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깊은, 벗된 어느 신부님에게

December 16th, 2010

(주: 사적인 편지를 올리는 일은 낯설고 위험하다. 게다가 무슨 ‘훈계 질’일 성 싶으면 더 난처한 일이다. 이를 무릅쓰고 사적인 답장을 공개한다. 모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므로.)

+ 주님의 평화

사랑하는 신부님. 늘 고민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대화 상대가 되고, 또 이런 편지의 수신인이 된다는 것은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트위터 같은 사적인 듯하면서도 여전히 공적인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글들과는 달리, 내밀한 자기 시선이 담긴 글을 받는 것은 즐겁고도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사사로운 경험의 공유, 특히 삶의 여러 위기라 여길 시공간 속에서 만나서 생활하고 나눈 경험은 그 이후에도 소통과 대화, 의지와 격려의 큰 자양분이 됩니다. 저 역시 지금보다 젊은 날의 어떤 통과의례 기간에 신부님과 함께 나눈 비탈길의 대화, 그 생활의 첫 겨울, 터서 갈라져 피나던 신부님의 손등을 눈물처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생활을 저 먼저 청산하는 날을 기억하셔서 지방에서 뜻밖에 찾아와 주신 수고스럽고 따뜻한 마음도 잘 알고 있고요.

나 자신도 식별하고 있는 처지에 던진 여러 잡념을 허투루 듣지 않으시고, 신학의 길과 성직의 길에 오셔서 더욱 가까운 길벗이 되어 주신 것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두 제게 큰 격려와 힘이었어요. 제 말에 귀 기울이는 이의 모습을 봐서라도 저도 허투루 살 수 없었으니까요 – 물론 지금은 엉터리로 살지만. 죄송.. 어쨌든 그 원초적인 경험의 공유가 이어져 좀 더 확대되고 풍요로워졌으면 합니다.

최근에 수화기 너머로 나눈 하찮은 몇 마디를 깊이 받아들여서 –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가 강요하다시피한 사실을 슬쩍 모면해보려는 속셈 – 그 고민을 발전시켜주시니 또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말씀 속에서 신부님이 예전부터 품었던 희망과 꿈,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느끼면서’ 식별했던 고민이 다시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을 봅니다. 무참하게 짓눌리는 일이 사람살이에는 많지요. 누구도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피워야 할 새싹과 맺어야 할 열매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가꾸며 맺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여전히 신부님은 신부님 자신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듯합니다. 선한 이들의 가장 못된(?!) 습관은 모든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거나,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지고 가면서 그 무게에 짓눌려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는 선한 이들의 본질적인 내면의 심성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종종 자기변명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또 힘 있는 이들은 이 선한 이들의 이 약한 고리를 알고, 그 틈을 이용해서 자기의 힘을 여전히 유지합니다. 위선을 비판하고 넘어서기 위해서 위악일 필요는 없습니다만, 여전히 모든 것을 자기 내면으로 환원하는 것은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의 전략에 휘말리는 것이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자기반성을 게을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부님도 아시지요. 무엇보다도 신부님 자신이 자신을 잘 대해주시기를 바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비하된 자아는 언젠가는 복수를 하는데, 종종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하여 나와서, 자신의 처지를 매우 곤혹스럽게 하기가 일쑤입니다.

자기존중감을 지키셔야 합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탁에 따라 꽃피워야 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값 없는 은총 안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처지에서라야, 우리는 다른 이들을 하느님의 창조세계에 속한 이들로 평등하게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신학이 던지는 우리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이요 요구입니다.

바로 이에 기반을 두고 우리는 외부를 향한 좀 더 분명하고 근거 있는 변화의 요구와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의 소명과 고민, 반성은 신부님 자신을 키워나가도록 일조해야 합니다. 신부님을 압도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편지 나누니 저도 너무 좋아요. 실은 어제오늘 성탄 카드를 손수 적고 있는데 여러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렇게 짧은 글이라도 옛날 식으로 자주 주고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아마도 굴러다니는 만년필을 손질해서 이제는 손으로 쓰는 편지에 다시 습관을 드려야겠습니다. 키보드로 쓰면 이 편지처럼 딱딱해진단 말이에요. 😉 되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지요.

마음 깊이에서 평화와 사랑의 인사를 전합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성공회의 한 전통 – 그리샴 커크비 신부

October 11th, 2010

성공회는 서방 교회 내에서 어쩌면 가장 복잡한 역사의 경험과 내력, 그에 따라 가장 넓은 신학적 실험과 실천의 폭을 가진 그리스도교 전통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따라가면, 특히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어느 몇몇 특정 교단 전통이 보수든 진보든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처지에서, 이런 느슨하면서도 넓은 폭에 깃든 경험의 결들을 섬세하게 살펴서 우리 맥락의 신학과 실천에 잇대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 자신의 풍요로운 전통의 우물에서 길어올려서 나눠야 할 일은 놔두고, 남의 우물이나 기웃거리다가 자기 우물 메말라 결국 메워버리는 우를 범하기 일쑤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이야기에서 적었듯이,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는 영국 성공회, 이후 세계 성공회 신앙 전통에서 큰 지하수를 이뤄서, 곳곳에 우물을 공급했다. 게다가 그것이 성육신 신학에 뿌리를 둔 성사적 세계관을 고민하던 성사주의자들과 만나서는, 매우 독특한 우물 맛으로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와 세계에 대한 투신으로 이끌었다.

이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혹은 ‘그리스도교 성사적 사회주의’는, 이른바 ‘사회과학적’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여러 면에서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와 그 맥을 나누는 점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성공회의 이 성사적 사회주의는 여러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대체로 기구 운동이나 조직 운동보다는, 자기가 터 잡은 공간과 지역의 삶에 깊이 투신하는 일을 우선시했다. 다른 조직이나 기구 운동은 그런 사고와 실천의 확대와 협력을 위해 벌인 이차적인 것이었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이 명멸하듯, 이들도 명멸한다. 적어도 지난 20세기의 성사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그리샴 커크비 신부는 아마 그 마지막 성사적 사회주의자였는지 모른다. 아니, 그의 부고를 적고 있는 케네스 리치 신부가 아직 남아 있기는 하다. 이제 이 전통의 경험과 신학, 그 실천과 한계를 21세기에 어떻게 되살려 볼 것인가? 면면히 흘렀으나 이제 잊혀 물줄기를 찾기 어렵게 된 지하수에 잇대어 다시 퍼 올릴 우물물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 고민을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에 이어 그리샴 커크비 신부의 부고를 통해서 다시 시작해 본다.

그리샴 커크비 신부 (Father Gresham Kirkby)1
성공회 사제, 전례 개혁의 선구자, 아나키스트
(1916년 8월 11일 ~ 2006년 8월 10일)

Fr_Gresham_Kirkby.jpg그리샴 커크비 신부는 자신의 90번째 생일을 몇 시간을 앞두고 별세했다. 최근까지 런던 동부 한 교회의 주임 사제로 가장 오랫동안 섬겼던 분이었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초창기 핵무기 철폐 운동가요, 반전 운동 조직인 백인위원회(the Committee of 100)의 일원이었으며, 영국 성공회 내의 전례 개혁 선구자이자, 현장 교회의 사제였다. 콘월에서 태어난 그는 감리교 찬송의 신학(그의 어머니와 이모는 감리교 신자였다)에 큰 영향을 받으며 자랐으나, 일찍이 세인트 힐러리 교회의 사제였던 사회주의자 버나드 워크 신부의 영향으로 성공회-가톨릭주의로 신앙의 거처를 옮겼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으며, 다른 사제가 제대에서 전례를 집전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손수 오르간을 연주했다.

1940년대 초 리즈 대학교 졸업 후, 커크비 신부는 요크셔 머필드에 있는 부활 대학(부활 공동체 수도회가 설립한 신학대학: 역자주)에서 공부했다. (나중에 대주교가 된)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가 수도회 지원자로 있던 때였다. 당시 커크비는 허들스턴을 오히려 보수적이라 여길 정도였다. 1942년에 부제로, 1943년에 사제로 서품된 커크비 신부는 맨체스터 고튼의 성모와 성 토마스 교회의 보좌 사제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했으며, 1951년 런던 보우 커먼의 세인트 폴 교회의 주임 사제가 되어 1994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그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커크비 신부가 이룬 업적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교회 건축이었다. 1960년에 축성된 이 성당을 당시 영국의 ‘건축 비평'(Architectural Reviews)지는 20세기에 지어진 가장 중요한 교회 건물이라고 평했다. 커크비 신부는 건축가로 로버트 매과이어(Robert Maguire)와 키스 머레이(Keith Murray)를 선택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씨름했다. “2000년이 되는 때에 그리스도교 예배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반영한 교회는 어떻게 지을 것인가?”

Bow_Common_Church.png

보우 커먼 교회의 전례는 로마 전례를 따랐으나,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을 이미 10년 앞서서 실행한 것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성무일도를 그레고리안 챈트에 맞추어 드렸다. 커크비 신부는 “마침내 로마 교회가 우리를 이제야 따라온 것”이라고 말했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로서, 커크비 신부는 1956년까지는 자신을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로 부르곤 했다. 그는 러시아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미국 가톨릭 노동자 운동의 창시자인 도로시 데이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커크비 신부가 별세하기 이틀 전 그를 방문한 런던 주교는 신부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커크비 신부님은 아나키즘에 대한 불멸의 믿음을 갖고 있노라고 선포하시더라.” 커크비 신부는 핵무기 해체 운동을 벌이며 당시 핵무기 기지인 알더마스턴 행진을 완주한 최초의 사제였으며, 핵무기 반대 운동으로 1961년에는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투옥 동안에 브릭스턴 감옥의 채플에서 재소자들과 함께 활기 넘치는 예배를 드렸다.

커크비 신부는 ‘하느님 나라 연대'(the League of the Kingdom of God: 1922년 창립)라는 조직의 마지막 생존 조직원이었으며, 1960년 해체되기까지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 연대’의 의장을 지냈다. 그는 개량적 사회주의, 특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의 정책에는 그 어떤 동정심도 보이질 않았다.

커크비 신부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전망은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의 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 보편 교회의 신앙과 천 년의 희망”(Kingdom Come: the Catholic Faith and Millennial Hopes, in Essays Catholic and Radical, edited by Rowan Williams and Ken Leech, 1983)은 그의 사고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런던 동부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상가로 남았으며, 자신의 생각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쉬지 않고 자신과 싸우며 멈추지 않는 사유자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세상의 문제점들과 영국 성공회의 상태에 대한 관심, 그리고 변화를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표현하곤 했다. 그는 뼛속 깊이 풀뿌리 지역에 기반을 둔 현장 교회의 사제였다. 커다란 사랑을 베풀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과 영향을 준 신부였다.

— 케네스 리치 신부 Fr. Kenneth Leech, 2006년 8월 22일 영 가디언지

  1. http://www.guardian.co.uk/news/2006/aug/22/guardianobituaries.religion/print []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 헌사

October 7th, 2010

남아프리카 성공회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몇 달 전, 사회의 모든 공적 활동에서도 은퇴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종교와 세속을 초월한 진정한 영웅의 퇴장이 아쉬운 탓일까? 언론은 지난 몇 달간 그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운 행동을 되새겼고, 고통 속에서도 웃음과 재치를 잃지 않는 그만의 희망의 낙관주의에 존경의 예를 표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그의 투쟁을 기억하겠노라며 그의 퇴장에 헌사를 보냈다.

그 순간, 투투 대주교의 밝은 웃음 뒤로,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하여 싸운 그의 성장과 삶 뒤로 우뚝 선 한 사람이 엿보였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1913-1998)이다. 약 20년 전 서울 영국 문화원 한 서가에서 그에 관한 책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 책 어디에선가 투투 대주교는 자기가 어릴 적에 흑인인 어머니에게 모자를 벗어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하는 백인 한 명을 처음 보았노라고 적었다. 그가 바로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였다.

Fr_Huddleston.jpg

물론 투투 대주교는 남아공 성공회의 최고 성직자(최초의 남아공 흑인 주교)로 성장했고, 넬슨 만델라와 함께 인종분리정책 철폐 운동의 두 기둥이 되었다. 그 둘 뒤에도 역시 허들스턴 신부가 있었다. 허들스턴 신부는 이후 영국에 돌아가 주교로 임명되었고, 인도양 성공회의 대주교를 지냈다. 그러나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한 싸움은 쉬지 않았다.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는 근대 성공회 신학 전통의 매우 중요한 자산인 신학과 실천 운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다. F.D. 모리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와 찰스 고어의 자유로운 성공회 가톨릭 정신(Liberal Anglo-Catholicism)의 성사주의가 만난 신학과 신앙을 몸으로 실천했던 마지막 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전통을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이라 부른다.

허들스턴 자신은 찰스 고어 주교가 창립한 부활 공동체(the Community of Resurrection: CR)의 수사 신부였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의 CR 수도원에 파견되어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서 얻은 해방의 신학으로 제도 교회, 심지어는 자신의 수도회와도 갈등을 겪으며, 복음이 선포하는 해방의 실천을 살았다.

지금 누가 그를 다시 돌아보는가? 그의 전통은 어디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여러 핑계 속에서 그의 해방을 향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쉬지 않고 저항하기보다는, 제도 교회에 대한 부정, 혹은 제도 교회로 종속되는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우리를 겨우 꾸려가지는 않는가? 그가 “안위 따위는 쓸모없어”(Naught for Your Comfort)라고 외칠 때, 우리는 흠칫 놀라며, 그를 과거에 묻어두려 하지 않는가? 교회는 보수화되고, 어디든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그 자리에 대한 변명을 일삼을 때, 교회는 여전히 “잠만 자고 잠꼬대하는 일”로 제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여러 헌사 가운데 하나를 찾아, 이곳에 옮겨 읽는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 헌사1

찰스 빌라-비센치오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 사람들은 그를 마칼리필레(Makhalipile)라고 불렀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국가의 격노에 맞서는 일에 두려움이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소피아타운의 어느 지역에서도 생명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결국, 그곳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허들스턴 신부님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을 밤새 몇 시간 동안 혼자 걸었어요.” 만델라 대통령은 내가 소피아타운에 대해서 묻자 그렇게 말했다.

“두려움이 없는 분이어서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았어요. 누구도, 깡패들도, 소매치기들도 그분을 건드리지 못했죠. 모두 그분을 너무나 존경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분을 해치지 못했는데, 혹시라도 누가 그런다면, 그 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분의 위대한 용기가 그런 존경의 공간을 만든 것이죠”라고 만델라는 말했다.

언젠가 허들스턴 신부님을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신부님은 정치적인 사제인가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남아프리카에 도착하는 순간 그렇게 느꼈어요. 제도화된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정책은 복음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물론 내 소명은 사목하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의 영혼과 삶을 돌보는 것이었죠. 그런데 내가 복음에 대해 설교를 하면 할수록 모두 이 체제를 향한 것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정부와 싸우게 된 것이죠.”

“나는 사제로서 책임이 있는데다, 인종분리정책에 따른 경계선 침해 위반 등으로 체포된 남편들, 아내들, 그 자녀과 형제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을 찾는 일도 해야 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잡범이 되거나 깡패가 되거나 술에 빠져 살았죠.”

“내 선교 사명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어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질긴 생명력과 무한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복음은 이러한 자원을 창조적이고 책임있는 방법으로 새롭게 쓰라고 요청합니다.”

“나는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놓인 비참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루 내내, 일주일 내내 그들은 위험을 안고 살고 있었습니다. 인종분리정책(아파라트헤이트)은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범죄이자,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파괴하는 악마적인 권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신성모독이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제거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소피아타운에서 지낸 세월은 내게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가르쳐 줬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이 될 요량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열정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함께 슬퍼하고 우는 것, 함께 웃고 승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열정이 넘쳐나는 거칠고 혼란스러운 삶에서 도망치는 일은 비극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도적 교회는 그가 바라는 지원을 하는데 주저했고, 그 때문에 때로 실망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케이프타운의 제프리 클레이턴 대주교와 1949년부터 1957년까지 불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주교는 당시 ‘반투 교육령’에 대한 허들스턴 신부의 견해와 행동을 과도한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지금도 반투 교육령이 모든 인종 분리 법령 가운데도 가장 사악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법령은 무고한 어린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과 그 가능성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들이 박차고 일어나 한목소리를 냈다면, 무시무시한 그 반투 교육령은 철회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이 법령에 반대하는 우리를 힐난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정부 권력자들은 교회가 저항을 그만두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옳았습니다.”

결국, 소피아타운의 그리스도 왕 교회의 신실한 신자요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 졸업생이었던 올리버 탐보를 공산주의자 진압령으로 유죄를 선고했을 때, 허들스턴 신부가 보기에 교회는 한없이 비겁했다. 허들스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침묵과 무관심, 그리고 항복은 자신의 귀를 틀어 막는 일입니다.”

“교회는 잠만 자고 있다”는 제목으로 그가 옵서버지에 기고하자, 교회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허들스턴 신부는 G.K. 체스터튼의 “백마의 발라드”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데, 너의 안위 따위는 쓸모없어
“그래, 너의 욕망 따위는 쓸모없다고.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그것을 구해야 해.
“바다가 더 높아지기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교회는 잠만 자고 있다. 종종 잠꼬대하기도 한다. 그걸 정부가 들을 것이라 기대하면서(기대나 하는 것일까?) 말이다.”

허들스턴 신부에게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 물었다. “아, 많은 게 변했죠. 내가 소피아타운에 있을 때만 해도, 해방신학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없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의 목소리는 교회 안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죠. 여전히 교회는 요구되는 사명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그전과는 다르기도 하고요.”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는 1998년 4월 20일, 자신이 1939년 입회했던 영국 머필드 부활 공동체 수도원에서 별세했다. 그의 재는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에 뿌려졌다.

  1. Charles Villa-Vicencio, “Father Trevor Huddleston: A Tribute,” Journal of Theology for Southern Africa 101(July 1998):69-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