생각이 동하니 흐르는 대로 두드려 본다.
1.
영화 [아바타]는 ‘메시아 콤플렉스’의 영화일까? 그래서 어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영화’일까? 아니면 이런 비판은 영화사에 획기적인 사건을 그은 어떤 기술적 성과와 이미지의 풍요로운 혼성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비난일 뿐인가? 논쟁의 전선이 전자는 서구 식민주의 유산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읽기로, 후자는 엄청난 자본의 힘을 입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의 발로로 분명히 그어지기만 한다면, 논쟁의 독자나 관람자는 정작 내용보다는 치고받는 흥미로운 싸움에만 관전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사실 모든 일이 이렇게 간단했으면 싶다.
그런데 처지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어느 ‘세련된 보수 논객’과 한국의 어느 비판적 관람자의 비평이 한 쌍을 이루는 듯하고, 모든 일에 꽤 회의적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듯한 어느 비판적 블로거들에게는 영화사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거나, 전자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과도한 일반화로 그 속내를 비추지 못했다는 반박이 나오는 처지에서 보면, 도대체 피아가 구분이 되지 않는 몹시 ‘포스트모던’한 양상이 되어 버린다.
2.
여느 전문가적인 논쟁에서 느끼듯, 이런 화려한 논쟁의 수사와는 멀리, 나는 그저, 슬픈 일을 당한 우리 가족을 위로한다며 그전에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어떤 이가 [아바타] 관람권을 손수 마련해 건네 준 탓에, 한 저녁의 호사를 누렸을 뿐이다. 영화 [아바타]는 우리에게 ‘가족 영화’였다.
열한 살 난 아들 녀석은 곧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만화’ 판타지를 넘어서 실제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모든 시각 효과에 압도되었다. 막 아홉 살이 된 딸 아이가 관람 후 대뜸 슬픈 영화로 단정 짓자, 둘은 입을 맞춘 듯 나비 족 공동체의 뿌리였던 멋진 나무가 폭격당해 무너지는 장면이 가장 마음 아팠노라고 했다. 아내는 제이크와 나비 족 여인의 사랑과 그 배경의 아름다움이 선연한, 어찌 보면 전체적으로 사랑 영화로도 다가온다며 다소 엉뚱한 관람평을 내놓았다. 영화 막바지 제이크가 이끄는 전쟁 승리의 쾌감은 뒷전이었다. 영화를 잘못 보고 제임스 캐머런을 배반한 것인가?
내게도 역시 판에 박힌 영화의 줄거리보다는 현란한 수많은 이미지의 차용과 합성, 그리고 어떤 상상력에 따라 마련한 아름다운 배경이 눈을 즐겁게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가끔 선연하게 등장하는 종교적인 상징들과 이미지들, 그리고 의례(ritual)들이 눈에 들어 머리를 환기시키곤 했다. 그 가운데 영화 막바지 네이티리가 정신을 잃은 진짜 제이크를 안은 피에타(pieta) 이미지를 보고는 ‘성모 마리아 콤플렉스’ 영화라 불러야 할까 하는 다소 ‘스놉'(snob)한 얕은 잔꾀를 생각해 내기도 했다.
다만, 영화를 본 뒤 트위터에 몇 마디 보탰다. 이런 것이었다.
인태(@tuesdaymoon)님이 가족 위로차 마련해 준 극장표로 [아바타] 감상. 현실에 떠다니는 온갖 이미지들을 총집합하여 현란하게 요리하고 있었는데, 종교적인 면에서는 ‘창조 질서’ ‘욕망’ ‘아름다움’ ‘구원’의 연관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바타] 신학적 반성과 되새김의 이미지들: 신(God)이 아닌 신성(deity)과 그 여성성, 창조(자연)에 대한 지배가 아닌 교감, 공동체(네트워크)를 통한 서품(ordination) 의식,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피에타(pieta) 등.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적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온갖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서로 모순되듯 교차하여, 뻔한 시나리오에 대한 판단을 교란하고 있었다. 줄거리나 시나리오가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이미지들의 복잡한 운동이다. 이미지의 움직임은 시나리오를 뛰어넘는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수천억 원을 들여 빤한 ‘콤플렉스’ 영화를 만들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 명백한 지루함, 혹은 발가벗은 메시지들은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못한 그저 그런 것들이 아니었나?
3.
데이빗 브룩스의 글을 다시 읽는다. 이 세련되고 명석한 보수 논객은 분명하고도 영리한 덫을 놓는다. 제목부터가 “메시아 콤플렉스”. 사람들은 ‘메시아’ 표상에 혹하겠으나, 그의 방점은 ‘콤플렉스’에 있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를 ‘우화’로 단정해 버린다. 영화가 내포할 수 있거나 해석될 수 있는 현실성을 저만큼 비켜나가게 하고 저열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리고는 뻔하다며 볼멘소리하던 그 줄거리를 주구장창 스포일러를 감내하며 풀어놓는다. 그것도 이리저리 비꼬는 투로. 마지막에 이런 논점이 불편할 정도로 공격적이라고 묻는 그는 교활하다. “미국 군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구경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실은 자신이 불편한 것이다. 대답을 위한 가정은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고, 여기에 독자들은 걸려 들어, 짐짓 ‘문화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나선 것은 아닌가 하고 헷갈려 하기 시작한다. ‘이 보수 논객, 웬만한 진보 논객보다 관점 좋고 훨씬 날카롭잖아?’ 이럴 만하다.
세상 아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으며, 캐머런 감독이 개과천선하여 자본주의를 뒤엎자는 혁명을 할 사람도 아니요, 그걸 기대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가 우화라 할지라도, 그 우화에서도 우화를 넘어서 배울 수는 있는 법이다. 게다가 온갖 이미지의 운동 속에서 서로 부딪히는 여러 모순은 시나리오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수많은 모순의 경계 안에서, 독자/관람자는 자신의 삶의 처지에 따라 그 해석을 다양하게 펼쳐 나갈 것이다. 그 수용과 해석의 다양성과 폭이 넓은 만큼 그 영화는 문제작, 나아가 좋은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더 많은 여지를 얻을 것이다.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브룩스가 이 영화에 대고 이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다. 오바마의 대선 수락 연설을 비꼬아 중계하던 브룩스는 언젠가 부시(G.W.Bush)에 대한 심기 복잡한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이번 아바타 평과 제목이 비슷하다. 이른바 “부시 역설”(The Bush Paradox). 이 글에서 그는 부시의 장단점을 균형 있게 지적하는 듯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약점들이 어떻게 그의 이라크 전쟁 전략에 제대로 먹혀들어갔는지를 설명하려 든다. “인생은 복잡한 거야.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이유는 한 쪽이 언제나 옳은 게 아니기 때문이지. 정말 위험한 사람은 분명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야”라며, 부시가 아니라 독자들을 타일렀다. 실은 그 글이야말로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가 되고, 이 영화평이야말로 “아바타의 메시아 역설”이라고 했어야 정직한 것이었다. ‘복잡한 인생’과 ‘명백한 사실’ 운운은 실은 자신에게 돌려야 할 말이었다. 허위 정보에 입각한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야말로 비뚤어진 ‘메시아 콤플렉스’였고, 아바타는 ‘군산복합체’와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개척’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서도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다룬 적이 없다. 그런 그의 말들이 낯 간지럽다.
그나저나 ‘콤플렉스’를 겪는 이는 브룩스 자신이 아닐까? 그는 제 주장과 비판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어디에는 갖다 붙일 수 있는 ‘전능하고 보편적인 신의 컴플렉스’를 가졌는지 모른다. 오지랖 넓은 그 보편성은 매혹적인 비판점을 아우르는 듯하지만, 그 밑으로 감추는 것들이 많다. 대체로 많은 보수주의자에게서 보이는 이 버릇과 복합감정은 종종 근본주의자들과 근사치를 이루는 일이 빈번하다. 부시와 빈 라덴의 사례처럼. 자기 말고는 다른 메시아의 등장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아 예수를 죽였던, 그 어떤 무리처럼. 한사코 자신이 인정하는 메시아가 아니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마침내 ‘선택된 민족’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버린 시온주의자들처럼.
4.
영화를 두고 두어 마디 트위터에 적은 며칠 후, 전투적 여성 해방 신학자 메리 데일리(Mary Daly)의 죽음 소식을 접했다. 그를 되새기며 그의 책 어느 부분을 다시 찾아 읽었다.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메리 데일리(Mary Daly). 그가 최전방까지 밀고 가 마련한 신학적 비판과 상상력의 경계와 공간 때문에, 여전히 마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 같은 이마저 얼마나 너른 자유의 숨을 쉬었던가!
그러더니 다시 영화 아바타의 모순된 이미지들의 향연이 떠올랐다. 다시 트윗팅.
이미지들의 복합체인 영화 아바타의 궤도를 교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역시 메리 데일리 같은 이들이 제안하는, 잊혀진 전통의 복원을 통한 상상력과 (남성적) 지배의 의미 구조와 역사에 대한 급진적(근본적) 비판과 반성이겠다.
중첩된 이미지들과 오염된(순수는 환상이니까) 이야기들이 겹친 시나리오는 언제나 ‘제멋대로’ 해석을 열어둔다. 그 해석의 다양성은 좋은 작품임을 드러내지만, 종종 그 중첩과 오염 속에서 그 비판적 의미의 궤도를 잃기 때문이다.
비판과 반성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지 않는 것이었으면 한다.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렸다.”
(허튼 글이지만, 우리 식구를 위로하려고 영화표를 마련해 준 김인태(@tuesdaymoon)님의 따뜻한 마음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