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6

December 8th, 2006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죄인을 풀어주시고, 사탄에 잡힌 사람들 구하여 주신다.” 이 말은 제가 가장 좋하는 대림절 성가의 한 구절입니다. 이 말은 또한 성탄절 이야기의 ‘부드러운’ 점들만 좋아하는 탓에, 우리가 종종 무시하고 지나가고 마는 성탄절의 한 면모를 되새겨 줍니다.

나자렛 예수께서 태어나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 인간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류사가 동튼 이래로, 사람들은 모두 덫에 걸려 살았습니다. 가장 훌륭하다는 이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회의를 품으며, 그분으로부터 멀어져서 서로를 두려워 하는 것을 대물림한 탓입니다. 인류사 이전에 하느님께 대한 대반항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피조물의 반항은 교만과 오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이 원초적인 비극의 신호로서, 지극히 뛰어난 자질을 가진 존재도 이러한 자기 오만으로 타락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천사들이 갖추었던 온갖 지능과 영적인 존엄도 루시퍼가 자기 존재의 기반인 하느님을 거절하는 극단적인 광기를 드러낼 때 이를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능과 존엄의 타락은 이 우주에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와는 동떨어진 세상을 살고 있음을 알고 느끼면서도, 이러한 덫에서 어떻게 헤어나올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의 탄생과 삶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탄생과 삶은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인류는 우리의 존엄성을 새로온 기반에 다시 세울 때라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신인 성자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기에, 모든 인간은 그 변화의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반항이라는 전염병은 이제 새로운 자비로운 ‘감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인간과 소통하시려는 하느님의 손길이 스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과 협력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시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길을 이미 열어 놓고 계셨습니다.

내년은 영국 의회가 노예제를 철폐한지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이론적으로 확신하던 계몽적이고 진보적이었던 유럽 지식인들이 이루어낸 일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하느님 말씀의 성육신으로 손길이 스친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가를 열정적으로 깨달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낸 일입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제가 노예였던 사람이 가진 존엄성에 대한 가혹한 모욕이며, 동시에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 영적인 건강과 고결에도 가혹한 상처를 내고, 노예 소유를 통해서 그 자신이 죄와 탐욕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탄절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가 윌리엄 윌버포스와 그 밖의 노예제 철폐 운동가들을 기억하며 어떤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이기심이라는 감옥을 깨뜨려 열어줍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겪는 비참을 우리 삶의 뒷모습쯤으로 당연시하는 우리의 게으른 태도에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이제 우리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도록 합니다. “우리가 당연시하여 관심갖지 않는 비참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늘의 노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년에는 이러한 질문에 우리가 대답하는데 도움이 되는 많은 행사들이 있겠지만, 이미 우리는 몇가지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 병사들, 성매매의 희생자들, 수십년동안 끊임없는 폭력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 그리고 이러한 폭력에 의해 집과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오시어 죄인을 풀어주신다.” 이제 그분이 ‘모든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일에 헌신하는 우리의 실천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합시다. 이제 예수의 그 존재와 그 말씀과 그 실천을 통하여 베들레헴으로부터 갈보리, 그리고 그 너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사건에 감사를 드립시다.

“평화의 임금께 우리의 찬송을 드리니,
주님을 환영하라 선포하는 소리 울려 퍼지며,
하늘의 문들은 그 사랑하는 이름을 찬미하네.”

이 시간, 하느님의 은총과 행복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빕니다.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이 성탄절 메시지는 세계성공회사무소(런던)의 요청으로 주낙현 신부가 번역하여 세계성공회 웹페이지한국성공회 신문에 공식 게재됩니다.

제임스 김의 명복을 빌며

December 6th, 2006

실종된 지 열 하루만에 제임스 김은 결국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틀 전에 차 안에 남아 있던 아내와 젓먹이 딸, 네 살된 딸이 모두 건강하게 구조되었지만, 정작 구조를 요청하려 나섰던 남편 제임스는 수색 구조팀에 온갖 단서와 흔적을 남기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차 기름이 다 떨어지자 타이어를 태우며 추위를 견뎠고, 음식물이 떨어지자 아이들을 젖먹이며 견뎠다는 가족의 분투가 눈물겨웠는데… 이제 그 아내와 어린 두 딸, 그리고 가족과 친지에게 깊은 하느님의 위로와 보호가 있기를 빈다. 그리고 온갖 지혜와 용기로 가족을 지켜냈던 제임스 김이 하느님의 따뜻한 품 안에서 평화롭게 쉬기를 기도한다.

관련보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뉴욕 타임즈
AP 영상 보도

교회 분열에 대한 우스개 소리 하나

December 4th, 2006

어느 날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리 난간을 넘어 뛰어 내리려는 참이었다. 나는 황급히 뛰어가서 그를 말렸다.

“잠깐만요. 그러지 마세요.”
“이러지 말 이유가 있소?” 하고 그가 묻자, 나는,
“그럼요, 살아야 할 이유야 많죠?” 하고 대답했다.
“그게 뭔데요?”
“종교가 있나요?” 내가 묻자,
“예,” 그가 대답했다.
“나도 그래요. 그럼 그리스도교 신자요, 아니면 불교 신자요?” 하고 물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도 그래요. 그럼 가톨릭이요, 개신교요?” 하고 다시 묻자, 그는
“개신교인데요.”
“나도 그래요. 그럼 성공회 신자요, 침례교 신자요?” 하고 묻자,
“침례교 신자요.”
“와, 나도 그래요. 교단이 하나님의 침례교요, 주님의 침례교요?” 하고 묻자,
“하나님의 침례교요.”
“나도 그래요. 그럼 원조 하나님의 침례교요, 아니면 개혁 하나님의 침례교요?” 하고 묻자,
“개혁 하나님의 침례교요” 하고 대답했다.
“나도 그래요. 그럼 1879년 개혁파요? 아니면 1915년 개혁파요?”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1915년 개혁파인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래 죽어라 이 쓰레기 이단아!” 하고 말하면서 그를 떠밀어 버렸다.

초대 교회는 조화롭고 통일된 하나의 교회였다는 믿음은 신화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양이 처지에 따라 다양했기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분열과 다툼은 어디에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는 양상이었다. 갈등은 초반 몇 세기에 대단한 신학적-교리적 논쟁을 겪으면서 정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의 권력에 의한 일시적인 봉합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 교리적 논쟁이 그런 분열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다름에 분명한 경계를 긋고, 그것을 틀린 것을 정죄하면서 더욱 곪아가는 양상을 보였다. 이 사이에서 어느 교회 전통도 그 본래 의미의 “가톨릭”이 아니다.

이런 논쟁과 분열의 양상은 대체로 정통과 이단이라는 이분법을 주무기로 하여, 정죄와 파문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실제 그 집행 과정은 지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십자군 – 그게 이슬람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의 탈환이었지만, 실제로는 정교회 신자들을 도륙했다 – 으로부터, 종교개혁과 연관된 끊임없는 종교 전쟁을 낳았다. 오죽하면 이러한 종교에 의한 살육의 전쟁이 끝나서 각각의 독립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계기인 “베스트팔리아 평화 조약”(1648년)에 이르러야 진정이 되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의 힘은 이를 계기로 국가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역사가들은 이를 서구 근대의 출발로 보는데 입을 모은다. 종교 권력이 끝나는데 근대의 시작이 있다면, 다시 패권적 종교 권력을 구사하려는 힘들이 부흥하는 것은 근대 이전의 회귀가 되는 것일까?

시시껄렁한 우스개 소리 하나 소개하려다가 참 거창한 이야기가 나와버렸다. 여전히 손쉬운 이분법과 편 가르기, 그리고 정죄와 파문이 사그라들지 않는 종교계 (대체로 그리스도교계)는 여전이 “근대” 이전에 있는 듯하다. 교회의 분열 상에 대한 이 농담은 한국의 교회 분열을 그대로 비춘다. 분열은 대체로 커다란 공통점보다는 작은 상이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 상이점들은 서로를 정죄하기 위해서 극대화되고 폭력적이 된다. 이런 극렬함은 대체로 경전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근거를 두어 자기 해석 이외의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이다. 근본주의는 정치, 종교, 주의를 막론하고 또다른 하나의 종교이다. 그리고 한기총이라는 다른 종교가 있다. 나는 “부시의 기독교”와 “오사마 빈 라덴의 이슬람교”를 같은 종교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