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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대주교, 성령 강림, 람베스 회의

Friday, May 16th, 2008

세계성공회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람베스 회의(Lambeth Conference)가 올 여름에 열린다. 이 회의가 이미 벌어지는 교회의 분열을 멈출 수 있을까? 성공회 계약(the Anglican Covenant)은 그 분열의 치유책이 될까? 인간의 성(Human Sexuality)을 둘러싼 논쟁이, 세계의 가난과 질병, 불의와 같은 산적한 주요 선교 과제를 부차적으로 만들고 있는 처지이다. 진정한 교회의 일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일치는 세계를 향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 사명(창조-구원-자유)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수구파들이 벌인 람베스 회의 보이코트는 성공적이지 못한 듯하다. 그게 안되니까 여기저기서 불참을 선언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이들에게 대화를 바라기는 힘들다. 그런 와중에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령강림 축일을 기하여 세계 성공회에 서신을 보냈다. 람베스 회의의 목적을 성령께서 주시는 불과 은총에 마음을 열고, 성령에 대한 식별 속에서 선교 사명을 다하자는 것이다.

거칠게 번역한 서신 전문을 싣는다. 함께 기도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세계 성공회 주교들에게 전하는 캔터베리 대주교 성령강림일 서신

성령강림 축일은 성령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뤄진 놀라운 일들을 우리가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세상 전체에 알릴 수 있도록 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이는 람베스 회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하느님께 그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어, 그 은총을 입고 그분의 이름으로 용감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하기에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미 저는 이번 람베스 회의가 예전과는 다른 모양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서구식의 의회 토론식 모임에 대해서 어려움을 표명한 분들의 목소리에 조심스레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의 준비 모임은 새로운 방식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던 성령 강림 사건을 좀더 반영한 방식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핵심은 “인다바”(indaba) 모임이 될 것입니다. 인다바는 아프리카 줄루 족의 말인데, 서로 평등한 가운데서 토론한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어떤 결정문을 타협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따라야 할 하느님의 길을 구하기 전에, 어떤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서, 진정한 도전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 그 상응한 예를 발견하거니와, 베네딕트 수도자들이나 퀘이커의 모임에서 모두 함께 하느님께 귀울이면서 이루는 것과 비슷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사귐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서로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회의 기간 매일 우리는 사려깊은 조정과 준비를 통하여 모든 목소리들(또한 모든 언어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함께 하는 두 주간 동안 이 모임들을 통하여, 세계 성공회 안에서 서로에게 반목해야만 했던 벽들을 무너뜨리는데 도움이 되는 어떤 신뢰의 수준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집중적인 기도와 작은 성서 연구 모임을 결합하여,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가 할 일에 대한 좀더 선명한 전망과 식별을 가져 올 것입니다.

지난 대림절기 서신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대로, 이를 위해서는 람베스 회의에 참석하는 분들이 윈저 보고서와 성공회 계약 과정이 계획하는 좀더 친밀한 일치를 향하여 기꺼이 온전히 참여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자신만의 어떤 제안이나,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어떤 지역적 우선성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여 본 분들은 알겠지만, 분열적이고 논란이 되는 행동이 있는 상황 속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몇몇 주교들과 공동의 전망과 과정을 함께 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논의했습니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양떼를 보살피는 사목자로서, 우리는 어떤 낮은 단계의 합의를 찾으려거나, 서로 정중하게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동의를 구하자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성령의 불을 구합니다. 그 불은 예수 안에서 유일하게 제공된 하느님의 은총을 신실하게 선포하기 위하여 서로를 위하여, 서로에게 책임있게 행동하고, 그리고 하느님께는 책임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더해 줍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길은 고통스러울는지 모릅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피하는 길을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이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즉 가난과 폭력과 불의로 각인된 세계에 도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로 드러날 것입니다.

람베스 회의의 잠재력은 매우 큽니다. 우리가 관심하는 바는 우리 세계성공회 공동체를 강화시키려는 것이고, 모든 주교들이 선교에 좀더 효과적으로 참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성령만이 영원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길 안에서 우리를 묶어 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성령만이 우리에게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한 말씀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불어 기도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이러한 열매의 가능성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람베스 회의를 준비한 사람들은 함께 일하면서 이러한 성령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한가지, 우리를 위해 계획한 것들을 통해 우리의 사귐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쇄신과 기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회의는 갈망이 가득한 사건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갈망입니다. 람베스 회의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갈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와 그 성령의 힘 안에서 우리 모두가 쇄신하고 부흥하는 것 뿐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모임을 준비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날마다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번역: 주낙현 신부 http://viamedia.or.kr
원문: http://www.aco.org/acns/news.cfm/2008/5/13/ACNS4403
일자: 2008년 5월 13일 (번역: 2008년 5월 16일)

로완 윌리암스, 진 로빈슨, 그리고 사제직

Wednesday, April 30th, 2008

공정함을 잃은 듯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소식을 접하는 일은 몹시 안타깝다. 게다가 그분의 학문적 통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나같은 학생 처지에서나, 그분의 영적 지도력이 매우 중요한 한 교단 전통에 소속된 한 성직자로서도 이런 글을 올리는게 민망하다.

그러나 세계성공회 안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 관련 논란에 대해 그분이 지난 몇년간 보여준 모습들은 “신학적 주장 따로, 정치-사목적 판단 따로”인 것 같다. 그 아쉬움이 이번에는 좀더 실망스럽게 불거졌다.

캔터베리 대주교 사무실(람베스 궁)이 현재 영국을 방문 중인 미국성공회 뉴햄프셔 교구장 진 로빈슨 주교(미국성공회의 공개적인 첫 동성애자 주교)가 영국 안에서 “사제직 기능 수행”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로빈슨 주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진 로빈슨 주교는 곧장 이러한 금지 조치를 대주교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수용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 기능의 실제 내용은 교회 안에서 설교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 판단은 해당 교구와 교구장 주교가 하면 되는 것이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나설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여러 면에서 오버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로빈슨 주교에 대해서는 공정함을 잃은 듯 하다.

교회법적인 논란이 먼저 일고 있는 모양이다. 미사 집전에 관한 문제는 확인되지 않으나, 설교하는 것은 초청한 교회의 허락만 있으면 된다. 초청한 교회가 있고, 소속 교구장이 잠잠한 처지에 대주교가 이럴 권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메일 말미에 세계성공회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금지 조처를 하게 되었노라고 유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주교의 활동은 금지하고 다른 괴상한 일들에 연루된 외국 주교들의 활동은? 해당 기사는 이미 익히 알려진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성공회의 분열을 겁주고 있는 나이지리아 피터 아키놀라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금지 조처를 말하지 않았다.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 내 정부를 도와 동성애자 탄압을 정당화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고, 이는 여러 국제 인권 단체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에서 일어난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집단 보복 학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나 시원한 대답을 못내놓고 있는 처지다.

아프리카 다른 성공회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짐바브웨의 말랑고 대주교는 무가베 정권의 독재와 연루된 한 주교의 행동을 심의하려는 교회 재판소를 이유 없이 해산해 버렸다. 그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자유롭게 설교하고 집전할 수 있었다. 요크 대주교가 통탄할 일이다.

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브라질 성공회에서 탈퇴한 교구들을 자기 관구로 받아들이고, 타 관구에 관구장들의 허락 없이 방문하여 분열을 도모하는 성공회 사상 최고의 극단적 보수파로 이뤄진 서던 콘(남아메리카)의 베나블레스 주교도 윈저 보고서의 경고를 멋대로 무시하고 있으나, 그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제재 조치를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올 3월 함께 만나서 기도했고 생각을 같이했노라고 떠들고 다닌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런 태도와 행보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번 지적된 바 있거니와, 세계성공회 총무 신부는 언젠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 내 보수파들에 휩싸여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다고 불평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행보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신의 신학적 주장 혹은 성찰과도 모순된다. 그동안 나는 그분의 글과 책을 여러 권 읽고, 때로는 번역하여 소개하고, 또 그분을 변호하는 글까지 쓴 적이 있다. 며칠 전에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크리스토퍼 수사님이 윌리암스 대주교가 쓴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성찰(“Space for the Divine”)을 보내와, 이를 읽고 그분의 깊은 통찰에 감복하여 내 자신의 사제직을 되새기고 있던 참이었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 이해나, 개신교의 성직 이해와는 달리 이렇게 적었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느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 이상 도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하느님의 행동과 인간의 현실이, 어떤 대결이나 두려움 없이, 함께 하는 곳이며,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인간의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공간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이 공간에서는 미리부터 어느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제…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이제,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공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공동체요, 실재의 물리적 공간인 교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임으로써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영국 성공회[sic] 안에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 공간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혼란스러운 인간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그 안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들과 감정적인 격동과 영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Rowan Williams, “Space for the Divine: An Essay on Christian Priesthood in Contemporary Culture” in Praying for England: the Heart of the Church edited by Sam Wells ad Sarah Coakley (T. & T. Clark Ltd, forthcoming in June 2008)

이 신학적 성찰은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사제직과 교회론과 선교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매우 깊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전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는 자신의 이 신학적 성찰을 실제로 자신의 사제직 안에서 펼치고 있는가?

갓 댐 어게인? – 라이트 목사와 오바마 의원

Wednesday, April 30th, 2008

라이트 목사(the Rev. Jeremiah Wright)와 오바마가 다시 뉴스에 떠오르며, 그 둘의 관계는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설교 시간에 “갓 댐 어메리카!”를 외치는 목사를 “영적 멘토로 두고 있다”는 오바마를 향한 파상공세가 계속 이어진 탓이다.

문제의 발단은 몇몇 흰 여우들의 짓이었다. 미국 대선에서 미국 정치의 “백인” 정통성이 흔들릴 것이라 우려하는 이 못된 것들이 오바마의 상승세를 꺽어보려고 2003년에 행한 라이트 목사의 설교 한 토막을 갖고 쉬지 않고 TV에 틀어댔고, 오바마는 그와 조금의 거리를 두었다. (관련글)

그러다 며칠 전 라이트 목사는 미국 기자 클럽 회견을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이 라이트 목사 자신이나, 오바마를 향한 것이 아니라, 흑인 교회와 흑인 전통에 대한 공격이라고 맞받아쳤다. 언론이 다시 뉴스로 가공하는 것은 라이트 목사가 미국 정부가 AIDS를 흑인에게 퍼뜨렸다는 음모이론을 설교에서 언급했으며, 20여년 전 반유대주의를 선동했던 미국 이슬람 지도자 파라칸(Louis Farrakhan)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오바마 진영의 반응은 민첩했고 지난 번처럼 얼버무리지 않았다. 언론에서 이런 선정적인 이미지들이 확산되고 적대감들고 일어서는 판에, 자신의 얼굴과 겹쳐지는 라이트 목사를 단호히 잘라내겠다는 눈치다. 이를 발표하는 오바마의 얼굴을 굳어 있었다. 자신은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DNA 자체가 분열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면서, 라이트 목사가 자신을 모르고 있었으며, 자신도 라이트 목사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까지 했다.

이게 오바마를 위기에서 구해줄까? 오히려 그는 라이트 목사가 말한대로 스스로 “정치인”임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되레 그에게 “희망”을 품을 사람들의 기대를 접게 만들 것 같다.

오바마는 덫에 걸렸다. 미국의 안방 뉴스를 점령한 흰둥이 언론들이 짐짓 고상한 매너를 들먹이며 라이트 목사를 공격하지만, 이들의 내면을 움직이는 건 그저 ‘깜둥이'(니그로)들이 나서는 게 꼴보기 싫은 거다. 오바마는 정치 공학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증오를 용인한 것이다.

오바마가 틀렸다. 라이트 목사는 오바마를 알고, 오바마는 라이트 목사를 모른다.

라이트 목사는 종교인으로서 권력을 대하는 자신과, 정치인으로서 권력을 대하는 오바마를 구별할 줄 안다. 그리고 정치인 자체를 폄하하지는 않았다. 또 라이트 목사는 오바마가 당선되면 그에게도 도전을 할 것이라고 비쳤다. 그의 비판과 실천은 일관성이 있다.

언론은 다시 라이트 목사의 기자 클럽 질의응답을 반복적으로 비추고, 오바마의 굳은 얼굴을 포개 놓는다. 그리고 “오바마의 해명이 백인 유권자들을 달랠 수 있을까?” 하는 말로 보도를 마친다. 백인들을 달래는 게 오바마 정치의 목표인가?

최소한 라이트 목사는 현실의 정치 공학에 순진한 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를 너머(beyond)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흑인 교회와 그 해방신학의 전통과 영성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를 포기하고 나가면 오바마가 아니라, 오바마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고질적인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 백인 헤게모니, 그리고 두려움에 근거한 정치(이게 바로 라이트 목사가 미국을 테러리즘의 국가로 지칭하는 이유다)를 이겨내지 못하리라는 판단이다.

라이트 목사는 질문에 대해서 “그 설교 전체를 다 들어봤냐?” “너 그 책 읽어봤냐?” “너 흑인 해방 신학에 대해서 아느냐?”고 오히려 묻는다. 맥락을 애써 무시고 멋대로 골라내서 읽어서 꼬투리잡아 공격하려는 수작이 허튼 소리라고 맞받아친다. 물론 “나, 신학교에서 라틴어도 공부했어”하고 대답하는 닭대가리도 있지만.

라이트 목사의 일관된 신학과 실천, 그리고 백인 헤게모니에 대한 그 비판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려면 빌 모이어스(Bill Moyers)와 행한 최근 인터뷰를 보면 된다. 그 인터뷰는 균형 잡혀 있고,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재발견과 그에 따른 그의 일관적인 신학과 사목 활동을 잘 드러낸다. 미국의 (흑인) 해방신학의 전통에 대한 탁월하게 정리된 강의 한편을 생생하게 듣는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강의 이상의 힘이 있다. 중간에 섞인 그의 설교는 내내 나를 눈물 짓게 했다.

I have a friend who every time you greet him, every time you ask him how you doing, he answers, just trying to make it man, just trying to make it.

인터뷰 내용을 거칠게 듣고 읽히는 대로 요약하면 이렇다.

  • 목사가 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시민 인권 운동을 통해서 그동안 접한 것과는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이 있는 걸 알았다.
  • 성직 소명에 대한 식별을 하다가 공부를 그만두고 입대해서 6년 간 군대 생활을 했다.
  • 시카고 신학교에서 “백인” 교수인 마틴 마티 (Martin Marty, 주: 루터교 목사이자 미국 종교 사회학자)로부터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 마티 교수는 내가 부임한 교회 교인들에 깊이 내재한 어떤 “수치심”을 이겨나가도록 이끌라고 격려했다. 그것은 흑인 역사를 통해 각인된 수치심이었다. 흑인은 아무 것도 아닌 그저 “니그로”라는 수치심.
  • 서구의 우월주의에 입각한 선교의 역사를 비판한다. 그 백인 우월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짓눌려 살았다.
  • 하느님께서 흑인 공동체만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세상 전체를 사랑하신다. 우리 교회는 그런 하느님을 따른다.
  • 흑인 공동체로 모인 우리는 성서의 말씀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려 한다. 억압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며,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 흑인 해방신학은 성서 전체에 걸쳐 나와 있는 주제이다. 그것은 억압받는 자의 시선에서 읽는 성서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이 잘못할 때조차 축복하시는 분은 아니다.
  • ‘갓 댐 어메리카!”를 두고 꼬투리를 잡고 있는데, 이는 설교 전체를 보지 않고, 맥락에서 떼어내어 계속 방영하는 언론의 잘못된 행태이다. 잘못된 정부의 행동과 정책에 대한 비판이라는 면에서,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다.
  • 이 점에서 언론이 나를 포함한 비판적인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그렇게 당했다.
  • 미국인들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받고 교육 받는 것이 문제이다. 역사에 대해서, 성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해석학이라는 어떤 사물을 보는 창이 있다. 사람을 프레임을 갖고 세상을 보고 성서를 읽는 것이다. 흑인 해방 신학은 노예선 갑판이 아니라, 갑판 아래 있는 흑인 노예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 하느님은 승리자를 위한 분이 아니다. 그렇게 읽으면 하느님은 노예제와 살인과 폭력과 보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실제로 성서는 다분히 그렇게 읽힐 만한 내용이 많다. 시편 137편만 보아도 ‘갓난 아기를 죽이라’는 보복이 담겨 있다.
  • 2001년 9/11 직후 설교를 두고 미국 정부를 테러리즘의 나라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보복의 원리에 입각한 정치는 무엇이든 테러리즘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테러리즘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을 폭격하여 선량한 시민을 죽이는 테러리즘을 실천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에 대해 지적한 것이다.
  • 전체 설교 가운데 몇 마디를 뽑아내 공격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 아니다. 이건 어떤 두려움과 공포를 만들어 내려는 행동이다.
  • 언론에서 설교가 문제시되면서 그를 비롯한 우리 교회가 협박을 받았다. 폭탄으로 날려버리겠다는…
  • 흑인 전통은 음악과 함께 한다. 블루스는 상처를 희망으로 바꾸어주는 흑인의 영적 전통이다. 고통과 가난은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성스러운 블루스에 담아낸다.
  • 사람은 악을 선택해도, 하느님은 선을 선택한다. 구약성서 요셉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깨진 관계를 회복시켰다.
  • 바락 오바마는 정치가이고, 나는 목사이다. 우리의 청중은 전혀 다르다. 그가 나에 대해서 반응한 것은 언론이 꼬투리 잡은 꼭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여전히 오바마를 ‘모슬림’으로 이해한다. 언론때문이다. 언론은 바락 “후세인” 오바마로 부르고, 종종 “오사마”라고도 불러 사람들을 현혹한다.

흑인 해방 신학에 관한 추천 도서 2권

  • 제임스 H. 콘 [억눌린 자의 하느님] (이화여대 출판부)
  • 제임스 H. 콘 [흑인 영가와 블루스] (한국신학연구소)

Update: NYTimes 최근 논란과 관련한 흑인 해방신학 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