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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Sunday, January 25th, 2015

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마르 1:14~20)1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부르심’입니다. 인간 밖이든 인간의 내면이든 인간이 나서서 ‘신’을 찾는 것이 여러 종교의 특징이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하느님께서 나서서 인간을 찾습니다. 이를 ‘부르심’ 또는 ‘소명’이라 합니다. 이 부르심의 특징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방향이 다릅니다. 성서의 많은 내용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면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신 뜻과 목적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복음과 하느님 나라입니다.

여느 다른 종교와 그 방향의 달라서 성서의 이야기와 등장인물도 사뭇 낯섭니다. 낯설어서 새롭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불러 낯선 땅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하고 도망치다 큰 물고기에 삼켜 그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겨우 밖으로 나옵니다. 그제야 요나가 가고 싶지 않던 곳에 가서 회개를 외치니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마음과 행실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낯설고 확신할 수 없는 곳에 자기 몸을 던졌을 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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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에도 낯선 방향 전환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선포가 낯설고 새롭습니다. 요한은 하늘나라가 ‘오고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십니다. 미래나 외계에 있으리라 생각한 하늘나라가 우리 현실 안에 이미 다가왔다고 합니다. 경전의 글귀나 설법에 있다고 생각한 복음이 실은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의 행동에 이미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와 복음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 역시 낯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여느 종교가 약속하는 미래 보장이 없고 자세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곧바로 따릅니다. 우리는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목격하는 예수님의 미래는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 제자들이 겪었던 삶도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이 자신의 미래를 가늠하고 확신하며 따랐으리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동료와 함께 자신을 던졌을 때라야, 우리는 오히려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경험합니다.

보장성 보험의 종교가 아니라, 낯설고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에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과 동행하며 함께 걷는 일이 성서의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며 건네는 부르심과 동행의 초대에 우리는 지금 다시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1. 주교좌성당 주보 2015년 1월 25일치 []

오그라진 손 vs. 오그라진 마음

Wednesday, January 21st, 2015

히브 7:1~3, 15~17 / 시편 110:1~4 / 마르 3:1~6

2015년 1월 2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그라진 손과 오그라진 마음” – 오늘 복음서 이야기를 읽으며 내내 떠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어쩌면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이미지여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활동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본디 온전하던 것이 왜곡되고 뒤틀려서 제대로 구실 하지 못하는 것들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과 사람을 만드셔서 숨을 불어넣으시고 축복하시며 “참 좋다”고 연발하셨던 그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부서진 관계, 창조세계와 인간이 서로 해를 입히고 파괴하는 관계, 사람과 사람이 서로 반목하고 억누르는 관계는 모두 뒤틀려서 ‘오그라진’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관계를 바로잡는 일을 ‘치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는 악령을 몰아내는 것이든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든 모두 뒤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이러한 치유는 몸이 아파서 고통받는 개인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왜곡과 고통은 우리가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 이웃과 누리는 관계가 뒤틀려서 생깁니다. 예수님에게 치유는 개인을 넘어서 늘 한 사회와 세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기적을 행하실 때 대체로 어떤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않고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때로 죄를 용서하시며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오더라도 그 죄의 내력에 관해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치유 이야기는 예수님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람들과 겪는 이상한 갈등으로 번지기 일쑤입니다. 오늘 복음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그라진 손’으로 고통받던 한 개인을 고쳐주시면서, ‘오그라진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과 사회가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 보여주십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처럼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지만, 생명이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기다려서 안식일 다음날 했어도 됩니다. 눈에 불을 켜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행동은 일부러 하신 것입니다. 일부러 사단을 만들고 갈등을 빚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중에 나도는 자기계발이나 처세술 따위에 마음을 주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면 당연히 가져야 할 자비와 사랑을 바른말과 옳은 행동으로 밀고 나가신 분입니다. 이것이 뒤틀린 사회를 바꾸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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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으로 ‘곧게 펴진 손’은 이제, 멀쩡한 겉모습 안에 담긴 ‘오그라진 마음’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복음에 나오는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잃은 나라를 다시 세우며, 세속화하던 유대교를 개혁했던 신앙운동가들이었습니다. 개인의 신앙 체험뿐만 아니라, 성서에 관한 지식도 깊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명예와 지위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지위와 권력으로 더 나은 종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위와 권력의 맛에 심취했습니다. 사람을 섬기며 보살피라고 준 지위와 권력의 본뜻을 잊고 사람을 억누르고 부리는 힘으로 오용했습니다. 이런 모습에 예수님은 탄식과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경건한 신앙 운동이 부패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신앙 운동은 이제 거드름 피우는 율법이 되어 사람들을 옥죄고, 다른 편에서는 여전히 힘없는 많은 사람이 비틀리고 오그라진 채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종교와 사회를 바로 잡아 공동선으로 이끌라고 준 권한을 내팽개치고 직무유기하는 무책임한 집단의 방해마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직무유기가 “악한 일”이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종교와 사회, 정치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과 분노가 선연합니다.

이 탄식과 분노에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대응책이 놀랍습니다. 자신과 늘 갈등하며 싸우고 지냈던 헤로데 당원들과 합작하기로 합니다. ‘예수’를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자신들의 원래 이념마저 포기하고 종교와 정치가 합작하여 ‘죽이는’ 일에 작당한 것입니다. 악한 행동입니다. 지위와 권력을 지켜내기에 급급하여 만들어 낸 ‘오그라진 마음’입니다.

오늘 읽은 서신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멜기세덱 이야기는 우리 신앙인이 종교와 정치와 관련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되새기게 합니다. 창세기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진 멜기세덱이 왜 신약의 서신서에도 등장하는 것일까요? 멜기세덱은 사제이자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정의로운 왕’이라는 뜻입니다. 종교와 사회, 정치의 지도자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살렘의 왕이었습니다. ‘살렘’은 ‘샬롬’에서 나왔습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정의로운 권력만이 평화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멜기세덱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그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바른 신앙의 싸움을 견디고 이겨낸 사람들을 떡과 포도주로 먹이고 힘을 돋우며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대사제 멜기세덱이라 부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신앙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우리가 마시는 떡과 포도주는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용기와 힘을 내라는 선물입니다. 신앙의 결단과 행동입니다.

오늘 복음과 서신을 읽으며 우리는 304년 로마에서 순교한 아그네스 성인을 기억합니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던 아그네스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의 부와 권력에 관한 관심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자신이 너무도 아름다워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청혼했으나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이미 예수님과 결혼했으니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힘을 가진 사람들은 아그네스에게 치욕을 주려고 옷을 벗겨 거리에 끌고 다녔지만, 신비하게도 그의 머리가 자라나 온몸을 덮었고 금세 탈출했다고 합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아그네스를 겁탈하려 했지만, 신비하게도 그에게 가까이 오자 눈이 멀어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그네스를 칼로 목을 쳐서 죽였지만, 그의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옷을 적시며 순교의 신앙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그의 나이 열세 살이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아그네스를 예수님을 상징하는 ‘양’(羊)과 함께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양을 뜻하는 라틴어 ‘아뉴스’(angus)로 잘못 이해하거나 말장난을 하여 의미를 넣은 것이었습니다. 원래 아그네스는 라틴어가 아니라, 희랍어 ‘아그네’(agne)에서 나왔습니다. ‘순결하고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아그네스 성인의 삶에서 보듯이 이 순결함과 거룩함은 부와 권력의 포기를, 그리고 신앙의 용기를 뜻합니다.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그는 연약한 소녀들, 미혼 비혼 여성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특별히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작은 무리로 이 아침에 모여있는 우리는 이제 ‘오그라진 손’을 바르게 펴서 어떤 손길을 세상에 내밀어야 할까요? 세상의 온갖 ‘오그라진 마음과 행동’으로 피해를 당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어떻게 보살피고 치유하여 그들과 함께 서야 할까요? 정의와 평화의 사제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향해 어떤 사람으로 서야 할까요?

와서 보라! – 초대하여 함께 벽을 넘는 신앙

Sunday, January 18th, 2015

1사무 3:1~20 / 시편 139:1~6,13~18 / 1고린 6:12~20 / 요한 1:43~51

2015년 1월 1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9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나와 있습니다. 어떤 연유와 내력이 있든, 신앙은 항상 누군가 마련한 초대에 응답하여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발걸음을 떼어 어느 자리에 모이는 일로 시작합니다.

초대받아 모인 공간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한 자리에서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구약과 신약성서를 통해서 선포되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마다 지닌 기도의 제목을 이 거룩한 곳에 가져와서 마음 깊이 하느님께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고 ‘나’ 자신의 기도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와 자매, 교회와 세계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해서 주신 이 성찬의 상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먹고 마시라는 초대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찬양과 기도를 올려드리고, 말씀을 먹고 성찬을 나누는 곳에 초대받아 참여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이 초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초대에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초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질문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에서, 어린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색깔이 독특합니다. 나름대로 지각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젊은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무엘은 함께 사는 제사장 엘리에게 찾아가서 자신을 불렀느냐고 묻습니다. 엘리는 늙고 귀가 어두웠습니다. 엘리는 부른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거듭해서 자신을 부르는 이상한 음성을 들은 사무엘이 다시 엘리를 찾아가지만,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늦게서야 엘리는 자신의 오랜 신앙 경험과 경륜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의 음성에 대답하라고 사무엘에게 일러줍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도 알려줍니다. “하느님, 말씀하세요. 제가 듣고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하여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늙은 엘리의 시대가 가고, 젊고 활기찬 사무엘의 시대가 왔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나이 든 제사장 엘리의 효용 가치가 떨어져서, 더 쓸모 있는 젊고 새로운 사무엘을 하느님께서 선택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근거 구절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몹시 부족한 해석이어서 오해를 낳기 쉽습니다.

급한 해석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의 장면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 뜻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시선을 바꿔서 돌아보면, 젊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신앙의 초대를 알아차리도록 돕고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하도록 돕는 사람은 바로 제사장 엘리였습니다. ‘엘리’라는 이름의 뜻은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상한 지혜와 경륜으로 젊은이의 식별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을 자식 농사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제사장직을 자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가여운 처지라고 말이지요. 정말 그런 뜻일까요? 오히려 엘리는 자식이나 가족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에 세심하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을 물려주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실제로 사무엘이 하느님께서 엘리에 관하여 전하신 소상한 말씀을 자신에게 숨김없이 전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에 그는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설 수 있는 신앙이 곧 고상한 신앙입니다.

어쨌든, 사정을 모두 알아차린 엘리는 사무엘에게 조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께 응답하라고 합니다. 그 응답할 내용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줍니다. 매우 겸손하고도 성실한 어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고상하고 성실하며 연륜 깊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제 사무엘을 눈여겨봅니다. 사무엘은 ‘듣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어른이었던 엘리의 식별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어른의 식별 도움을 얻고서야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신앙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준비입니다. 저 같은 설교자와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듣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듣고 공부하고 새긴 만큼만 밖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인간관계와 사회 안에서 이상한 고집과 주장으로 서로 오해하고 싸우는 일은 꽤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진리는 나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진리는 내 경험에서도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밖에서, 밖에 계신 하느님에게서, 밖에 있는 지혜와 통찰과 경륜을 통해서 내게로 들어옵니다. 그러니 서로 귀 기울이지 않고는, 서로 배우지 않고는,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할 훈련을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과 나 자신의 주장을 혼동하고 맙니다.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느님은 우리 신앙인이 서로 깊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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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이 신앙의 초대에 응답한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먼저 제자가 된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갑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전하고 기다렸던 ‘어떤 분’을 따르기로 했다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의 초대에 친구도 초대합니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가 돋보입니다.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오겠냐?’며 자신의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을 드러냅니다. 우리 사회와 빗대어도 여러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태도입니다. 학력과 지역 차별, 재산과 지위에 따른 차별의식이 여러 곳에 널려있는 사회입니다. 이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고정관념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를 꾸짖기는커녕, ‘나타나엘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며 그를 있는 그대로, 그의 깊이를 헤아려 주십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사람을 안다’는 것, ‘사태의 본질을 안다’는 것에 관한 신앙인의 태도를 되새기게 합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지식과 경륜에서 얻은 확고한 신념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종종 ‘내 신앙 체험과 신앙이 옳다’고 확신하고는 합니다. 밖을 향해서 어떤 판단을 쉽게 내리곤 합니다. 예수님과 나눈 대화 중에서 나타나엘은 깨닫습니다. 오히려 밖에서 오는 친밀하고 따뜻한 발견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 내면의 참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오랜 지식과 체험은 종종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으로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 고정관념은 자기 내면의 눈을 가려서 사람 판단, 사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신앙은 자기 안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밖에서 오는 새로운 발견을 받아들이고 안팎으로 새로운 탐험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구약성서의 핵심인 ‘율법’의 원래 뜻도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걷는 일’입니다. 적어도, 성서의 신앙은 전능하고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를 우러러보는 일이기에 앞서, 예수님의 삶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걷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과 맺은 관계의 모본에서 배우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당신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길은 알 수 없는 탐험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탐험의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 바로 신앙입니다.

필립보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따르라는 초대로 “와서 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도드라진 표현이 사람의 움직임과 참여를 드러내는 동사인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몸소 걸어서 참여하고 관찰해야만 새로운 경험이 일어납니다. 또한, 새로운 사람을 ‘와서 보라’고 초대하고 환대하는 일로만 새로운 사람과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장면을 보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채롭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사람을 가르는 차별과 사회를 가르는 분열의 담이 허물어집니다. 대신, 초대와 환대, 그리고 친교가 어떤 학력과 출신과 지위와 성별을 막론하고 자유롭고 풍성하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전례 전통이 깊은 우리 교회는 “와서 보라”는 초대로 사람을 이끌고 환대하기에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름답게 찬양하러 모입니다. 그윽한 연기를 피워서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냄새를 맡고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로 올려보내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초대합니다. 와서 보며 참여하여 함께 그 깊은 맛을 느끼고, 예수님의 삶을 되새기고 그 길을 따르는 새로운 탐험, 신앙의 순례를 이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귀를 기울여 하느님과 이웃의 목소리를 들으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고상한 삶과 신앙의 조언을 건네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거룩한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을 초대하여 차별과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만들어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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