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2nd, 2009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그의 죽음 앞에
모두 부끄러워 하라,
우리의 편만한 위선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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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자연의 한 숨결이 되소서. 합장.

은하수에 묻는 얼굴들

May 22nd, 2009

언제든 조용히 나와 앉아, 펼쳐지는 도시와 숲과 물과 산을, 그리고 하늘과 태양과 달과 별을 볼 수 있었던 집을 비워야 하는 처지라서 마음이 좀 그렇다. 궁색한 삶이었지만 이런 풍경 탓에 기쁘게 지난 몇년을 살았다. 그럼 됐지 뭐, 하다가 새로 좁혀 들어갈 집을 돌아보고 오니 한숨만 나온다.

아이들에게서 옮아온 감기에 며칠간 몸과 정신이 몽롱한 처지에, RSS 구독기에 떠오른 어떤 글과 화면. 밤하늘에 은하수가 떠오르는 장면을 담아 보여 주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순간, 그림은 떠오르지 않고, 김환기의 말과 그 제목이 떠올랐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던가?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별들과 함께 있기에…

별들을 빌어 외롭지 않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외로운 표현은 없겠다, 싶었다. 밤에 홀로 나앉아 검은 하늘과 별을 친구 삼아 본 이들은 안다… 그런데 이도 잠시, 별 볼 일 없는 구석 집으로 가면 어찌 될까 싶은 생각이 마음을 흩뜨린다.

화면을 보며, 다시 김환기의 그림 제목을 생각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나같은 사람도 그럭저럭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인연이 스친 듯하든, 애처롭고 안타깝게 깊은 것들이든, 많은 얼굴들이 회전하는 별들처럼 움직이며 멀어져 갔고, 떠오르는 은하수의 아득함에 그 얼굴들을 묻기도 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희미한 얼굴에서 선연한 얼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만나고 헤어진다. 그래,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아마도 다시 못 만나기 십상이리라. 새로운 만남들이 그 기억을 상쇄할테니, 그리 상심하지 않아도 되리라, 하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 은하수에 묻은 얼굴들에 말없이 깊은 축복의 인사를 건넬 뿐…



5.18 상념, 민노씨의 글에 부쳐

May 22nd, 2009

이건 순전히 민노씨 탓이다. 누굴 탓하는 일은 피하려 노력하나, 덕을 입은 탓은 해야 한다. 민노씨가 아니었더라면, 이제는 내 삶에 고유명사가 된 “오월”이면 여지없이 찾아와 짓누르는 감정을 발설하지 않고 지났을 것이다. 그의 부지런한 블로깅은, 덮고 가면 될 것들을 여지없이 휘저어 놓는다. 그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물론 이는 그의 블로깅에 대한 찬사이다.

민노씨가 남긴 독서의 흔적을 따라가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 바빠 죽겠는데, 이때 이게 올 게 뭐람!’하는 혼자 투정은, 이미 그에게 낚였거나, 정확히 발설되지 않은 어디에선가 그와 맞닿게 되었다는 걸 뜻하는지 모른다. 결국, 한마디 남기려다가, 댓글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내 댓글을 보고 내 블로그에 직접 올려 놓는 게 어떠냐며, 거듭 옆구리를 찔렀다. 그 핑계로, 몇 마디를 고쳐 올려 놓는다. 누구에게는 떠올리기 싫은, 누구에게는 영원한 주장이 되어버린, 5.18이라는 단순한, 그런데 여전히 짓누르는 숫자에 관한, 여러 상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게 그의 기대대로 어떤 울림의 시작이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민노씨의 격려에 감사.

민노씨: 5.18, 폭력의 구조, 그리고 투명한 죽음

민노씨의 글은 다시 오래된 독서, 그러나 부족한 독서를 되새겨 주고, 무엇보다도 5.18에 대한 겹치는 상념들을 돌이켜주었다. 그가 독서의 자락으로 펼쳐 놓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그렇다 쳐도, 왜 김현에게 광주는 “그림자로만 머물러”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왜 광주 자체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르네 지라르라는 생소한(할 수도 있는) – 물론 대가의 통찰력을 가진 – 학자의 매우 파격적인 이론을 검토하는 것으로 출발했을까? 김현은 외국의 이론을 우리의 경험에 대비해 봄으로써,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고, 더불어 이를 우리 삶에 대한 분석에 적용함으로써(문학 비평이든, 문화 비평이든) 생각의 방법과 지평을 넓히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것이었을까?

내 독서의 한계 안에서, 김현은 이런 일을 이질감 없이, 아니 적절한 낯섦을 이용해서, 우리 문학 평론을 통해서, 울림 있는 우리 말 구사로 전개한 몇 안 되는 평론가일 것이다. 다만, 이런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어떤 이론은 그 발생학적인 맥락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맥락에서 동떨어진 이론을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적용하는 게 그리 적절한 것일까? 그리하더라도 그 비판적인 거리 두기의 지점은 어디일까? 그런 점에서 김현, 아니 나처럼 외국에서 공부하는 처지에 있는 이들은, 서구가 마련한 경험과 이론의 정치함에 눌려, 근본적으로는 어떤 이론의 보편성을 전제하는 일에 쉽사리 빠지지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에까지 잡다하게 닿았다. 물론 논리적으로 익은 건 아니다.

그런 참에 다시 르네 지라르를 다시 들춰보며 생각했다. 그가 폭력에 대한 통찰을 신화 분석이나 그 밖의 인류학적(이라고 주장하는) 분석(이 아니고 그 전제를 무차별하게 적용한다는 비판이 있지만)을 통해서 길어올리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욕망하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게 자리 잡은 폭력과 그 은폐의 구조를 발본색원하려는 폭로의 전략으로서 매우 소중하겠다. 이 전략은 폭력에 의한 희생을 감추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그 정당성이 도전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몰랐던 걸 이제 내가 알려주마’하는 지라르 특유의 단정적인 태도에 내 마음이 흐트러진 탓일는지 모른다. 다만, 어떤 전제된 구조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았다. 지라르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시원적’ 혹은 ‘창건적’이라는 수사는 어떤 천형처럼 박힌 어떤 폭력의 원형을 말하는 것 같다. 한편, 그 자신 그리스도교 신자(천주교)로서 그 무의식에 내재한 어떤 원죄 신학이 비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그는 다른 종교는 악하고, 오직 그리스도교 전통(정확히는 유대-그리스도교적)만이 옳은 듯이 말하며,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다른 종교들을 다시 희생양으로 만드는 듯하다. 어쨌든 여전히 뭔가 빠진 게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삶 자체로서의 결이 겹친 살아있는 이야기이다.

나 같은 성서학 아마추어가 보기에도, 지라르가 자주 언급하는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그것이 어떤 원형적인 시원을 밝혀주는 신화이기 이전에, 출애굽(Exodus)이라는 역사적(물론 해석된) 사건의 경험에 기반을 둔 세계와 우주에 대한 해석학을 통해 생성된 결과물이다. 출애굽의 경험과 그 이야기가 과거를 가리키는 창세 신화와 그 이후의 역사 해석의 원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해석학, 혹은 해석과 분석의 근거가 되는 경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늘 반복되어 기억되는, “떠돌던 백성들이 노예가 되었다가 해방된 사건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때문에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어떤 원형적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도 끼지 못했던 떠돌이의 경험, 박해받았던 노예의 경험, 그리고 여기서 해방된 경험에 대한 풍요로운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원형 구조에 대한 관심과 분석의 과잉이 풍요로운 이야기의 기억을 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5.18을 다시 돌아본다. 질문은 민노씨의 말마따나, 왜 우리는 “이제 합법으로 위장된 폭력의 구조는 죽음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속수무책인가?

그동안 “5.18”은 숫자 그 자체로서 큰 울림과 떨림이 있었다. 그 숫자로서만도 떠올려지는 화면들(우리는 나중에 처참한 사진과, 질 낮은 비디오로 숨어서 봐야 했으니까), 풍문들(우리는 몰래 귓속말로 전해들어야 했으니까)이, 그리고 거기서 나온 참을 수 없는 분노들(진보 논리 이전에 우리는 눈물을 훔치고 가슴을 찢을 듯이 일어섰으니까)이 우리의 살갗과 눈물에 범벅되어 이야기로 남았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라면 5.18을 ‘사태’로 부르든,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든, ‘민중 항쟁’이라 부르든,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5.18이라는 숫자로서 우리에게는 5.18의,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와 생생한 기억, 그 이야기와 그 기억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이 있었다.

한동안 “5.18”은, 출애굽 사건이 그리했던 것처럼, 우리 삶과 사회의 변혁에 대한 해석의 토대로서 작용했고,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최소한 지난 25년여 동안 “5.18”은 이런 점에서 가장 극악한 폭력에 대한 폭로요, 진보적 운동의 근거였다. 이참에 묻고 싶은 것은, 그 근거가 되는 그 경험의 이야기가 기억되고 재생산되는 방식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5.18을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지는 않았나, 우리는 자기 입맛에 따라 늘 멋대로 요리하고 치장하는 데 써먹긴 했어도, 그 의미는 과잉되어 넘치는 대신에, 아직 펼쳐지지 않았던 그 속의 이야기들은 묻히고 잊히지 않았나, 아니 그 몇몇 의미들만 확대되어 곧장 주장이 되지 않았나, 그 사이에 망각의 시간에 몸을 던져서, 그 화면과 풍문과 분노로 몸에 새겨졌던 이야기들은 하나씩 잊혀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기억되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의 틀 속에서 기억될지를 마련하지도, 아니 우리 스스로 그렇게 기억하지 않고, 점점 늙어가는 피부에 우리의 감수성을 내버려두고 둔감해지지는 않았는지 하는 상념에 이른다.

어찌 보면 무엇보다도 그 살에 새겨진 이야기들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우선일지를 두고 말이 많을 법도 하지만, 폭로 전략의 효율성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감수성이 무디어져 그 폭로가 식상해진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석과 전략 속에서 우리는 비판의 대상을 늘 밖에 두다 보니,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거나, 쉽게 면책하고 만다. 폭로되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니 결국 “매일매일 투명한 죽음을 만들어” 내는 일에 공조하는 셈이기도 하고, 폭력을 까발리기는 커녕, 여전히 스스로 폭력 은폐의 주체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민노씨 글 탓에 아주 잡스런 생각이 부조리하게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