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1th, 2017
친절한 ‘동임’ 씨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신부님, 새로 오셨으니 사진 찍으셔야죠. 앉으세요.” ‘찰칵.’ 메마른 초로의 여성 한 분이 불쑥 다가왔습니다. 가녀린 어깨를 짓누르던 검은 물체가 조막만 한 자기 얼굴을 가리는 찰나, 셔터스피드 1/500 초의 작은 울림이 공기에 살짝 퍼졌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제 ‘머그샷’은 3년 전 사제관 귀퉁이에서, 그 찰나의 시간과 빛이 남긴 흔적입니다. 콧잔등에 삐툴하게 내려앉은 안경을 바로 잡지 못하고, 손가락 빗질도 없이 고개를 슬핏 내밀다가 멋쩍은 웃음이 들킨 사진입니다. 그렇게 ‘동임’씨와 만났습니다.
‘동임’씨는 자주 조리개 f/16의 실눈으로 쨍하게 저를 째려보곤 했습니다. [복음닷컴] 원고 모집이 얽히거나 제게 맡긴 교정지가 속도를 내지 못할 때는 여지 없었습니다. 스톱워치를 든 육상선수 코치처럼 옥죄는 싸늘한 긴장감은 슬쩍 오해와 이해의 경계, 신자와 성직자의 거리를 위태롭게 만들곤 했습니다. 마지막 교정에 ‘오케이 사인’이 나면 환히 열린 눈빛의 조리개가 선명합니다. “애쓰셨어요, 신부님 없으면 이걸 어떻게 만들어욧?” 새침데기 아가씨 같은 미소와 목소리에 저와 다른 신부님들은 언제나 즐거운 패배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동임’씨와 우정을 쌓습니다.
‘동임’씨의 노출계는 자신의 태생 같은 ‘일본산’ 정확도로 유명합니다. 우리 성당 새 교우들을 담은 얼굴에는 그들 삶의 비밀이 노출되는 것만 같습니다. 조잡하게 인쇄된 흑백사진 얼굴이 미안해서인지, 꼼꼼히 인화하여 챙겨 든 컬러사진을 예쁘게 보관하고 손수 찾아다니며 건넵니다. 새 교우들의 세례와 견진, 교회의 여러 행사를 찍은 사진을 보면 ‘언제 이렇게 많이 찍으셨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작은 몸으로 어떤 전례나 행사 안에서도 공기를 스윽스윽 가르며 빠른 셔터음 사이에 정작 자기 노출은 숨기니까요. 그렇게 ‘동임’씨와 우리 공동체는 하나가 됩니다.
이글의 주인공 곽동임 앵니스 교우는 지난 십수 년 동안 [복음닷컴]이라는 가늘고 위태로운 삼각대에 올려진 카메라와도 같았습니다. 우리 삶과 신앙의 흔들림을 기록하고, 함께 흔들리며 위로하고 손을 내미는 따뜻한 시선을 소중히 담았으니까요. 까칠하지만 ‘친절한 동임씨’를 우리가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우리 ‘동임’씨를 볼 때마다 저는 밤기도의 한 구절을 되뇝니다. “우리의 삶이 서로의 수고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항상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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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11th, 2017

주의 봉헌 축일 – 역사가 빛으로 만날 때 ((성공회신문 2017년 2월 11일치 5면))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주님의 성탄에 담긴 ‘빛의 오심’과 공현에 깃든 ‘빛의 널리 퍼짐’의 뜻은 주의 봉헌 축일에 절정을 맞는다. 1년 동안 교회 전례와 가정 기도에 쓸 양초를 축복하고, 새 촛불로 제대를 밝히고 순행하면서, 이 세상과 역사 안에서 우리 신앙인이 빛의 순례자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희미해진 이 축일은 역사 안에서 복잡하게 발전했다. 대체로 공현 축일(1월 6일) 40일 후인 2월 14일에 지키던 관습이, 성탄 후 40일인 2월 2일로 바뀌어 자리 잡았다. 지금은 성탄 장식을 공현일 전야에 치우는 관습에 익숙하지만, 장식을 이날까지 남겨두며 성탄의 기쁨을 연장하는 전통도 많았다. 오랫동안 전례 색깔은 장엄과 절제의 흑색이나 자색이었지만, 몇 세기 전부터 기쁨과 환희의 백색으로 바뀌었다.
신학의 강조점도 결을 달리하며 겹쳤다. 아기의 봉헌이 초점인가 하면, 성모 정결례라는 별명처럼 산후 축복과 감사 예식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촛불 예식 자체로 빛이신 그리스도를 기리는가 하면, 나이든 세대의 간절함이 젊은 세대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만남이기도 했다. 한편, 이 봉헌의 기쁨 안에 서린 슬픔과 아픔이 아련하게 남는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는 신앙인도 삶 속에서 우리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아픔을 통과하면서 거짓 안에 “숨은 생각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아픈 사명을 새기며 신앙인은 사순절의 순례를 준비한다.
이러한 전례와 신앙의 역사가 신앙인의 봉헌 생활을 새롭게 비춘다. 요셉과 마리아는 빈궁한 살림에서도 작은 정성을 마련하여 바친다. 삶과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마땅한 행동이다. 마침내 그들은 아기 예수를 봉헌한다. 봉헌된 아기 위에 우리 자신의 삶이 포개진다. 그리스도교의 봉헌은 제물을 드리는 제사 행위가 아니라, 우리 삶을 바치는 헌신의 행동이다. 신앙은 역사 안에서 생명을 살리고 진리를 밝히는 일에 헌신하는 일이다.
이 봉헌의 현장은 새로운 만남의 공간이다. 인생의 황혼이 되도록 세상의 구원을 겸손하게 기다리던 시므온, 온갖 차별을 이기며 여성 예언자로 홀로 활동하며 늙은 안나를 만난다. 이들 신앙의 어른은 겸손한 기도로 새로운 세대를 격려하고 지지한다. 자기 시대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신앙이 황혼의 원숙한 신앙이라고 몸소 증언한다.
시므온의 찬가는 주님 봉헌 사건의 절정이다. 젊고 새로운 이들을 환대하고 격려하여 신앙을 물려주는 일이 구원과 연결된다.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옛 종교가 아니라, 만민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신앙이 새롭게 펼쳐진다. 이방인들과 낯선 사람들도 누리고 기뻐하는 구원이 열린다. 이것이 신앙의 대를 잇는 방법이며 선교이다.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걷는 사람들과 갓 태어난 이들이 신앙 안에서 만날 때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
그리스도는 빛이다. 역사 안에서 그 빛을 들고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남녀노소 저마다 작은 빛들이 모여서 한 무리 큰 빛이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역사 안에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변화를 가져다주는 빛의 순례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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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9th, 2017

뒤집어야 열리는 행복 (마태 5:1-12)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널리 드러나셨으니, 그 제자들과 신앙인들도 그늘진 세상에 빛을 비추며 삽니다. 신앙인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오히려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사회 곳곳에 만든 음습한 그늘이 널렸습니다. 거기에선 거짓이 곰팡이처럼 번집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불러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며 그 가르침과 길을 따르라 하셨으나, 율법은 금세 스스로 ‘선택받은 자’라고 으스대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속박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새 역사를 여시며 새 가르침을 주십니다. 사람을 옭아매는 과거 율법을 뒤집어, 사람에게 참된 행복을 선사하는 은총의 복음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새롭게 열린 은총의 법입니다. 복음서를 가로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 다섯 묶음은 모세오경을 교체하고 뒤집습니다. 그 첫 단락 참된 행복 선언은 십계명을 넘어서며 우리 시선과 행동을 새로 열어줍니다. 십계명은 여전히 하느님과 우리 인간이 나누어야 할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펼쳐야 할 관계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명령과 조건이 가득한 계명은 압박과 통제의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이에 반해, 복음은 우리의 모질고 거친 삶 자체에서 깃든 복락의 씨앗을 발견하시며 축복합니다.
모세가 험하고 외로운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여럿이 함께 오른 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락을 선언합니다. 높은 산의 지위를 독점하는 권력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올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고 가르칠 때, 참된 권위가 섭니다. 세상에서 작고 비천하다고 취급받는 이들을 ‘산 위’로 끌어올려 ‘곁에’ 앉히실 때, 예수님께서 여시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작동합니다. 세상 풍파로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 온유함을 갖추고 정의를 목말라 하는 사람, 깨끗한 마음으로 자비와 평화를 위해 사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을 받고 그 삶이 칭송받는 질서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은 예수님께서 뒤집은 질서를 깊이 마음에 새깁니다. ‘이 세상 안에서 지혜 있고 강하다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고 약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1고린 1:26-28). 바울로 성인은 말끝마다 ‘이 세상’이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이 세상’에 대항하여 ‘하느님 나라’에 깃든 가치를 세우라는 요청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 지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지식과 지혜와 지위를 찾으라는 말입니다. 어거스틴 성인이 말한 대로, “이 세상의 사사로운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넓고 거룩한 사랑”을 분별하라는 당부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경쟁하여 얻어내고 오른 성공과 성취는 예수님이 선포하는 은총과 행복에서 거리가 멉니다. 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을 함께 초대하고 끌어올려 곁에 앉혀 누리는 삶이 행복의 길입니다. 세상의 시각을 뒤집어서 돌이켜야 참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비추시니, 함께 올라 누리며 빛의 길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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