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과 비관 사이

May 13th, 2009

내용 없이 징징거리는 듯한 블로깅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돌이켜야겠다. 한 주 전 쯤 교회 내에 있는 어떤 분의 긴 편지에 교회의 여러 일들에 대해 답장하면서, 결국에는 ‘잡감’에 대한 또다른 소회를 적는 것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올해 들어 잡감들이 더욱 밀려 옵니다. 블로그에도 적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잡스러운 생각들은 성직자들과의 관계, 교회의 문제, 그리고 성직 자체에 대한 고민 속에서 나옵니다. 남을 두고 비판하는 시점에서 나온 고민도 있고, 순전히 제 개인적인 고민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잡감들 속에서 저는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 놓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서로들 스스로의 도마를 마련해 보기를 권유하려고 미욱한 고민이나마 공개했던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내 무의식에 흐르는 것들을 들춰서 어떤 너머를 지향하고 살아가보자는 심산입니다. 그런 일이 쉽지 않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 어떤 너머라는 초월을 종교인들 마저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면 누가 생각한단 말입니까? 신자 아닌, 성직자 아닌 사람들도 우리보다 더 깊이 보고, 식별하고 있는데, 우리 자신이 뒤틀린 자의식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신자로서, 성직자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우리 자신의 뒤틀린, 혹은 가려진 무의식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렇게 고약한 방식으로 공방을 주고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공방이 감정을 상하게 한다고 여긴다면, 그냥 멈추는게 서로에게 이득입니다. 한편, 그렇게 쉬이 상하는 감정을 갖고 성직자 할 일은 아니라는게 제 최근의 결심입니다. 오해를 하더라도 창조적으로 하자는게 또 다른 결심입니다. 그런 창조적인 오해는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되살려 서로를 먹이며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복합감정에 사로잡혀 오해를 양산하는 무의식의 구조가 밝히 드러나서 그 어둠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아직 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에 이렇게 긴 답장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비관주의자입니다. 제 한계를 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한계가 다른 이들과의 공명을 통해서 낙관을 비추지 못한다면, 아마도 저는 비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대로 제게서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소망을 없애서 하늘에 대한 희망을 열어준다면, 그 비관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돌이키는 시점의 마지막 푸념이길 스스로 바란다.

기도의 창

May 12th, 2009

산란한 마음의 창은 어디를 향해 열려 있는가? 기도는 늘 매개(medium)를 바라는 것이겠으나, 창(窓)은, 그 한자의 말마따나 좀더 분명한 성사(sacrament)의 이미지일 것이다. 창은 바람이 들고 나는 것, 닫힘과 열림, 보호와 투시,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너머를 향한 응시를 드러낼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창 안쪽에 머물러 있지만, 그 나만의 세상 너머를 창을 통해서 본다. 그것이 유일하게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렇다면 기도는 ‘나’를 넘어서도록 매개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도와 창에 관한 이 잡념이 어울리는 통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말들, 그러나 서로 상관없을 듯한 말들이 함께, 어디서 쑥하고 드민다.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기억하는, 마리아와 원장 수녀님의 대화 가운데 한토막.

하느님께서는 문을 하나 닫으시더라도, 어딘가에 창 하나를 열어 두신단다.

조앤 치티스터 수녀님은 기도와 창을 이렇게 연결하신다.

탈무드에 나온 말이에요. ‘창 없는 방에서는 기도하지 말라.’ 다시 말해 마음 속에 세상을 담아 두지 않고서는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영성 생활의 목적은 우리를 현실에서 구출하는게 아닙니다. 그 목적은 그 현실을 우리가 함께 창조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어요.

하느님은 나를 어느 열린 창으로 이끄실까? 그 창 너머로 무엇을 응시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창조하며 살게 하실까?

‘성직자’ 잡감 2

April 29th, 2009

1.
“영혼을 팔아 먹는 짓”은 무슨 파우스트적인 거창한 일이 아니다. 아니, 그것이라면 오히려 파우스트적인 도전과 고뇌를 칭찬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 불행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이런 의지도 열망도 없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 자신이 마주한 어떤 처지에서 자신의 본 생각을 숨기거나 타협하여 그것에 굴복하는 건 오히려 인지상정이겠다. 사람은 생존본능의 노예니까. 그러나 이게 습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타협과 잘못을 비난하는데서라야 자신의 본 생각을 드러내어 짐짓 옳은 체하고, 또다시 다른 처지에서 다른 식으로 타협하는 행태는 “영혼을 팔아 먹는 짓”이다. 이 짓은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일이 성직 사회에서도 넘쳐 나는 지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음란한 짓이다.

2.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훈계할 때, 자신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 이들의 말에 근거를 두고 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어떤 객관적인 사실과 사태에 대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태의 정황에서 늘 해석되고, 그 이해 당사자에 의해서 사실이 조작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말에 기대는 순간 그 자신의 신뢰를 깎아 먹게 된다. 이 역시 영혼을 팔아먹는 일의 일종인데, 이런 자기 모순이 그 자신의 비참에서 그치면 다행이련만,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공공의 적이다.

3.
성서의 기드온은 오합지졸 병사들을 골라내서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 식별 기준은 병사가 전쟁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무의식에서마저 견지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다시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도자는 바른 식별을 해서 이끄는 사람이다. 골라내거나 쳐내는 일은 그 어감과는 달리 식별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겁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게 했고, 삼백명의 정예 군사로 효과적인 전쟁을 치렀다. 집으로 돌아갈 걸로 판정받은 병사들은 고집을 피우지 않아서 죽지 않았다. 성직은 식별을 따르는 행동이지, 고집 피우는 일이 아니다. 그러다간 전쟁도 지고 자기 목숨도 잃는다.

4.
어떤 전략과 전술도, 그리고 어떤 생존 훈련도 시키지 않은 채 밖에 나가서 정체성을 갖춰라, 성장시켜라 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앵벌이하라는 말이다. 그 앵벌이의 실체는 굽신거리고 거짓말하는 일이고, 좀 힘이 있을라 치면 그마저 없는 이를 ‘삥’ 뜯는 일이다. 앵벌이로 나서는 이들 역시 힘에 눌려 여기서 도망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 일이 반복된다.

5.
사목은 진심어린 격려와 위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어디서든 입에 발린 말들이 되기 쉽다. 그 속내가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은 이면에 어떤 복합감정(complex)에 따른 질시와 무시가, 어른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팽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위계질서와 섞여서 작동하면 사목과 교회는 치마만 슬쩍 두른 이전투구의 장이 된다. 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성직자 개인은 불행하고, 그를 지도자로 여기는 교회는 무너진다.

6.
질투와 시기는 차이에 대한 비교에서 비롯된다. 차이가 만만한 것이라면 바르게 경쟁하면 될 일이고, 넘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차이에서 배우는게 남는 일이다. 질투와 시기는 경쟁을 통한 발전으로 이끌지도 못하고, 배움을 통해서 스스로를 먹이지도 못한다. 하느님께서 저마다 주신 다양한 은사를 늘 설교하면서도 자신은 그 말에 절대로 순응하지 않기에, 결국 복합 감정의 노예가 된다.

7.
가까운 사람들, 자신이 믿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좀더 인색한 식별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도전해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 가까움이 자칫 식별의 눈을 가리고 도전을 멈추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자주 경험하고 전해 듣고, 또 발견하게 된다. 그 잣대로 인해서 그와 멀어진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역으로, 무엇이든 받아주리라 생각했는데 애정과 합리로 도전을 해오는 이가 있다면, 그를 붙들어야 하겠다.

8.
누가 그랬던가? “나쁜 사제는 없다, 다만 병든 사제가 있을 뿐.” 문제는 병자가 자신의 병을 돌아다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 결과는 나쁜 일들이다. 당연히 사제는 나쁜 일에 가담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사제가 늘 옳은 의사로만 자처할 뿐, 스스로 병들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사도 병들어 죽는다. 손 쉬운 자기 진단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질이 다른 사람에게만 향해 있는가? 누구에게 먼저 부러움과 질시가 먼저 일어나지 않나?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지 않나? 말과 행동에서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내리 누르려 하고 있지 않나? 사실과 논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솟아오른 감정으로 논리를 치장하지 않나? 등 등. 하기야 이런 것들을 물어서 자신의 병증을 진단하려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병든 사람은 이런 진단 자체를 거부한다.

9.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더이상 그리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노라 하셨다. 서로들 벗으로 여기지 않으니 불행한 일이다. 어른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이 “벗”에 대한 갈망과 실천을 말과 몸에 속속들이 배이도록 하지 않는 한, 결코 예수를 따르지 못한다.

10.
성직 10년이라는 무게가 나를 무섭게 짓누르는 해에, 되돌아 보고 있는 것들의 편린이다. 이런 수준으로 밖에 돌아보지 못하는 게 스스로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이다. 다만 오늘의 부끄러움을 넘어 내일 주님 앞에 조금씩 가까이 갈 수 있으면 한다. (그러니 이 잡감을 오해 마시라. 아니다. 오해하신다면 더 큰 영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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