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들에게 눈길을 주는 새해

January 6th, 2008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사(한국일보)에서 새해 인사를 짧게 적어달라는 청을 해서 보냈는데, 그 후론 아무런 연락이 없다. 실렸는지 여부도 모르겠다.(알고 보니 실리긴 했다. 맞춤법이 이리저리 틀린 채) 허접한 흰소리라면 종이가 아깝고, 독자들이 들인 시간이 아까울 것이어서 조심하긴 하는데… 쏟아낸 말인 이상 그릇되지만은 않은 생각이려니 해서 여기에 올려서 찾아뵙고 드리지 못한 새해 인사를 대신한다.

작은 이들에게 눈길을 주는 새해

새해 인사는 으레 기운차고 희망있는 말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앞섭니다. 즐거운 기운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세상이 희망과 기대로 넘쳐나고 있으니 딴지거는 작은 목소리 하나 정도는 참아 줄 아량은 있겠다 싶어 이런 글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무쪼록 새해가 작은 이들의 목소리를 허투루 듣지 않고 다독여 주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작은 것들에게 마음이 잘 가지 않는 까닭은 우리 안에 큰 것들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과 마음이 분주한 것도 가만보면, 저만치 세워놓은 목표가 너무 높아서 도대체 이런 속도로는 안되겠다고 스스로를 채근하는 탓입니다. 그렇게 달려오다 지친 세월에 대한 회한은 특히 이민사회의 쓸쓸한 풍경이기도 합니다. 아무쪼록 새해는 이런 풍경의 단편을 더하지 말고 우리 안에 있는 작고 소중한 것들을 잃지 말고 다시 눈길 주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종교에서 가장 경계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우상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종교 혹은 종교생활이 도리어 우상이 되거나, 우상을 세우는데 이바지하는 일이 숱합니다. 축복과 은혜가 곧장 세상살이의 성공으로 등치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면 이미 병세가 심각합니다. 종교를 갖거나 신앙 생활을 한다는 분들은 그 종교들이 담고 있는 “역설의 신비”에 깊이 마음을 두고 살았으면 합니다. 아무쪼록 새해는 자기 안의 우상을 깨뜨리고,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작고 참된 기쁨을 되찾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이런 것들을 한 다짐으로 단박에 이룰 수는 없습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람살이든 사물이든 그 가운데서 마음주지 못했던 가장 작은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보고, 그 한두가지에 우선순위를 두어 짧은 시간이나마 반복적으로 실천해야겠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든지, 짧은 산책이든지, 그도 아니면 작은 화초 하나라도 키워내는 일로도 훈련이 가능합니다. 아무쪼록 새해가 이런 작은 자기 훈련의 시간으로 채워졌으면 합니다.

이런 소리도 새해 덕담이 될 수 있는 마음 넉넉한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복 받으라는 덕담에 하나 보태렵니다. 줘야 받을 것이니, 이렇게 인사하고 싶습니다. 새해 복 많이 주고 받으세요!

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7

December 14th, 2007

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7

신약성서에서 가장 낯설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서에 있는 한 구절입니다(11:16):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으십니다.” 성서 기자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신실하고, 자기 만족에 안주하기보다는 신앙으로 앞을 향해 나가는 일에 신실했을 때, 그들이 진정한 순례자로 살아갈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으로 알려지는 것을 즐거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순례자들의 하느님으로, 즉 자신들의 삶이 완전하지 않기에, 여전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온전함을 향하는 여정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으로 선포하십니다. 올 10월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중동에 있는 피난민 캠프에 방문해 본다면, 말 그대로, 철저히 집없는 자(홈리스)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 어떤 삶의 방책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같은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결코 어떤 만족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며, 항상 어떤 미래를 바라 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어떤 수치감도 없이 함께 하시려는 이들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집없는 이들과 함께 집을 만들어 거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는 또한 다른 의미에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를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께서 “수치”로 여기시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괴상한 표현입니까. 이는 그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동반자로 삼는데 절대 괘념치 않으시는 분임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함께 하는 어떤 사람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경험을 우리 대부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때문에 당황하고,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이 당황하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때로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다가 그 사람이 고함쳐 말하거나, 이상하게 행동하거나 하면,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으면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라는 동반자가 자기 만족에서 벗어나와 앞으로 움직여 나가려 할 때, 우리와 동행하는 것을 당황해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런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불완전하고 혼란스럽고, 게다가 죄많은 인간을 동반자로 삼는 걸 “수치”로 여기실 지 몰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인정하고, 그들이 필요로하는 진리에 직면하려 할 때, 그 혼란스럽고 죄 많은 사람의 하느님이 되는 것을 행복해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 루가의 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토록 자주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음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자기 의심과 기쁨 없는 갈망에서 나오는 흐느낌을 들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러저리 헤매며 불안해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속에서 그런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의 순례 길에서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걷는 것을 즐거워 하시기에, 우리가 함께 걷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그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아주 쉽사리, 죄 많고, 의심 많고, 또 쫓겨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판단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걷는 일이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정말로 수치로 여기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면, 히브리서의 말씀이 강력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자신들은 이미 그 여정의 종점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미 완전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1고린 4:8에 나온 성 바울로의 분노어린 경멸의 말씀과 비교해 보십시오. –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걸 정말로 당황해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수치로 여기시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은 하느님이 필요없는 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희망과 용서가 필요 없는 듯이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곤궁함을 아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성탄절에 그들과 함께 하시러 오십니다. 그들과 함께 살고, 죽고, 그들을 위하여 부활하시러 오십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물질적인 가난 뿐만 아니라, 자기 만족이라는 “부요함”이 없는 이들, 진정한 만족이 없는 이들, 자신들이 진정하고 온전한 인간성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을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러한 축복을 모든 형태의 가난한 이들, 바로 물질적인 재원이 없는 이들과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건네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배고픔과 필요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 봅시다. 함께 하면 수치스럽겠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런 다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하고 물어 봅시다. 만일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곤궁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세상을 껴안고 계신다면, 이제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성탄절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축복과 기쁨 주시기를 빕니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Translated by the Rev’d Nak-Hyon Joo)

* 캔테베리 대주교님의 육성으로 이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aco.org/acns/podcasts/

* 이 성탄절 메시지는 세계성공회사무소(런던)의 요청으로 주낙현 신부가 번역하여 세계성공회 웹페이지한국성공회 신문에 공식 게재됩니다.

우상, 그리고 경계에 선 파수꾼

December 10th, 2007

매주 한국에 계신 신부님들께 보내드리는 설교 자료를 빌미 삼아, 짧은 생각을 보탰다.

대림절기는 역시 설렘과 희망의 절기이지만, 한편으로는 도전의 절기이기도 하군요.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도덕이 밥먹여 주냐? 경제와 추진력이 최고야!”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기세를 높이게 된 모양입니다.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걸 투영해 누군가를 만들어보자고 하는군요. 우상이 하나 서고 있습니다.

이런 우상의 등장을 물 너머 하릴없이 지켜보면서, 우리 교회도 이런 세태에, 현실이니, 시대정신이니, 생존을 위한 변화니 하는 미명을 들어 은근슬쩍 따라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합니다.

오늘 성서 주해에서 보듯이, 신약학자 보른캄은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잘 정의했더군요.

“그는 영원한 시간을 가르는 경계에 선 파수꾼이다”

우리가 서있는 경계는 어디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감당하겠노라고 나선 파수꾼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들이 목숨을 내걸고 감옥에 갇혀 자기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오실 그분”을 재확인하고 결단하려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겹치는 저녁입니다.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