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영성' Category

배척의 율법 vs. 환대의 은총

Sunday, July 2nd, 2017

a_cup_of_water.png

배척의 율법 vs. 환대의 은총 (마태 10:40-42)

우리 삶에는 온갖 배척과 환대가 뒤엉켜 있습니다. 조직을 지키려면 바깥에서 온 낯선 이들보다는 안쪽에 있는 인맥에 기대는 편이 더 지혜롭다고들 합니다. 반면, 고인 물이 쉽게 썩는 일을 염려하여, 새로운 물갈이 말고는 공동체의 쇄신과 성장이 어렵다는 주장도 꽤 설득력을 얻습니다. 일상에서는 서로 가까운 사람들도 어떤 이익 분기점이나 감정의 경계 막바지에서는 등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사람이 만든 배척과 환대의 기준은 정갈하지 않고 변덕스럽기만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신앙인에게 주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감추고 덮으려는 거짓 세상을 향하여 진실을 외치고, 힘의 대결로 약속하는 거짓 평화에 저항하여 하느님의 평화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쳐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깃든 우리 교회의 선교 사명이자 기준입니다. 녹록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에 물든 종교가 약속하는 성공과 안위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대와는 달리 모진 고생과 박해, 상처와 손해가 뒤따르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실과 평화의 행동 안에서 제자와 예수님, 그리고 하느님이 서로 안에 머물며 일치하는 신비가 펼쳐집니다(40절). 이 신비는 예언자들과 옳은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며 확장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은 이 신비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식별하여 경계합니다(로마 6:12-23). 그것은 ‘신앙 기득권’과 ‘제멋대로 신앙’입니다. 율법은 애초에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을 조절하고 제어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규칙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종교권력자가 자신은 쏙 빼고 다른 사람들만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이때 율법은 선물이 아니라 지배와 배척의 도구입니다.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규칙과 제어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자칫 공동체를 또 다른 위험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사도 성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배와 예속, 자유와 정의에 관한 생각을 사뭇 다르게 풀어갑니다. 그 분명한 대조와 역설적인 표현은 새로운 시선을 선사합니다. 사람은 율법이든 은총이든 지배 아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지배받고 사로잡히겠느냐는 선택입니다. ‘죄’는 남을 배척하며 힘을 휘두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다른 사람을 환대하여 섬기는 일입니다. ‘죄’는 제멋대로 개인적인 자기감정과 주장에 골몰하게 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하느님의 가치를 공동체 안에서 성찰하여 대화와 배움의 고된 행동에 예속하도록 이끕니다. 제멋대로 세운 배척의 기준과 자유의 환상은 교회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밖이든 안이든 새롭게 다가오는 낯선 도전의 은총을 환대하고 견디는 일은 교회와 세상을 풍요롭게 합니다.

자신의 보호막으로 사용하려는 율법과, 고된 도전으로 낯설게 배우려는 은총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나요? 자리를 지키려고 웅크린 배척의 감정과, 초대하며 부딪쳐 나누려는 환대의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나요? 예언자들과 옳은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은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누구인가요?

[전례력 연재] 오해와 오역 사이 –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

Saturday, June 10th, 2017

Screen Shot 2017-06-10 at 11.24.48 AM.png

오해와 오역 사이 –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 (삼위일체주일 후 목요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교리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담긴 하느님의 구원 활동이다. 간단히 말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한편, 교리는 복음을 역사와 문화, 언어와 사고방식에 따라 풀어보려는 신앙의 노력이다. 교리가 없으면 진리를 제멋대로 오해하기 쉽다. 진리를 종교 체험과 혼동하고 대화와 배움이 불가능한 처지에 빠진다. 반대로, 교리에만 집착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억누르고 만다. 자유를 선사하려는 은총의 복음은 간데없고, 사람의 생각을 조작하고 판단하는 도구이기 십상이다.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도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교리 사이에서 오해를 많이 받았다.

성체 축일은 13세기에 만들어졌다. 리에지(유럽 벨기에)의 율리아나 성인(12세기)의 체험이 바탕이었다. 수녀였던 성인의 희망은 단순했다. ‘성목요일 만찬으로 세워진 성체성사’를 성주간을 벗어나서 기쁘게 축하하고 싶었다. 성주간에 흐르는 무거운 주제와 빠른 전개 때문에 ‘성체’를 향한 깊고 신앙을 나눌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환시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 제정을 탄원하라는 가르침을 들었다. 20년 후 그의 바람이 이뤄졌고 중세 서방교회에 빠르게 퍼졌다. 날짜는 ‘위대한 50일’의 부활절에서 열흘 뒤였다. 지금으로는 삼위일체 주일 후 목요일이다.

성체 축일의 핵심은 성찬례 자체이다. 성찬례의 뜻과 신학을 우리 삶에 되새기는 특별한 기회이다. 그러나 중세 서방교회의 교리는 다른 길로 빠졌다. 성찬례로 함께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라지고, 신비하게 변했다는 ‘성체’에만 관심을 두었다. 성찬례 전체가 아니라 ‘영성체’ 만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신심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된 성찬례보다는, 직접 보고 먹는 ‘성체’의 효험이 더 크다고 생각했을 테다. 이 축일 미사가 끝나면, 성체를 담은 ‘성광’을 들고 마을을 도는 성체 순행이 생겨났다. 이 성광으로 ‘성체 강복’을 했다. 교회를 만드는 성찬례의 진리는 신자 개인의 영성체 교리와 신심에 자리를 내주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때, 성체 축일과 성체 순행은 큰 공격을 받았다. 마르틴 루터는 “중세의 역겨운 관습이며, 수치스러운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성공회는 1548년에 성체 축일과 관습을 폐지했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소수파가 다시 되살렸다. 한국 성공회도 그 전통 아래 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찍부터 이 상황을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그리스도의 성체’에 관한 성가(탄툼 에르고)에는 성체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실제로 목격하고 찬양하는 마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한국 성공회 1970년 성가 184장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민과 신앙을 잘 번역하여 전달하고 있다.

비길 데 없는 성사를 경배하옵나이다. /
구약제사 다 지나고 신약성사 가운데 /
눈으로 못보는 예수 계신 줄 아나이다.

전능하신 주 성부께 존귀를 돌리오며 /
성부로 좇아 나오신 성자께 찬송 돌려 /
일체되신 성신에게 같이 찬미할지라. 아멘.

애석하게도, 이후 1990년과 2015년 성가(208장)는 오해와 오역으로 성체와 성체 축일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깊은 고민과 신앙이 가려지고 말았다. 개정판에서 다시 그 뜻이 드러나길 바란다.

Corpus_Christi.jpg

  1. [성공회 신문] 2017년 6월 10일치 7면 []

[전례력 연재] 나마스테 ! –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

Saturday, May 27th, 2017

Visitation_14th_C.png

나마스테! –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 (5월 31일)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서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루가 1:39-40).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는 비슷한 경험으로 아기를 가진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했다는 이야기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여서 일찍부터 기념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을 축일로 정한 일은 13세기에 들어서다. 중세 때 성모 마리아 신심이 널리 퍼지면서 성모에 관한 여러 사건을 축일로 정했다. 그 탓에 이 축일은 오직 서방교회에만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몇몇 정교회가 이 축일을 도입했다. 원래 날짜는 7월 2일이었다.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6월 24일)의 팔일부가 끝나는 시점으로 정한 것이다. 이 관습은 196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1965년 판 한국 성공회 기도서도 이 날짜에 ‘성모 왕문 성 엘리사벳’ 축일을 지켰다.

지금처럼 5월 31일로 고친 것은 1969년부터다. 성서 이야기와 시간의 흐름에 한결 걸맞기 때문이다. 임신한 마리아는 만삭의 엘리사벳을 찾아갔고(5월 31일) 석 달 정도 머물렀다. 그동안 세례자 요한의 탄생(6월 24일)을 보았겠고 산후조리도 도왔을 테다. 그렇다면 이 축일의 주제도 달라진다. 현재 본기도는 중세 전통을 따라 마리아가 받은 축복과 순종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은 아기를 가진 두 여인의 만남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자기 몸과 삶에 나타난 당황스러운 일을 함께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도우며 보살핀다. 이때 더 깊고 큰 만남이 펼쳐진다.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루가 1:44).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두렵고 당황스러운 일, 그러나 신비하고 거룩한 일을 받아들여 자기 몸속에 품었다. 그 몸 안에 있는 거룩한 생명이 오히려 두 사람의 만남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축복의 인사는 태중에 있는 거룩한 아기들이 서로 알아보고 기뻐하는 만남이다.

‘나마스테’ – 인도와 네팔에서 사람이 서로 만날 때 합장하며 고개 숙여 나누는 인사말이다.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이 그대 안에 있는 하느님께 문안합니다’라는 뜻이다. 마리아와 엘리사벳가 나눈 인사는 분명 ‘나마스테’의 인사이다. 태중의 예수와 세례자 요한이 서로 알아보고 인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품은 마리아와 하느님의 약속을 품은 엘리사벳의 정중한 만남과 예의는 우리 신앙인의 사표다. 그들을 따라 우리 몸 안에 모셔 우리 안에 사시는 하느님께 인사한다. 성찬례의 영성체로 ‘그리스도’를 성체로 보혈로 우리 몸에 모시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을 모시고 품은 사람이다. 서로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존경과 예의 없이 하대하거나 반말할 수 없다. 서로 예의를 차려 존중하고 격려하고 보살펴야 한다.

이처럼 정중하고 거룩한 만남의 기쁨에서 마리아의 찬가가 울려난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을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우리 안의 교만함과 권세를 내치시는 하느님을 목격하며, 비천한 이들을 높이시는 하느님을 찬양한다. 나마스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