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성서' Category

신앙 – 하느님 나라의 이어달리기

Sunday, January 2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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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하느님 나라의 이어달리기 (마태 4:12-23)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에 가셨으며, 어둠 속에 앉은 백성들과 죽음의 그늘진 땅에 빛을 비추었습니다. 역사 안으로 파고드는 하늘나라의 빛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과 행동을 돌이키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새로운 길을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고정관념과 기득권을 버리는 결단이 뒤따라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쓰러진 이들과 아픈 이들, 연약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이처럼 요약하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와 그 뒤를 잇는 우리 신앙인의 삶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히시자’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요한과 자신의 삶을 연결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그 뒤를 이은 제자들의 운명과 우리 신앙인을 연결하는 고리는 ‘잡히다’는 낱말입니다. 성서 원어를 좀 더 정확히 드러내면, ‘잡히다’는 말은 ‘넘겨지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헤로데라는 정치권력에 ‘넘겨져서’ 결국 목숨을 잃습니다. 뒤따른 예수님도 종교와 정치의 합작 권력에 ‘넘겨져서’ 결국 죽음을 당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따랐던 제자들도 박해자의 손에 ‘넘겨져서’ 순교합니다. 이 신앙의 연결고리 안에서 우리 신앙인의 운명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성찬기도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잡히시다-넘겨지다’는 단어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빵과 잔을 들고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몸과 피이다’에서 ‘주다’는 말이 같은 단어입니다. 성찬례 때마다 우리 신앙인은 요한과 예수, 그리고 제자들의 삶을 넘겨받습니다. 그 삶은 때로 억울한 모함이고 고통스러운 박해이고, 죽음과 순교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안에 하느님의 선물이 있습니다. 고정관념과 기득권의 고집이 아닌 포기와 양보 안에서 새 역사가 열립니다. 우리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때마다 ‘넘겨받는’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 안에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시는 은총이 뒤따릅니다.

신앙인은 역사 안에 파고들어 펼쳐진 하느님 나라의 일꾼입니다. 요한과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이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쳐주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을 목격합니다. 신앙은 잘못된 정보와 편견을 벗어나 늘 새롭게 배우며 고쳐나가는 삶입니다. 거짓과 어둠에 맞서 진실을 선포하고 밝히려는 끈질긴 노력입니다. 마침내 온갖 권력 앞에서 무시당하고 빼앗기고 상처받은 이들을 싸매 고치고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이 일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 훈련하고, 세상 속에서 실천합니다. 이 일이 누그러지면, 교회는 하느님의 유산이 없는 여느 친목 단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요한과 예수님, 그리과 제자들을 이어 우리는 역사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 나라의 바통을 이어받아 달립니다. 거들먹거리는 온갖 권력에 저항하며 실패하고 상처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어주고 넘겨주는’ 역사와 신앙의 이어달리기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조금씩 펼쳐갑니다. 이렇게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 – 예수의 정체, 신앙인의 선교

Sunday, January 1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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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어린 양 – 예수의 정체, 신앙인의 선교 (요한 1: 29-42)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라.”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정체를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행동의 핵심입니다. 신앙인은 역사 속의 억압과 질곡으로 생긴 죄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에 자신을 내어 바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예수님의 삶에 자기 삶을 포개며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두려운 심판의 위협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와 평화의 몸짓으로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과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언행이 돋보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태중부터 알아보았던 사촌’이었지만, 자신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은 혈연과 지연 같은 인맥으로 엮을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실하고 투명한 삶에서 받은 도전을 인정하고 새로 배우는 일에서만 바른 신앙이 솟아나고 진일보합니다. 더욱이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새로운 스승을 소개합니다. 새 스승을 따라 새 길을 걷겠다는 제자들을 기쁘게 떠나보냅니다. 과연 신앙의 역사에 우뚝 선 큰 인물입니다. 옛 세대가 새 세대를 격려하며 밀어주는 넉넉한 행동에서 새 역사가 펼쳐집니다.

요한이 바라본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함께 머무시는 하느님’의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한번 받는 물의 세례로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요청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직접 받은 세례는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에게 들리는 하느님의 새로운 위로와 격려, 희망을 선언합니다. 신앙인의 삶에서도 여전히 아픔과 기쁨, 슬픔과 즐거움, 실패와 성공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밝은 대로를 걷든, 그늘진 험로를 헤매든,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내려오셔서 머무시고, 베푸시며,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이 대답한 대로,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겠다는 다짐이 신앙인의 제자도입니다. 이렇게 다짐하고 따르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 약속을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합니다. 어느 처지에서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당신의 영광을 빛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지극히 귀하게 보시고, 나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이사 49:5).

이제 하느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라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예수님의 삶과 우리의 삶에 겹쳐져 새롭게 펼쳐집니다.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이것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모시는 우리 신앙인의 정체요, 선교 사명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이 신앙의 삶, 신앙의 선교 행진에 함께하시니, 이 길에 초대받은 우리는 정녕 복됩니다.

예수 – 임마누엘 – 그리스도

Sunday, January 1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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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임마누엘 – 그리스도 (루가 2:15-21)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

거리에서 “예수를 믿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거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 아래 고함치는 이들을 종종 만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마저도 당황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 ‘전도’ 열정을 마음으로 칭찬할는지 몰라도, 실제로는 ‘예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여러 종교의 포교 행태가 자칫 광신으로 그 가르침의 핵심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게다가 종교가 사회 안에서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세우기보다는 세상의 욕심을 부추기면, 그 종교 자체와 그 종교인마저 애꿎은 비난을 받습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의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민망할 지경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때, 신앙인은 우리가 믿는 분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분에게서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해 첫날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을 지키는 우리의 다짐입니다. 그 다짐은 ‘예수-임마누엘-그리스도’의 이름 뜻을 되새기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 사건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사람이 권력자들의 지배를 받거나 착취를 당하는 일에 종말을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놀라운 행동이 아기 예수 안에서 펼쳐집니다.

새날을 여는 분은 이제 정치 지도자 ‘여호수아’가 아니라, ‘아기 예수’입니다. 우악스러운 외침과 강요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려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입니다. 춥고 배고픈 빈곤의 현실에 오시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 안에 머무십니다. 다르고 낯설다고 배척당하여 서성이는 이들 옆에서 걸으십니다. 진실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외치며, 사랑을 회복하려는 수고와 땀을 함께 흘리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왕입니다. 연약한 이들과 동행하시며 부서진 세계에서 생명을 구원하시는 분이 진정한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동행을 걷지 않고 자신의 지위와 권력, 명예와 이름을 높이는 이들은 지배자들이거나 위선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신앙인은 우리 자신이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창조 세계의 평등한 주역으로 떳떳하게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시편 기자와 함께 새날 새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십니까?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