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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30주기

Wednesday, March 24th, 2010

한국 시각으로는 어제, 미국 시각으로는 오늘 3월 24일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축일이다. 1980년 오늘 아침 수녀님들과 성찬례를 드리다가 군부의 총에 암살당했으니, 꼭 30년이 되는 해이다. 작년에 적은 상념과 번역하여 옮겨 놓은 시를 살폈는데, 여러 생각이 다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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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순교 직후 사진은 그 죽음의 모든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며 격렬하게 드러낸다. 제대. 그 뒤로 참혹한 고통 속에 있는 예수의 십자고상. 제대 옆으로 쓰러져 있는 로메로 대주교의 몸. 주위에서 울부짖는 이들. 그 장면은 2천 년 전 성찬례 사건, 그리고 십자가 사건과 포개진다.

1.
사진 위로 기도와 상념을 가다듬었다. 그의 삶이 어떻게 기억될까 생각했다. 오늘 세계 곳곳의 교회에서는 지난 세기에 우뚝 선 이 순교자를 교단 전통을 넘어서 함께 기념한다. 당연히 미국 천주교의 여러 교구와 성당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미사를 드린다. 영국에서는 천주교와 성공회의 대주교들이 함께 기념 예배를 갖는다고 한다. 한국의 천주교와 성공회에서는 이날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천주교의 공식 전례력에는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기념이 없다.

천주교 바티칸에서는 그의 시성 제안을 받아들여 1997년 이후 그의 시성을 검토하기 시작했었다. 이듬해,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에게 “하느님의 종” 칭호를 부여했다. 수년 후 사람들은 그의 시성 진행이 늦어지는 것에 항의했고, 바티칸 당국은 얼마지 않아 그를 “복자”로 선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몇 주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했고, 그 뒤로 이 일은 모두 묻혔다. 어떤 이들은,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경고성 훈령을 낸 장본인인 당시 신앙교리성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토 16세) 탓이라 의심하기도 한다.

미국 성공회와 영국 성공회는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당한 3월 24일을 축일로 전례력에 지정하여 기념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죽은 날을 하늘나라의 생일날로 친다. 영국 성공회 런던 웨스트민스터 애비 성당에는 20세기의 순교자 입상이 세워졌다. 우리가 익히 아는 본회퍼, 마틴 루터 킹, 그리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이다.

겹치는 몇 가지 사실들을 ‘트윗’하고 적어 놓았으나, 어젯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다 건너로 여러 일을 물어오는 이들과 잠시 대화하는 통에 시간을 놓쳤고, 이어진 통화 때문에 더욱 늦어졌다. 밤낮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화는 어제와 오늘에 겹친 24일의 의미를 다르게 확장시켰다. 교회는 무엇이고, 성직(주교직과 사제직)은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2.
아침, 책상에 나와 앉으니 세계 성공회 소식(ACNS) 하나가 배달된다. 엘살바도르 성공회 바라호나 주교가 총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운전사가 총에 맞아 병원으로 옮겨졌고, 주교님은 다행히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주교님과 교회는 여전히 갖가지 폭력이 난무하는 엘살바도르 사회에서 예언자적인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30년 전과 후가 겹쳤다.

오스카 로메로의 순교 (1980년 3월 24일), 그리고 엘살바도르 성공회 주교의 총격 피습(2010년 3월 17일)은 주교와 순교자에 대한 생각으로 옮아간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몇 세기 동안, 주교는 대체로 ‘순교자’와 동의어였다. 이때 순교(martyria: 증언)는 선교의 다른 말이었다. 물론 주교는 지역 교회의 총괄 사목자요, 신학 선생이기도 했다. 이것이 위계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 몇 세기 후, 주교는 교리 수호와 교회 일치라는 명목 아래 세속 권력과 손잡고 ‘권력자’가 되었다. 순교자에서 권력자로 자리가 바뀐 것이다. 이러한 위치 변화는 이후 교회 역사에 큰 어둠을 남겼다. 따라서 위계의 목적도 바뀌었다. 그 어둠을 깨는 빛나는 주교들 몇이 있었으나, 어둠은 오래갔다. 한편, 현대의 주교 행태는 이제 CEO를 닮으려 한다. 이 마당에서는 순교(삶의 증언), 사목(보살핌), 선교(하느님 나라), 신학(기도와 성찰), 심지어 교회 일치를 위한 권위(전례와 교리)는 희미해진다. 볼썽사나운 거들먹거림과 범접할 수 없는 안정된 위치, 그리고 결제 권한이 자리 잡았다.

주교직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그에 대한 보살핌)에 ‘종속’된 것이다. 그 종속에 충실하여 공동체를 보살피며 지킬 때, 권위가 나온다는 점에서 주교직은 하나의 역설이다. ‘주님의 종’ 혹은 ‘하느님의 종’은 이 역설을 일컫기 위한 것이다. 이 역설의 신비를 살지 않기에 위계는 타락하여 지배 권력의 관리 체계가 된다. 이런 점들은 주교직의 대리(vicar)로서 사제(presbyter/priest)직에도 적용된다. 그러니 그 주교 아래서 그 사제가 나오는 법이다. 이런 점으로 교회 현실과 나를 돌아보며, 내 가슴을 친다.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3.
다시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의 순교자를 어떻게 응시할 것인가? 십수 년 전 관람했던 영화 [로메로]를 생각하다가, 소개받은 유투브 동영상을 숨죽여 바라본다. 로메로 대주교는 당시 해방신학자 혹은 급진적인 신학자를 무마하려고 교황청이 임명한 내성적이고 보수적인 주교였다. 그러나 동료인 루틸료 그란데 신부의 삶이 주는 도전과 더불어 그의 피살을 경험하고, 그는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무엇보다 그는 권력(자들)이 마련한 어떤 공식적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걸었다. (이 대목에서 최근 어떤 일이 떠오르나, 남 부끄러워 차마 입에 담지 못한다.)

로메로와 그의 민중을 비추는 이 영상은 당대의 지구 반대편 작은 나라와 겹친다. 대주교 피살 후, 한 달 여 만에 그 지구 반대편에서 똑같은 살육이 저질러진 것이다. 그 영상은, 십자가 사건이 그의 피살과 포개지듯, 30년 전의 광주와 그대로 포개진다.

이를 지켜보고 한 세대를 넘게 살아오는 우리는 오늘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로메로 대주교는 간명하게 답했다.

오늘 우리에게는 비판적이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주어진 상황의 내부를 깊이 분석하지 않고 그 상황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허망한 일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는 군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의에 ‘예’라 대답하고, 불의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만이 생명의 값진 선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소비주의 시대의 종교와 신비주의

Monday, March 8th, 2010

제도적 종교는 쇠퇴하지만, 영성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노라는 게 서구 종교 흐름에 대한 많은 이들의 관찰이다. 스스로 제도 종교에 속한 사람(religious)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사람(spiritual)이고 싶다는 이가 많아지고 있단다. 일전의 글에서 이를 두고 나는, 서구 사회, 특히 미국 사회의 개인주의와 엮인 영성주의(spiritualism)의 확대라 했었다. 이 점에서는 메가 처치, 그리고 우파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앙적 보수주의가 대체로 교리적 전통에 닻을 내리고 있고, 교회나 사회의 리버럴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가 차이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모두 영성의 상품화, 그리고 그 소비주의 속에서 살아간다는 비판을 받는다. 현재 영적/종교적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을 한 꺼풀만 들춰보면, 원래 영성과 신비주의가 가졌던 깊고 혁명적인 초월이 상실된 채, 오히려 훨씬 세속적이며 치료 요법의 한 형태로 소비되는 현상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섯(Ross Douthat)이 묘사하는 바, 이러한 영성/신비주의 소비자들은 어느 날은 오순절 계통의 치유 예배에 참석하고, 이튿날에는 불교 강좌를 듣는다. 아침마다 요가를 하고, 주말에는 동방 정교회 피정 센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수피 기도법을 배우는가 하면 성체조배도 하고 밀교의 방중술도 배운다. 영적 관심과 훈련의 홍수라 할 만하다. 그는 이를 두고 ‘종교적 영성의 민주화’라고 표현하면서도, 원래의 종교 전통이 뜻하는 수행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길이라고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본래의 변화와 초월의 문제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다우섯은 미국의 한 진보적 천주교 저널에 실린 신학자 루크 티머시 존슨의 글을 언급한다. 존슨은 이른바 유일신 신앙 전통에 있는 3대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신앙적 동력을 외적 동력(exoteric)과 내적 동력(esoteric)으로 구별한다. 존슨은 이들 종교에 나타난 이 긴장 관계의 사례를 들면서, 그 바른 관계가 그 종교의 건강에 필수적이라 역설한다. 특히 외적 동력인 종교의 제도, 위계, 교리 등이 내적인 신앙적 갈망의 영적 운동들(하시딤, 신비주의, 수피)을 억압해 왔던 점들을 지적한다. 그 자신이 소속한 천주교의 제도적 교권주의와, 이슬람교의 원리주의, 그리고 율법주의로 흘렀던 유대교의 사례들 속에서 신비주의와 같은 초월의 영적 차원에 대한 고민을 전개한 것이다. 다우섯은 존슨의 지적을 존중하면서도, 실은 신비주의마저 미국 사회의 소비주의 안에서 그 대안적인 도전과 변화의 힘을 잃고 있다고 염려한다.

이 염려를 세계로 확장해 보면, 소위 몇몇 내로라는 신학자들의 종교 현상 진단에 아쉬움을 갖게 된다. 미국에서든 그 밖의 세계에서든 제 3천 년에 ‘신앙의 귀환’ ‘종교의 귀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필립 젠킨스와 하비 콕스 등은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그리스도교 신앙 운동의 주도권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하는 현상에서 찾는다. 그리고 오순절 운동(물론 해방신학도 언급하지만)의 급격한 팽창을 그 예로 든다. 그러나 그 오순절 운동 자체가 콕스 자신이 비판하는 ‘번영 복음과 번영 신학'(성공의 사다리 복음)을 여러 모양으로 촉진하고 있으며,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 아래 소비주의의 한 형태로 변모하는 방식과 문제 등에 대한 지적은 찾기 어렵다.

이 처지에 이런 의문들은 단견이요, 편견일까? 제도적 교회와 교권주의에 대한 반대로 신앙과 영적 흐름의 종착은 개인주의에 엮인 영성주의라는 새로운 상품은 아닐까? 외부의 폭발적인 신앙의 힘을 보는 그 눈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과 이전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에 대한 무의식의 향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국과 한국의 오순절 운동과 시작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를 목격하는 처지에,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는 운동은 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특히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지배가 강화되는 터에, 신앙적 열광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한편, 그 수와 힘에 기대어 차근차근 주류의 권력을 구축하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이 과정에서 강화되고 내면화되는 신앙이 자본의 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얼마 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뉴욕 월스트리트에 자리한 성공회 트리니티 교회의 포럼에서, 자본의 시장에 포섭된 이런 소비주의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고객과 공급자의 언어 논리가 우리 사회생활 전역을 스멀스멀 좀 먹고 있으며, 이는 우리 인간의 상호 관계가 물적 자원의 교환으로 교묘하게 측정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에 저항하여, “모든 것이 하나의 지배적인 모델이나 가치에 환원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인간의 행동 양식에는 또 다른 길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붙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기서 종교는 여전히 “자신이 지닌 행동 양식과 충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는 인간의 길”이다. “인간성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그 진리의 답을 드러내는 관점에서 행동해야 한다.”

이 외침은 어느 지점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찰인가? 종교는 어떻게 삶의 어떤 끝(end/목적/종말)을 되뇌고, 그 끝(의 가치)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 가치와 삶의 실천들을 실험하고 펼칠 수 있는 사이와 공간은 어디이며,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를 위한 공동체와 그 네트워크로서 교회의 역할과 또 나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냉철한 열정” –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

Monday, March 1st, 2010

며칠 전 아래에 서구 주류 교회(교단)의 쇠퇴에 대해서 적었다. 서구 주류 교회에 ‘자유주의’라는 딱지, 그것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형성된 신학의 한 흐름을 덧씌워서 비방하는 동시에, 그 쇠퇴의 다른 여러 요인을 슬그머니 감추는 일들이 편만한데, 그 감춰진 실상과 요인을 조금 들춰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속화의 최대 수혜자는 보수 근본주의 종교’들’이다.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교단)는 자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리버럴, 혹은 진보적이라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은 삿된 세속화의 유혹에 넘어가서 ‘정통’ 신앙을 버린 이들일까? 이 주류 교회는 어디서나 그렇게 맥을 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오늘 유에스 투데이와 뉴욕 타임즈에 나란히 등장한 칼럼은 이런 고민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 주장을 아래에 간단히 갈무리해보겠거니와, 며칠 전에 적었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연속글과도 닿는 생각이라 하겠다.

유에스투데이에 실린 올리버 토마스의 글 “(미국의 주류) 개신교는 몰락했는가?”는 미국 주류 교회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었던 공헌과 그 쇠퇴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여전히 그 공헌이 지닌 가치의 중요성을 옹호한다.

과거 미국의 개신교 주류 교회는 건국 초기부터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남달랐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이 이 주류 교단 출신이었다(가장 많은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교단은 성공회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치인들과 소위 ‘사회 지도층’을 통한 교회의 영향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주류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직접 발언하고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의 여파들은 이미 전에 쓴 글에서 적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을 겪은 주류 교회들이 쇠퇴를 경험했을지라도, 이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젊은 세대들과 함께 하는 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류 교회들이 그동안 사회 정의라는 면에서 인종 차별 문제, 여성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그리고 지구적인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적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한 세대를 넘어서야 그 청중을 얻는 셈이다. 게다가 이 주류 교회의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신학은 “하느님의 신비에 비추면 모든 신학은 잠정적”이라는 주장으로 젊은 세대와 함께 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누룩이 되라 부르셨으니, 그에 마땅한 실천에 교회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뉴욕 타임즈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일관된 관심, 특히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이 가난에 대한 세속 ‘리버럴’과 신앙인들의 태도와 참여를 비교한다. 리버럴들이 아무리 좋은 가치를 말하더라도, 현재 미국 사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 문제에 관련하여 돈을 내고 몸으로 뛰는 이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이라기보다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세계적인 원조 단체인 월드 비전(World Vision)을 예로 들어, 여느 세속 원조 단체보다도 인력과 재정, 활동 영역이 크다고 말한다. (참고로 월드 비전은 한국 전쟁과 관련되어 생긴 원조 단체로, 이전에 ‘선명회’로 불렸으나, 명칭으로 겪은 오해 때문에 결국 이름을 바꿨다.) 특히 그는 세계 곳곳의 빈곤 상황에 “교회는 어디에 있었나?” 라고 물으며 반성했던 월드 비전 미국 대표의 입을 빌려, 미국 리버럴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세속 리버럴들의 조소와 비판 대상인 신앙인들, 그리고 종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훨씬 열정적으로 세계의 빈곤과 비참에 응답하여 투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젠 체하는 리버럴은 이런 종교/신앙인에게서 배울 일이다.

흥미롭게도, 토마스와 크리스토프는 각각 구약의 예언자의 입을 빈다. 정의의 예언자 미가(Micah)와 새로운 기운과 생명의 예언자 에제키엘(Ezekiel)이다. 특히 이 예언자들은 사회의 어떤 도덕규범의 준수 여부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이들을 위한 정의를 하느님의 뜻이라 대언( 代言:prophecy)했던 이들이다.

옥이 티라고 할까? 크리스토프의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의도는 알겠지만 좀 더 섬세했으면 했다. 그가 비판하는 ‘리버럴’은 ‘세속 리버럴’을 주로 지칭한다. 그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라는 말은 넓게 ‘종교인/신앙인’을 지칭해도 문제가 없는 말이다. 내가 너무 민감한 지 모르겠으나, 이런 용법 때문에 자칫, 그리스도교 내의 리버럴과 복음주의 보수파의 비교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위에 든 토마스의 글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리버럴’한 주류 교회의 사회 참여와 원조를 통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다. 또 복음주의 보수파가 늘 이런 참여에 활동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원조 활동마저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보이거나 투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도 있다. 게다가 [월드 비전]이 꼭 복음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전달하면서 ‘신앙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쨌든 크리스토프는 “세속 리버럴이 속물근성을 포기하고, 복음주의자들이 거룩한 사람입네 하는 태도를 포기한다면, 인류 사회 공동의 적인 문맹과 인신매매, 출산 사망 등을 줄여나가는데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아니 인간성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의 진보든 보수든 함께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 자신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이 주장은 갈등과 문제의 여러 속내를 너무 쉽게 덮어버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세계가 당면한 현안, 특히 가난 속에서 위기에 놓은 생명의 문제를 좀 더 부각시켜 실제로 도움을 주자는 몸부림으로 들린다.

사실 그리스도교 주류(한국이 아닌)의 리버럴/진보 진영은 이를 “공동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설득하고 실천해왔다. 이에 반대하는 신자들을 잃으면서도 말이다. 그동안 ‘번영 신학’으로 몸집을 불린 교회들이 어떤 위기감에서든 사명감에서든 새롭게 이러한 노력에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례로, 메가 처치의 대명사인 캘리포니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아프리카 HIV/AIDS 해결을 위한 원조 기금을 만들어 활동하겠노라 나선 것도 그렇다. 이미 음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과 그 노력이 이처럼 언론에 미끼를 물리는 대규모 투자에 다시 가려진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라도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다시 서구 주류 교회의 운명을 생각한다. 아니, 비주류에, 소수자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리버럴/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리버럴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세속 사회라는 필터 속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과 그 실체를 이뤄내며 문화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앙적 열정도 걸러져 버렸는지 모른다. 반면, 보수/근본주의 종교/신앙은 표면적으로 세속화를 적대시했지만, 그 핵심인 소비주의/상업주의와 결탁하면서, 사회적 책임 없는 욕망으로 맹목적인 열정만을 키워왔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와 한국 소수자 교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순간, 내게는 두 명의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던진 금언이 떠오른다. 1960년대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대주교는 당시 교회 일치 대화의 맥락에서, “성공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사라지기를 원하는 교회이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라짐을 위한 선교 사명을 다하겠노라”라고 다짐했다. 주류 교회의 쇠퇴는 이런 점에서 인류를 위한 공동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사라지더라도 좋다는 매우 예언자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1980년대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신앙인이 갖춰야 할 태도를 “열정있는 냉철함”(Passionate Coolness)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안팎의 리버럴/진보와 고민하는 보수주의자/복음주의자(근본주의가 아닌)에게 다시 적용한다면 “냉철한 열정”이 아닐까 한다. 그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 전략을 위한 냉철한 연구와 판단, 그리고 이를 위해 투신하는 열정이, 서구 주류 교회의 경험, 우리 사회의 작은 교회의 경험, 그리고 뜻을 찾아 고민하는 모든 신앙인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