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서신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April 20th, 2011

캔터베리 대주교, 2011년 부활절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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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37).

세계를 둘러보면 폭력과 고통은 날로 증가하는 것 같습니다. 성서의 말씀이 전하는 ‘승리’의 약속은 믿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의 가공할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고, 원자력의 재앙이 가져올 위험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광신이 불러오는 도륙이 여러 나라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샤바즈 바티가 비참하게 암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라크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쓸어버리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압제자들이 권력을 움켜쥐려 하는 동안, 수많은 보통 사람과 그 가족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내전과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백만 명의 생명과 안전을, 특히 어린이들의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로 성인은 우리가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지 않고, 이미 승리했다고 말합니다. 바울로 성인의 삶과 그분이 살았던 시대를 알면, 이런 선언을 하기가 우리 시대보다 더 쉬웠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가 전하는 바는, 이 세계를 향하여 하느님께서 품으신 마지막 목적에 대하여 그 어떤 의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마지막 결과에 어떤 의심도 없습니다. 소름 끼치고 설명할 길이 없는 현재의 상태가 가져오는 고통을 멈출 간단한 처방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선언하는 진리에 대한 확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어느 권력도, 그 어떤 환경도 그 진리를 정복하거나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달을 때,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끝까지 조작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닻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위험하고 어려운 결정이나 심적인 혼란, 엄청난 슬픔, 그리고 이 세계의 고통에 대한 분노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지는 않습니다. 그 사랑은 다만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과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내는 파괴의 힘과 끝까지 겨룰 일은 없다는 점을 확신하게 합니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거절당하고 모욕당하더라도, 지독한 독재의 폭력이 쓸어버리려 할지라도, 그 사랑은 파괴될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이 생명으로 들어 올려지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새겨야 합니다. 첫째, 하느님이 사랑이 이와 같다면, 그 누구도 그 사랑이 품은 지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이 영원한 자기 주심이 펼치는 관심과 기쁨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그리고 모든 인간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어떤 인간적인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여전히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방식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포함합니다. 그 어떤 인간의 압제와 고통도 우리 신앙인들에게 너무나 깊은 고통과 분노를 가져오며,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며 울부짖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헌신과 파괴될 수 없는 사랑이 깊은 진리라면, 아무리 작은 봉사와 자비행도 가치가 있으며, 그 진리에 닿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작은 차이도 이끌어 내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앞서 우리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내세우면서 만들어낸 이 거짓과 불의의 사회에 영원히 저항하는 진리의 흐름에 작은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설득과 변화를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위협과 공격 속에서 살면서도 예배와 봉사를 쉬지 않는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보여주는 용기가 그 증언입니다. 이야말로 하느님 아들의 부활이라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간증입니다.

이미 이겼습니다. 이 순간에도 참혹한 갈등이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진실은 그 어떤 위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신뢰와 희망의 기반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삶의 모든 처지 속에서도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기꺼이 펼치는 작은 행동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 다만 우리 하느님의 본질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단 한 번 전체를 위해서 일어난 그 사건에 보였던 하느님의 사랑 말입니다.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어 고통과 불의의 멍에를 지고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일하도록 힘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을 향한 치유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원합니다.

부활절기의 축복과 기쁨이 여러분에 넘치기를 빕니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 원문: http://goo.gl/xjrC7
* 번역: 주낙현 신부

부활절 메시지 – 캐서린 쇼리 주교, TEC

April 20th, 2011

부활절 메시지 2011

지구 남반구에서는 부활을 전혀 다른 표상과 은유로 이해할 것입니다. 부활절기가 여름에서 겨울로 변하는 시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북반구에서도 쉽지 않습니다. 강추위가 꾸물거리며 비키지 않고 사월에서 여러 곳에 눈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임박한 새 생명을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나타날 새로운 창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부서진 우리 세계의 곳곳에서 처참한 재앙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키우시는 새로운 못자리 – 그것이 무덤일지라도 – 를 목격합니다. 아이티의 상황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루하루 희망을 밝히며 키워내고 있습니다. 포르토프랭스의 재건 계획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 나라를 축복하고 좀 더 나은 정부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내리라 기대합니다. 미국 성공회는 이 모든 가능성을 위해 협력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새로 주교좌 성당을 건설할 계획이 그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 삼위일체 성당과 성 피에르 대학의 무덤은 이제 꽃피는 정원이 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관계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사목 활동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활은 여러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전히 찾아야 할 테지만, 나무에서 움트는 첫 싹이 트고, 눈 얼음은 따뜻한 봄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가 남긴 결과는 여전히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벌이는 사투는 지금도 부활보다는 묵시적 종말에 걸맞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일본 북동부에서는 많은 신앙인이 노인들을 먹이고 집을 잃은 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일차적인 관심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에너지의 사용과 소비주의에 빠진 생활 태도에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부활이 건네는 선물은 인간이 하느님이 누리는 거룩한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기에, 인간은 이제 하느님과 같이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 고난과 부활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열정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우주적인 선포입니다. 부활의 백성인 우리는 죽음과 파괴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늘 일하시며 창조를 위한 새로운 은총을 가져다주신다는 확신을 새기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우주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기심을 치우려는 작으나마 기꺼운 의지와 더 큰 전체에 자신을 접붙이려는 새로운 기회를 통해서 시작할 때입니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 놓인 장벽을 낮추고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요, 거룩한 한 분에게서 나온 공동의 운명체인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를 대신하여 그분이 하신 일을 이제 우리가 나눠야 합니다. 부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펼치시는 일의 일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삶 속에서 그 부활의 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은총이 부활절기를 통해 넘쳐나기를 빕니다. 나가서, 주위 세계를 위한 부활이 됩시다.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원문: http://www.episcopalchurch.org/79425_127900_ENG_HTM.htm
번역: 주낙현 신부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April 18th, 2011

어느 신부님의 부탁으로 성주간 전례에 관한 글을 써서 한국에 보냈다. 그동안 블로그에 적었던 여러 생각을 부활 성삼일 전례 전체에 맞춰 다시 엮어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바쁜 마음 때문에 격하고 날이 선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성삼일 사건이 그만큼 격하고 전복적인 사건이라며 볼품없는 글품을 변명하려 했다.

못난 자식 보내는 심정으로 글을 보내고, 다시 돌아앉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성주간 생각’을 듣는다. 그러고 보니 써서 보낸 내 글의 처지가 더욱 가련하다. 내 글은 그 못난대로 읽힐 처지를 찾으면 되겠고, 나도 캔터베리 대주교님 ‘급’이 당연히 아니다. 😉 늘 영어가 벽인 이들도 함께 나눠야 할 깊은 생각이기에 우리말 번역에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쏟았다.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모든 점에서 성주간은 정말이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바로 이 주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아주 극적으로 펼쳐지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성주간 전례와 예식은 우리를 하나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성지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되면서 이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지와 십자가 매듭의 성지를 축복하고, 그것을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 첫 성지주일의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 예수님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이 그리 환영할 만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우리 세상과 삶에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주간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인지를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그 첫 성주간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원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갑시다. 이 주간 내내 복음서에서 읽게 될 수난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십 년 전부터 여러 교회에서는 성 목요일 아침에 특별한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의 사제들과 부제들이 주교와 함께 모여서 서품 서약을 갱신하고, 복음의 사목자로 약속한 바를 갱신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교는 성유를 축복하여 여러 교회에서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서품에 사용하도록 합니다. 성주간에 이 예식은 사목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여느 신자들처럼 성직자들도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사제, 부제, 주교, 혹은 그 누구에게나, 예수의 제자로서 사목자인 것이 자기 본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자신들의 약속을 갱신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됨을 새로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밤 전례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것처럼, 성주간 중간에 이런 서약 갱신의 기회를 얻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유 축복도 복음의 사목자에게 무언가를 되새겨 줍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 기름과 물과 같은 일상의 물질이 교회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고 상징하는, 강력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매체로 쓰입니다. 또한, 성서에서 기름은 도유와 치유로 연결되는데, 이는 복음의 사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되새겨 줍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또 기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관계, 인간 사이의 소외, 그리고 병고로 공동체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교 사목 자체의 중심이 되는 실체를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갖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위대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펼쳐야 할 봉사직을 말 그대로, 그리고 완벽히 몸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시고 종처럼 그들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밤 전례에서 성직자들은 모두 신자들의 발을 씻어 줍니다. 이는 예수 복음의 힘과 권위, 그 중요성이 늘 섬김을 통해서 드러남을 되새겨 줍니다. 섬김을 보여주지 못하는 권력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로 힘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저녁,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의 식탁에 둘러앉아 예수님의 몸과 피를 거룩한 친교의 성사 속에서 나누는 일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겸손과 그분의 섬김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밤의 어둠 속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게쎄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을 지켜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 첫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고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보다는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다는 사실을.

성찬례가 끝나면, 제대포를 벗기고, 장식을 치웁니다. 교회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남습니다. 이렇게 벗겨진 채로 성 금요일을 지나 부활밤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낼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궁핍, 우리의 가난을. 그러므로 꽃이나 그 어떤 장식이 필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벽, 벗겨져 드러난 제대와 우리 자신을 성 금요일의 놀라운 현실 실체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 금요일에 많은 교회와 여러 전통에서는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교인 전체가 예루살렘의 군중이 되어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님의 죽음을 바랐던 이들과 일체가 되는 궁극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죄와 실패가 정말로 완전히 발가벗겨져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 금요일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면모를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했던 이들이 지녔던 똑같은 동기를 우리 안에서 직면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열광에 사로잡힌 여정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다가도 예수님이 위험하고 어려운 분인 것을 깨닫자, 금세 그분을 저버리게 한 열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 금요일은 우리가 인정하기 꺼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면모를 발견하는 날만은 아닙니다. 옛날 성가가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명의 나무 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펼치시는 그리스도의 팔을 봅니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근원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하시려는 그 희생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의 어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를 포용하시고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성 토요일과 부활일 아침의 사건 속에서 완벽하게 참된 이로 만들어 주심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성 토요일의 어둠 속에서 모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을 내시고, 사막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그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며 환호하고, 예언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일과 말씀이 결국에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지를 듣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위대한 신비로 초대받습니다. 빛으로 가득 찬 순간을 맞이하며, 촛불을 모두 켜고 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빛을 축하합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걸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어둠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우리 자신을 보는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패와 죄가 드러난 어둠에서 희망과 용서의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부활의 첫 성찬례는 중단했던 모든 것을 집어들고, 오르간을 울리고, 종을 치면서 한 주간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집에 당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서서 성령을 통하여 세상에 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부활일에 우리는 그저 거기에 서서 그 사랑을 흠뻑 받을 뿐입니다. 여정이 끝나고 우리는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 집은 언제나 자비로이 받아들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집인 것을 압니다. 그 사랑이 궁극적인 희생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2880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