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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와 브룩스의 “메시아 콤플렉스”

Monday, January 11th, 2010

아거(gatorlog)님이 전문 번역한 뉴욕 타임즈 데이빗 브룩스의 [아바타]에 관한 글 “아바타와 메시아 콤플렉스”를 읽고 갑자기 부조리한 생각이 동하니 흐르는 대로 두드려 본다.

1.
영화 [아바타]는 ‘메시아 콤플렉스’의 영화일까? 그래서 어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영화’일까? 아니면 이런 비판은 영화사에 획기적인 사건을 그은 어떤 기술적 성과와 이미지의 풍요로운 혼성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비난일 뿐인가? 논쟁의 전선이 전자는 서구 식민주의 유산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읽기로, 후자는 엄청난 자본의 힘을 입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의 발로로 분명히 그어지기만 한다면, 논쟁의 독자나 관람자는 정작 내용보다는 치고받는 흥미로운 싸움에만 관전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사실 모든 일이 이렇게 간단했으면 싶다.

그런데 처지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어느 ‘세련된 보수 논객’과 한국의 어느 비판적 관람자의 비평이 한 쌍을 이루는 듯하고, 모든 일에 꽤 회의적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듯한 어느 비판적 블로거들에게는 영화사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거나, 전자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과도한 일반화로 그 속내를 비추지 못했다는 반박이 나오는 처지에서 보면, 도대체 피아가 구분이 되지 않는 몹시 ‘포스트모던’한 양상이 되어 버린다.

2.
여느 전문가적인 논쟁에서 느끼듯, 이런 화려한 논쟁의 수사와는 멀리, 나는 그저, 슬픈 일을 당한 우리 가족을 위로한다며 그전에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어떤 이가 [아바타] 관람권을 손수 마련해 건네 준 탓에, 한 저녁의 호사를 누렸을 뿐이다. 영화 [아바타]는 우리에게 ‘가족 영화’였다.

열한 살 난 아들 녀석은 곧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만화’ 판타지를 넘어서 실제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모든 시각 효과에 압도되었다. 막 아홉 살이 된 딸 아이가 관람 후 대뜸 슬픈 영화로 단정 짓자, 둘은 입을 맞춘 듯 나비 족 공동체의 뿌리였던 멋진 나무가 폭격당해 무너지는 장면이 가장 마음 아팠노라고 했다. 아내는 제이크와 나비 족 여인의 사랑과 그 배경의 아름다움이 선연한, 어찌 보면 전체적으로 사랑 영화로도 다가온다며 다소 엉뚱한 관람평을 내놓았다. 영화 막바지 제이크가 이끄는 전쟁 승리의 쾌감은 뒷전이었다. 영화를 잘못 보고 제임스 캐머런을 배반한 것인가?

내게도 역시 판에 박힌 영화의 줄거리보다는 현란한 수많은 이미지의 차용과 합성, 그리고 어떤 상상력에 따라 마련한 아름다운 배경이 눈을 즐겁게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가끔 선연하게 등장하는 종교적인 상징들과 이미지들, 그리고 의례(ritual)들이 눈에 들어 머리를 환기시키곤 했다. 그 가운데 영화 막바지 네이티리가 정신을 잃은 진짜 제이크를 안은 피에타(pieta) 이미지를 보고는 ‘성모 마리아 콤플렉스’ 영화라 불러야 할까 하는 다소 ‘스놉'(snob)한 얕은 잔꾀를 생각해 내기도 했다.

다만, 영화를 본 뒤 트위터에 몇 마디 보탰다. 이런 것이었다.

인태(@tuesdaymoon)님이 가족 위로차 마련해 준 극장표로 [아바타] 감상. 현실에 떠다니는 온갖 이미지들을 총집합하여 현란하게 요리하고 있었는데, 종교적인 면에서는 ‘창조 질서’ ‘욕망’ ‘아름다움’ ‘구원’의 연관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바타] 신학적 반성과 되새김의 이미지들: 신(God)이 아닌 신성(deity)과 그 여성성, 창조(자연)에 대한 지배가 아닌 교감, 공동체(네트워크)를 통한 서품(ordination) 의식,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피에타(pieta) 등.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적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온갖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서로 모순되듯 교차하여, 뻔한 시나리오에 대한 판단을 교란하고 있었다. 줄거리나 시나리오가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이미지들의 복잡한 운동이다. 이미지의 움직임은 시나리오를 뛰어넘는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수천억 원을 들여 빤한 ‘콤플렉스’ 영화를 만들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 명백한 지루함, 혹은 발가벗은 메시지들은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못한 그저 그런 것들이 아니었나?

3.
데이빗 브룩스의 글을 다시 읽는다. 이 세련되고 명석한 보수 논객은 분명하고도 영리한 덫을 놓는다. 제목부터가 “메시아 콤플렉스”. 사람들은 ‘메시아’ 표상에 혹하겠으나, 그의 방점은 ‘콤플렉스’에 있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를 ‘우화’로 단정해 버린다. 영화가 내포할 수 있거나 해석될 수 있는 현실성을 저만큼 비켜나가게 하고 저열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리고는 뻔하다며 볼멘소리하던 그 줄거리를 주구장창 스포일러를 감내하며 풀어놓는다. 그것도 이리저리 비꼬는 투로. 마지막에 이런 논점이 불편할 정도로 공격적이라고 묻는 그는 교활하다. “미국 군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구경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실은 자신이 불편한 것이다. 대답을 위한 가정은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고, 여기에 독자들은 걸려 들어, 짐짓 ‘문화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나선 것은 아닌가 하고 헷갈려 하기 시작한다. ‘이 보수 논객, 웬만한 진보 논객보다 관점 좋고 훨씬 날카롭잖아?’ 이럴 만하다.

세상 아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으며, 캐머런 감독이 개과천선하여 자본주의를 뒤엎자는 혁명을 할 사람도 아니요, 그걸 기대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가 우화라 할지라도, 그 우화에서도 우화를 넘어서 배울 수는 있는 법이다. 게다가 온갖 이미지의 운동 속에서 서로 부딪히는 여러 모순은 시나리오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수많은 모순의 경계 안에서, 독자/관람자는 자신의 삶의 처지에 따라 그 해석을 다양하게 펼쳐 나갈 것이다. 그 수용과 해석의 다양성과 폭이 넓은 만큼 그 영화는 문제작, 나아가 좋은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더 많은 여지를 얻을 것이다.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브룩스가 이 영화에 대고 이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다. 오바마의 대선 수락 연설을 비꼬아 중계하던 브룩스는 언젠가 부시(G.W.Bush)에 대한 심기 복잡한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이번 아바타 평과 제목이 비슷하다. 이른바 “부시 역설”(The Bush Paradox). 이 글에서 그는 부시의 장단점을 균형 있게 지적하는 듯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약점들이 어떻게 그의 이라크 전쟁 전략에 제대로 먹혀들어갔는지를 설명하려 든다. “인생은 복잡한 거야.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이유는 한 쪽이 언제나 옳은 게 아니기 때문이지. 정말 위험한 사람은 분명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야”라며, 부시가 아니라 독자들을 타일렀다. 실은 그 글이야말로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가 되고, 이 영화평이야말로 “아바타의 메시아 역설”이라고 했어야 정직한 것이었다. ‘복잡한 인생’과 ‘명백한 사실’ 운운은 실은 자신에게 돌려야 할 말이었다. 허위 정보에 입각한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야말로 비뚤어진 ‘메시아 콤플렉스’였고, 아바타는 ‘군산복합체’와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개척’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서도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다룬 적이 없다. 그런 그의 말들이 낯 간지럽다.

그나저나 ‘콤플렉스’를 겪는 이는 브룩스 자신이 아닐까? 그는 제 주장과 비판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어디에는 갖다 붙일 수 있는 ‘전능하고 보편적인 신의 컴플렉스’를 가졌는지 모른다. 오지랖 넓은 그 보편성은 매혹적인 비판점을 아우르는 듯하지만, 그 밑으로 감추는 것들이 많다. 대체로 많은 보수주의자에게서 보이는 이 버릇과 복합감정은 종종 근본주의자들과 근사치를 이루는 일이 빈번하다. 부시와 빈 라덴의 사례처럼. 자기 말고는 다른 메시아의 등장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아 예수를 죽였던, 그 어떤 무리처럼. 한사코 자신이 인정하는 메시아가 아니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마침내 ‘선택된 민족’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버린 시온주의자들처럼.

4.
영화를 두고 두어 마디 트위터에 적은 며칠 후, 전투적 여성 해방 신학자 메리 데일리(Mary Daly)죽음 소식을 접했다. 그를 되새기며 그의 책 어느 부분을 다시 찾아 읽었다.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메리 데일리(Mary Daly). 그가 최전방까지 밀고 가 마련한 신학적 비판과 상상력의 경계와 공간 때문에, 여전히 마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 같은 이마저 얼마나 너른 자유의 숨을 쉬었던가!

그러더니 다시 영화 아바타의 모순된 이미지들의 향연이 떠올랐다. 다시 트윗팅.

이미지들의 복합체인 영화 아바타의 궤도를 교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역시 메리 데일리 같은 이들이 제안하는, 잊혀진 전통의 복원을 통한 상상력과 (남성적) 지배의 의미 구조와 역사에 대한 급진적(근본적) 비판과 반성이겠다.

중첩된 이미지들과 오염된(순수는 환상이니까) 이야기들이 겹친 시나리오는 언제나 ‘제멋대로’ 해석을 열어둔다. 그 해석의 다양성은 좋은 작품임을 드러내지만, 종종 그 중첩과 오염 속에서 그 비판적 의미의 궤도를 잃기 때문이다.

비판과 반성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지 않는 것이었으면 한다.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렸다.”

(허튼 글이지만, 우리 식구를 위로하려고 영화표를 마련해 준 김인태(@tuesdaymoon)님의 따뜻한 마음에 드린다.)

바티칸의 ‘사도 헌장’에 대한 미국 성공회의 견해

Thursday, November 19th, 2009

천주교 로마 교황청(바티칸)의 “사도 헌장” 전문 발표에 대해, 미국 성공회 교회 일치 및 종교 간 관계 책임자인 크리스토 엡팅 주교가 미국 성공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아래는 그 내용의 전문 번역이다.

바티칸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하여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 (Bishop Christopher Epting)
미국 성공회 교회 일치 및 종교 간 관계 책임자 (Deputy for Ecumenical and Interreligious Relations, The Episcopal Church)

2009년 11월 16일

이미 성공회를 떠난 이들을 천주교로 받아들이는 조치를 담은 바티칸의 “사도 헌장” 전문이 나왔다. 어떤 이들은 이 조치를 “교회 일치를 위한 제스처”라고 해석하려 하지만, 그저 ‘사목적’ 조치로 이해할 만한 것이지, 교회 일치를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최근에야 발터 카스터 추기경이 어느 신문 인터뷰를 통해서 해명하려 했지만, 실제로 이 사안에 대하여 교황청 그리스도교 일치 진흥 위원회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교리와 신앙 성성 쪽의 일방적인 행동인 것을 드러내며, 지난 40년 동안 느리게나마 지속적으로 진척시켰던 교회 일치 대화의 면전에 날라든 것이었다.

이 조처는 분명히 “고향인 로마로 돌아오라”는 선언이다. 성공회에서 서품을 받았다가 성공회를 떠난 사람들은 천주교 안에서 다시 사제로 서품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전제 조건인 부제로도 서품을 받아야 하며, 게다가 견진 성사까지 다시 받아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결코 성공회 신자도,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 성향의 신자도 아니며, 다만 천주교 신자일 뿐이다.

이미 많은 경우를 겪으며 말했듯이, 우리는 나름의 양심에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작정한 모든 성공회 신자를 축복하며 떠나 보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심에 따라 세계 성공회와 온전한 상통 관계를 맺고자 성공회로 오는 모든 천주교 신자를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들은 개인 자격으로 진행되어야 하지, 그 개인들의 집단으로 진행되어서는 안된다. 바티칸은 우리가 성공회 안에 천주교를 떠난 신자들만을 위한 “천주교 특별 교구”를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천주교나 다른 어느 그리스도교단을 떠나 캔터베리 대주교와 상통하며, 세계 성공회로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을 개인 자격으로 받아들여 환영할 것이다.

특별히 미국 성공회는 국내의 교회 일치 대화(미국 내 성공회-천주교 협의회)와 성공회-천주교 국제 협의회에 헌신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이에 관하여 발터 카스퍼 추기경이 지난 11월 15일 ‘옵세바토르 로마노’ 지에서 이러한 대화는 지속되리라 밝힌 점을 환영한다. 최근의 “사도 헌장”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천주교와 그 세 번째인 성공회 사이의 진정한 교회 일치 대화의 목표에서는 하나의 작은 소동일 뿐이다.

번역: 주낙현 신부
일시: 2009년 11월 18일
원문: http://episcopalchurch.typepad.com/episcope/2009/11/bishop-christopher-epting-comments-on-the-vaticans-apostolic-constitution.html
위치: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561

천주교가 성공회를 어찌한다고?

Sunday, November 1st, 2009

(註: [성공회 신문] 요청으로 지난 달(10월 21일) 성공회 탈퇴자 혹은 성공회를 떠나려는 보수파 일군에 대한 교황청의 조치에 대해 쓴 글을 여기에 옮긴다(11월 1일치) 이미 한국 성공회 관구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나(10월 22일), 다듬어서 신문에 다시 낸 것이다.)

천주교가 성공회를 어찌한다고? – 최근 바티칸 교황청의 발표에 대한 간단한 해설

지난 10월 21일(화)에 있는 천주교 교황청의 발표는 세계의 성공회와 천주교 신자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차분히 알아보기도 전에, 우리의 언론은 외신을 그대로 받아 적거나,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기사를 위한 기사를 내기에 바쁜 인상이었다. 몇몇 유력 신문의 제목은 이를 잘 보여준다.

  • “가톨릭, ‘성공회를 품안에'” (한겨레)
  • “결혼한 성공회 사제도 가톨릭으로 개종 가능” (한국일보)
  • “성공회 신자들 돌아오시오” (조선일보)

이러한 기사 내용은 일어난 일의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할 여지가 있는 불분명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실에 따라서 몇가지를 바로 잡는게, 신문 보도에 당황하는 우리의 마음을 가라 앉히고 사태의 추이를 이해를 높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이 일은 영국 성공회가 중심이 되어 있고, 아직 세계 성공회에 전반에 관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 성공회에도 점차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교황청의 이 조치 발표는 영국 성공회(캔터베리 대주교)와는 사전 협의가 거의 없었으며, 그 통보 조차 매우 촉박하게 해서 많은 이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1. 이 조치의 내용은 무엇인가? 천주교가 성공회를 흡수하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교황청 발표가 말하듯이, 실제로는 이미 성공회를 떠난 특정한 무리(이른바 Traditional Anglican Communion)를 우선 대상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들과 비슷하게 성공회를 떠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교황청 말로는 이들이 오랜동안 이런 조처를 요청해 왔으며, 이에 대한 응답이라고 밝혔다.

그 내용은 성공회를 떠난 주교와 사제들을 받아들여, 이들을 천주교 사제로 다시 서품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주교 사제가 된 이들은 성공회 전례 전통을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허용하겠고, 성공회를 떠난 성직자와 신자들을 위해서 특별 관리 교구(Personal Ordinates: 군종 교구와 같이 지역 구조가 아닌 특별 교구 형태)를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교회법적인 조치가 바로 [사도 헌장]이라는 교황 문서이다. 그러나 아직 [사도 헌장]의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천주교가 성공회를 떠난 전직 성공회 성직자를 받아들이는 통상적인 진행 과정은 이렇다.

전직 성공회 출신 성직자는 천주교 안에서 새로 서품을 받아야 한다. 이때 주교든 사제든 모두 사제로 서품받는다. 결혼한 전직 성공회 주교는 주교가 될 수 없다. 결혼한 사제는 다시 서품받고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나, 천주교 주교가 될 수 없고, 재혼할 수 없다. 성공회 출신 독신 사제는 천주교 서품 이후에는 결혼할 수 없다. 결혼하고 싶으면 부제로만 서품받거나, 서품 전에 결혼해야 한다.

어쨌든 이미 성공회를 떠난 사람이 다시 천주교 서품을 받는 것이므로, 천주교가 성공회를 흡수 운운하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성공회를 떠난 사람을 수용한다는 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천주교를 떠나 성공회에 들어온 성직자와 신자들이 더 많다. 그러나 이 일로 성공회가 천주교를 흡수한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

2. 이번 교황청 발표의 배경은 무엇인가?

첫째, 이 일은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내년(2010년) 영국 방문 계획이라는 맥락에서 나왔다. 16세기 천주교와 성공회의 분열 이후, 교황의 첫번째 영국 방문 시점에서, 이미 성공회를 떠나서 그들만의 교회를 만든 사람들, 그리고 성공회 내에서 천주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공격적인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세계 성공회, 특히 영국 성공회 내의 갈등이다. 현재 영국 성공회 안에서는 여성 사제 서품, 여성 주교 성품 문제, 그리고 세계 성공회 안에서는 동성애자 문제와 관련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올해 영국 성공회 관구 의회에서는 여성 주교 성품의 교회법적 장애가 제거되어, 여성 주교가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로 인해 성공회를 떠난 사람들과 떠날 사람들이 있고, 이 기회에 천주교는 여성 성직 절대 반대 입장에 같이하는 성공회 신자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내겠다는 생각이다.

셋째, 세계 성공회 차원에서 여성 사제, 여성 주교, 그리고 동성애 문제로 인해서 세계 성공회 자체를 탈퇴한 국제적인 그룹이 만들어진 것이다. 교황청은 이렇게 갈라져 나온 이들 전체를 대상으로 이런 조치를 내렸다.

3. 새로운 일인가?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가 천주교로 옮겨 간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최근의 예만 보더라도, 이미 1992년 영국 성공회가 여성 사제 서품을 인정하고, 1993년에 실제 서품이 이루어지자, 이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영국 성공회를 떠나 천주교로 갔다. 물론 성직자들은 통상적으로 새로 천주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지난 몇세기에 걸쳐서 있었던 일이다.

또한 성공회나 정교회에서 온 성직자와 교회가 자기 전통의 전례를 사용하는 경우도 이미 존재한다. 성공회 전례를 쓰는 천주교회(Anglican use Roman Catholic)나, 비잔틴 전례를 쓰면서도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여 바티칸의 관할 아래 있는 동방 천주교회 등이 그렇다. 이 부분은 새로울 게 없다.

4. 그런데 왜들 호들갑인가?

이번에는 아예 교황청이 특별법을 제정했다. 게다가 성공회를 떠난 성직자와 신자들로 구성된 특별 교구를 만들어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성직자와 신자가 개인 자격으로 천주교의 기존 지역 교구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조처를 통해 지역 교구 중심 전통의 치리 체계에 예외를 두어 이런 특별 교구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성공회를 떠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요하고 있는 성공회 신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오겠다는 적극적인 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교황청의 공식적인 결정인 만큼 곧 다른 나라에도 파급 효과가 생길 것이다.

이 부분에서 몇가지 논란점이 있다. 우선 이런 조치는 성공회 내부의 분열을 촉진시킬 가능성이 있다. 성공회 안에서 이견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문제를 풀어갈 가능성을 거의 차단해 버릴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한편 양 교회가 지난 수십년간 일치를 위한 대화와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이 있다. 양 교회는 동등한 선교의 협력자로서 서로의 전통을 존중하며 지냈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그간의 노력을 상당히 후퇴시키는 일이라는 우려가 있다. 실제로 이 문서가 교황청의 일치 성성이 아니라, 교리 성성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 후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천주교의 오랜 습관이다. 다른 교단들(성공회, 정교회, 개신교)과 일치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이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교황 문서들이 발행된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특히 전직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

5. 성공회 신자로서 생각해 볼 문제들

이번 조처의 몇몇 관행은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특별 교구까지 제안하는 교황 문서로 나온 이상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공회로서는 몇가지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다. 그 질문들을 소개하면 이렇다.

1) 이런 일들은 성공회, 특히 영국 성공회가 자기 신학과 선교 비전에 따른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 사제 및 여성 주교직과 관련하여, 이를 반대하며 영국 성공회 자체의 분열까지를 들먹이며 성공회 내 일치를 위협했던 이들에 대해서, 일치를 명분으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자기들끼리만의 관구를 만들겠다고도 공언했고, 그 공언이 실제로 천주교의 이번 조처의 빌미가 됐다.

2) 세계 성공회 차원에서는 1944년 이후 여성 사제(홍콩의 리 팀 오이)를 서품해왔고, 이미 세계 성공회 안에는 여성 주교도 있다. 영국 성공회는 1992년에야 여성 사제 서품을 허용했고, 이 때 분란을 일으켜 성공회를 나가 천주교로 갔던 사람들에게 온갖 혜택을 베풀어 보냈다. 그 때문에 신실하게 남아 있던 성공회 성직자들과 신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는 좋지 않은 선례로 남아서 기회만 되면 성공회를 나가려 했던 사람들에게 빌미를 주었다. 결국 이번에는 여성 주교직을 두고 논란이 일자, 천주교가 먼저 이 반대파들을 위한 조처를 취한 것이다.

3) 천주교에도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천주교는 천주교는 독신 남자만 사제로 서품하는데, 이런 조처로 기혼 사제가 계속 유입되는 것이다. 이 때 기존의 천주교 독신 사제들 가운데 결혼하고 싶은 이들에 대한 배려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황청이 받아들이겠다는 첫번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대주교는 전직 천주교 사제였다가 성공회로 와서 다시 성공회를 떠났고, 게다가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 조처가 장기적으로 천주교의 자충수라고 본다.

4) 성공회를 떠나서 천주교로 가는 것은 뉴스가 되지만, 그 반대로 천주교에서 법제화된 독신 사제 조항, 여성 성직 반대, 교황권 등에 대한 이견으로 천주교를 떠나 성공회나 다른 교단으로 들어오는 일들에 대해서 언론은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인 숫자로 보면, 성공회에서 천주교로 가는 성직자보다는, 천주교에서 성공회로 오는 성직자가 더 많다. 특히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와 관련하여 천주교를 떠나는 여성이 많다.

5) 한편 이 과정이 영국 성공회와 세계 성공회 전체에도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여성 성직 문제 등 교회의 변화에 대해서 극구 반대하던 무리들이 성공회를 아예 빠져 나가 천주교로 가게 되기에 성공회 내의 조율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 조처의 파생효과로 영국 성공회뿐만 아니라, 세계 성공회 내부의 전체적인 유대가 깊어지고 그 선교의 방향이 좀도 선명해지리라 전망하기도 한다.

6) 이 일을 사목적인 견지에서 보기도 한다. 굳이 성공회를 떠나기로 고집하는 사람을 잡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지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님께서 이 조처를 두고 불확실하게 떠도는 이들에게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런 맥락이다. 물론 떠나는 사람을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리하여 신앙할 곳을 천주교를 통해서나마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7) 이 일을 계기로 성공회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특별한 선물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여성 성직이든, 동성애 문제이든, 성공회는 성공회의 전통과 신앙 안에서 식별한 은사를 가지고, 다른 의견을 감싸고 인내하고 표용하면서 하느님의 선교라는 전망에서 성공회의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사실 다른 교단 전통에게 바르게 선교적으로 도전하는 것이고 또한 도움을 주는 길이기도 하다.

([성공회 신문] 2009년 11월 1일자, 원문 10월 22일 관구 게시판)

관련글: “교황이 람베스 회의에 어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