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대주교, 성찬례와 선교의 비전

November 16th, 2006

아래에서 소개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인터뷰는 이런 저런 논란거리로만 언급되고 말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질문들 사이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아우르는 영성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성찬례의 신학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드러내곤 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성공회 신학자다운 위험한 균형 잡기에서 신앙의 길을 찾고자 한다. 그 길은 성찬례에 대한 이해에서, 그리고 교회 선교 사명에 대한 연대와 실천에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한다. 몇 가지 내용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성찬례

Q. 한때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무시무시한 심판자의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그저 그런 도덕 선생을 드러내는 신학이 있었다면, 오늘날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와 관계를 맺어야 하겠는가?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 대주교는 성찬례를 통해 드러나는 “신비한 몸”을 통한 예수의 이해를 강조한다.

R.W. “예수의 신성은 신비한 몸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게 되면 삶의 목적으로서 예수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성찬레를 통해서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이다. 우리가 예수에 대한 신심에 대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여전히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은 바로 성사적 그리스도(the sacramental Christ)에 대한 감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성령을 통해 흘러나오는 생명이다. 성령은 이 생명으로 우리를 연합시키고 묶어 주시며, 우리가 제대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이 성령은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예수의 기도에 참여하게 하며, 이로써 예수의 생명을 받게 하신다. 이것이 모든 개인적인 기도, 공적인 기도의 근간이요, 모든 것이다. 내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나 랑베르 보뒤엥(Lambert Beauduin)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전례 운동의 신학이다.”

Q. 미국 가톨릭 작가인 Flannery O’Conner는 성찬례가 단순한 “상징”이 아니며, “내 인생의 핵심이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소진되고 말 것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 동의하는가?

R.W. 동의하지만, 세심하게 말할 필요가 있겠다. 성찬례는 상징이다. 오코너가 상징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상징이 어떤 실재에서 떨어져 나와 그저 생각 속에서만 이해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상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찬례는 어떤 시각적 보조 장치가 아니며, 우리 기억을 잠깐 흔들어 되새겨 주는 것이 아니다. 성찬례가 이 세계를 뒤흔드는 어떤 사건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는 일이 되지 않는다면,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그런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 대해 반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찬례에 대한 내 생각의 핵심이다.

Q. 그나저나 성공회는 화체설과 가까운가?

R.W. 영국 성공회의 39개 신앙 조항이 화체설에 매우 부정적으로 그린 탓에, 성공회는 특별히 그런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다만 무언가 일어났다는 식의 특정한 이론에서 사로잡혀 있어서 문제가 생겨난다고 본다. 내가 말하고픈 것은 떡과 잔이라는 성사가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예수의 힘을 담지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몸과 피가 그분의 힘과 정체를 온전히 담지했던 것과 같다.

2. 교회의 선교 사명

Q. 왜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는가?

R.W.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한 반발이라기 보다는, 여러 교회들의 물질주의적, 실용주의적인 태도로 세속 사회와 결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책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러시아 혁명기에 유럽으로 이민 온 여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볼세비키 혁명을 반대했지만 사회의 정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여러 공장주들을 찾아가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해서 많이 호소했다. 공장주들이 “그들은 동물이나 다름 없는데 왜 그리 신경쓰느냐”고 묻자, 그는 “그들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게 내가 그들과 상관하는 이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게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비전과 상상력이다.

Q. 곧 교황을 만날 터인데, 그간 양 교회 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열은 명백하다. 가시적 일치가 요원해 보이는데, 도대체 양 교회 사이에 도대체 뭐가 남은건가?

R.W. 아직 많은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 여성 성직이 문제가 되는가 이야기해야 하고, 교회 일치의 가능성을 볼 수나 있는가 물어야 한다. 반면에 현재의 교황제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고, 어떨게 될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이런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양 교회는 지금 시장에서 경쟁하는 처지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세속 사회 한가운데, 도대체 편안한 마음을 갖기 어려운 세계에 함께 서 있다.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주제는 기구적인 일치를 넘어서 좀 다양해져야 한다. 즉 구체적인 협력의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우리가 함께 할 일이 있고, 이미 수단에서는 양 교회가 함께 협력하고 있다. 이미 우리 사이에서는 많은 교리적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 기구적 일치까지 가기는 넘어야 할 산이 많기 하지만, 이와 더불어 우리가 함께 아프리카의 교육과 화해를 위해 일한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대주교와 여성 사제직, 그리고 선정적 언론 보도

November 16th, 2006

어디서나 선정주의 저널리즘은 문제거리인데 종교 관련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캔터베리 대주교의 직무실인 람베스궁은 대주교의 말을 인용한 짤막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의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영국의 로마 가톨릭 신문인 “가톨릭 헤럴드”가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와 행한 인터뷰에 대해 여러 신문 논평들이 대주교의 뜻을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윌리암스 대주교의 “여성 사제직” 문제에 대한 인터뷰에서의 언급을 두고, 대주교가 영국 성공회의 여성 사제직 서품 실행을 재고해야 할 것이라고 잘못 해석해서 보도하고 있다는 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는 그동안 여성 사제직을 옹호해왔으며, 이번 람베스궁의 보도를 통해서 다시한번 1992년 영국성공회의 여성 사제 서품 결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현재 여성 사제들을 치하한다고 못박았다.

바티칸 방문을 앞두고 로마 가톨릭 언론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로완 윌리암스 주교는 성공회와 천주교 사이의 일치와 관련된 다양한 신학, 교회,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서 성공회의 입장을 피력했다. 예수의 신성과 성찬례의 관계, 세속 사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 그리고 양 교회 간의 일치와 분열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그 자신의 신앙적 신학적 배경과 더불어 펼쳐졌다. 문제는 양 교회의 관계에서 “여성 사제직”이 일치의 장애물이 될 게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에서 비롯되었다. 즉 천주교의 발터 카스퍼 추기경이 여성 사제 문제를 양 교회 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언급한 점을 인터뷰어가 지적하자, 윌리암스 대주교는 이 문제가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교회 내부의 분열과 더불어 계속될 것이지만, 이것을 돌이킬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 여러 언론은 이를 두고 “캔테베리 대주교, 여성 사제직 재고할 수 있어..” 혹은 “캔터베리 대주교 여성 사제직에 대한 의심 인정” 등으로 제목을 뽑았다. 게다가 칼럼들은 대주교가 지적한 여러 난점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충분히 여성 사제직 실행과 여성 사제들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주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어디서도 인용하지 않았다.

“영국 성공회가 여성 사제 서품을 결의했을 때, 수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성 사제 서품은 우리가 그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지 남성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때 잃어버리거나 희미해져버리는, ”모든 세례받은 이들의 몸“을 드러내고 대변하는 사제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신학적인 견해는 이런 확신에 근거합니다: 세례받은 여성이나 남성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게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결의를 한 것은 이런 인식이 가져다 줄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이런 어려움때문에 이것 그만 두어야 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미 영국 성공회 안에서는 이에 대한 충분하고 깊은 신학적 논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 로만 가톨릭 교회를 아프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 하면서 돌아가는 것도 잘못이요, 또 그런게 로마 가톨릭 교회에 위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또한 양 교회의 일치에 대한 논의가 이런 교리적인 일치에서 진전될 수만은 없다고 보았다. 이런 한계는 이미 성공회-로마가톨릭 국제 위원회의 문서(ARCIC 1)에서 인정한 바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프리카 수단에서의 에큐메니칼 협력을 예로 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하는 선교 사명을 위해 일하는 일이 일치의 또다른 길인 것을 강조했다.

아마추어의 관찰로 보자면, 선정주의에 경도된 저널리즘은 대체로 상업적 이익의 추구가 한 동기가 되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리기적 대결 상황에서 나온 조작의 동기도 있겠다. 몇몇 코멘트가 보여주는 대로, 가판대에 눈을 쏠리게 할 선정적인 헤드라인 전략이 이 “의도적인 오해”에 한 술을 보탰다면, 자신의 신학적 정치적 이념을 덧씌운 기사로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이간질하려는 의도도 보인다. 세계성공회 내의 갈등이 이런 저런 일로 긴박한 처지에, 진보적 성향을 가진 캔터베리 대주교를 차제에 보수파로 덧씌어 놓고, 생색내며 비판해 보면서 다시 보수적인 견해로 이끌어 보려는 수작같은 것이다.

그나저나 이런 보잘 것 없는 독해 능력이 버젓하게 득세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들이 쉽게 속아넘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 조선일보와 그 추종자들을 보라. 눈 똑바로 떠서 보고, 귀 똑바로 열고 들을 일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미국성공회 의장주교 캐서린 쇼리 취임 설교

November 4th, 2006

성공회 사상 최초의 여성 관구장으로 선출된 미국 성공회의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The Most Rev. Katharine Jefferts Schori)의 의장 주교 취임식이 워싱턴 D.C.의 내셔널 캐시드럴에서 열렸다. 시간 차로 인해 이곳 성공회 신학교에서는 오전 8시에 웹캐스팅을 공동 시청할 계획까지 세웠다. 아, 오늘 아침의 분주한 일로 가지 못하고, 나중에야 웹캐스팅을 보려했지만, 끊임없는 버퍼링에 지쳐 버리고, 겨우 쇼리 주교의 설교만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 언급했던 대로 하느님의 꿈과 비전 속에서 본 세상의 샬롬, 그리고 교회의 사명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그리고, 당장 번역해서라도 한국에 있는 분들과 나눠야겠다고 마음 먹고는 번역해서 이렇게 올리게 되었다.

하느님이라는 고향을 향해 가는 여정 길에서 어떻게 함께 걸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꿈, 즉 샬롬의 전망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 사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전언이라고 하겠다.

그가 제안하는 샬롬의 비전과 하느님을 함께 걸어보지 않겠습니까? (아래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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