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보라! – 초대하여 함께 벽을 넘는 신앙

January 18th, 2015

1사무 3:1~20 / 시편 139:1~6,13~18 / 1고린 6:12~20 / 요한 1:43~51

2015년 1월 1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9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나와 있습니다. 어떤 연유와 내력이 있든, 신앙은 항상 누군가 마련한 초대에 응답하여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발걸음을 떼어 어느 자리에 모이는 일로 시작합니다.

초대받아 모인 공간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한 자리에서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구약과 신약성서를 통해서 선포되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마다 지닌 기도의 제목을 이 거룩한 곳에 가져와서 마음 깊이 하느님께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고 ‘나’ 자신의 기도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와 자매, 교회와 세계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해서 주신 이 성찬의 상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먹고 마시라는 초대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찬양과 기도를 올려드리고, 말씀을 먹고 성찬을 나누는 곳에 초대받아 참여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이 초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초대에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초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질문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에서, 어린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색깔이 독특합니다. 나름대로 지각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젊은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무엘은 함께 사는 제사장 엘리에게 찾아가서 자신을 불렀느냐고 묻습니다. 엘리는 늙고 귀가 어두웠습니다. 엘리는 부른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거듭해서 자신을 부르는 이상한 음성을 들은 사무엘이 다시 엘리를 찾아가지만,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늦게서야 엘리는 자신의 오랜 신앙 경험과 경륜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의 음성에 대답하라고 사무엘에게 일러줍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도 알려줍니다. “하느님, 말씀하세요. 제가 듣고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하여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늙은 엘리의 시대가 가고, 젊고 활기찬 사무엘의 시대가 왔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나이 든 제사장 엘리의 효용 가치가 떨어져서, 더 쓸모 있는 젊고 새로운 사무엘을 하느님께서 선택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근거 구절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몹시 부족한 해석이어서 오해를 낳기 쉽습니다.

급한 해석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의 장면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 뜻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시선을 바꿔서 돌아보면, 젊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신앙의 초대를 알아차리도록 돕고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하도록 돕는 사람은 바로 제사장 엘리였습니다. ‘엘리’라는 이름의 뜻은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상한 지혜와 경륜으로 젊은이의 식별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을 자식 농사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제사장직을 자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가여운 처지라고 말이지요. 정말 그런 뜻일까요? 오히려 엘리는 자식이나 가족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에 세심하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을 물려주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실제로 사무엘이 하느님께서 엘리에 관하여 전하신 소상한 말씀을 자신에게 숨김없이 전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에 그는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설 수 있는 신앙이 곧 고상한 신앙입니다.

어쨌든, 사정을 모두 알아차린 엘리는 사무엘에게 조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께 응답하라고 합니다. 그 응답할 내용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줍니다. 매우 겸손하고도 성실한 어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고상하고 성실하며 연륜 깊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제 사무엘을 눈여겨봅니다. 사무엘은 ‘듣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어른이었던 엘리의 식별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어른의 식별 도움을 얻고서야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신앙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준비입니다. 저 같은 설교자와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듣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듣고 공부하고 새긴 만큼만 밖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인간관계와 사회 안에서 이상한 고집과 주장으로 서로 오해하고 싸우는 일은 꽤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진리는 나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진리는 내 경험에서도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밖에서, 밖에 계신 하느님에게서, 밖에 있는 지혜와 통찰과 경륜을 통해서 내게로 들어옵니다. 그러니 서로 귀 기울이지 않고는, 서로 배우지 않고는,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할 훈련을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과 나 자신의 주장을 혼동하고 맙니다.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느님은 우리 신앙인이 서로 깊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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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이 신앙의 초대에 응답한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먼저 제자가 된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갑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전하고 기다렸던 ‘어떤 분’을 따르기로 했다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의 초대에 친구도 초대합니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가 돋보입니다.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오겠냐?’며 자신의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을 드러냅니다. 우리 사회와 빗대어도 여러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태도입니다. 학력과 지역 차별, 재산과 지위에 따른 차별의식이 여러 곳에 널려있는 사회입니다. 이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고정관념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를 꾸짖기는커녕, ‘나타나엘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며 그를 있는 그대로, 그의 깊이를 헤아려 주십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사람을 안다’는 것, ‘사태의 본질을 안다’는 것에 관한 신앙인의 태도를 되새기게 합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지식과 경륜에서 얻은 확고한 신념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종종 ‘내 신앙 체험과 신앙이 옳다’고 확신하고는 합니다. 밖을 향해서 어떤 판단을 쉽게 내리곤 합니다. 예수님과 나눈 대화 중에서 나타나엘은 깨닫습니다. 오히려 밖에서 오는 친밀하고 따뜻한 발견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 내면의 참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오랜 지식과 체험은 종종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으로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 고정관념은 자기 내면의 눈을 가려서 사람 판단, 사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신앙은 자기 안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밖에서 오는 새로운 발견을 받아들이고 안팎으로 새로운 탐험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구약성서의 핵심인 ‘율법’의 원래 뜻도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걷는 일’입니다. 적어도, 성서의 신앙은 전능하고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를 우러러보는 일이기에 앞서, 예수님의 삶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걷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과 맺은 관계의 모본에서 배우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당신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길은 알 수 없는 탐험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탐험의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 바로 신앙입니다.

필립보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따르라는 초대로 “와서 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도드라진 표현이 사람의 움직임과 참여를 드러내는 동사인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몸소 걸어서 참여하고 관찰해야만 새로운 경험이 일어납니다. 또한, 새로운 사람을 ‘와서 보라’고 초대하고 환대하는 일로만 새로운 사람과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장면을 보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채롭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사람을 가르는 차별과 사회를 가르는 분열의 담이 허물어집니다. 대신, 초대와 환대, 그리고 친교가 어떤 학력과 출신과 지위와 성별을 막론하고 자유롭고 풍성하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전례 전통이 깊은 우리 교회는 “와서 보라”는 초대로 사람을 이끌고 환대하기에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름답게 찬양하러 모입니다. 그윽한 연기를 피워서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냄새를 맡고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로 올려보내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초대합니다. 와서 보며 참여하여 함께 그 깊은 맛을 느끼고, 예수님의 삶을 되새기고 그 길을 따르는 새로운 탐험, 신앙의 순례를 이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귀를 기울여 하느님과 이웃의 목소리를 들으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고상한 삶과 신앙의 조언을 건네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거룩한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을 초대하여 차별과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만들어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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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은총 – 안과 밖을 함께 응시하는 일

January 14th, 2015

히브 2:14~18 / 시편 105:1~9 / 마르 1:29~39

2015년 1월 14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예수님의 삶은 마르코 복음처럼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목을 3년 정도 기간으로 그리는 다른 복음서의 구성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여지 없이 깨집니다. 예수님은, 시쳇말로, ‘짧고 굵게’ 모든 일을 1년 만에 끝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한가하게 예수님의 태어난 경위나 족보를 들먹일 시간이 없습니다. 세례자의 요한이 곧장 나타나 예수님을 예견하고, 그분께 세례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이 어떠한 것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첫 장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곧바로 갈릴래아에서 전도하시고, 어부를 불러서 제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길을 서둘러 가십니다. 적어도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분입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길을 걷는 분입니다. 어쩌면 현대의 빠른 발걸음과도 닮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빠른 장면 전환이 느려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사건과 행동을 길게 설명하는 장면이 마르코 복음서에는 여럿 등장합니다. 살펴보면, 호흡이 길어지는 곳에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바쁜 가르침 와중에 악령을 쫓아내서 사람을 정상으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여행 중에 몸이 아픈 사람을 쓰다듬고 고쳐주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 예수님은 멈춰 서셨습니다. 몸이 아프고 깨진 곳에 예수님은 비집고 들어가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서는 큰소리로 꾸짖어 혼내시는가 하면, 몸이 아픈 곳에서는 조용히 곁으로 가서 따스하게 손을 내밀고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쉬지 않는 길 속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처지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짧은 생애의 긴박한 선교 사명 속에서도 그분의 눈과 귀와 감각은 늘 다른 사람과 그들의 처지를 향하여 세심하게 열려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감각의 방향은 우리 삶의 태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민감한 사람은 신경질적이며 자기방어적이기 쉽습니다. 자기만을 향하여 자기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누군가 손만 대면 아파하는 사람으로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그 처지에 민감한 사람은 그 사람의 아픔과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구석을 찾도록 이끕니다. 세심하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때라야 ‘나 자신’도 너그러워지고 ‘나 자신’이 정말로 아픈 곳이 어딘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동과 시선이 늘 두 겹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러 들어가서도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통상의 생각과는 달리,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가르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찾는 공부와 대화 속에는 악령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악령을 꾸짖어 내쫓았다는 점이 눈에 도드라집니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어쩌면 이는 논쟁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생각과 고민을 함께 검증하며 큰 소리로 대화하며 종종 논쟁하는 일을 멈추면 악령이 들어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어떤 잡념이 악령이 되어 여러분을 괴롭힌다면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설교 방송을 듣지 마시고 기도서를 읽으십시오. 솜사탕 같은 묵상집이나 예화집을 읽지 마시고 역사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도 아니면 좋은 선생이나 성직자를 찾아가 깊은 질문을 두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괴롭히는 악령이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쉬러 들어가셔서도 아픈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쉼과 치유는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쉬면 치유가 일어난다는 당연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쉼이 없으면 병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던 열병을 고쳐주신 이야기는 다른 사건입니다. 쉼이 있는 동안에도 누군가를 치유하는 손길은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쉰다는 일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급박한 일에 눈감고 내팽개쳐 두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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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정말로 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쉬는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우리는 쉬어도 쉬지 않고 쉽니다. 미친 듯이 싸돌아다니면서 쉬고, 온갖 맛집을 돌아다니면서 쉽니다. 혹시나 그 사이에 다른 급박한 부탁으로 연락이라도 올라치면 방해받았다는 듯이 귀찮아하면서 쉽니다. 이것은 쉼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시간’을 ‘내 마음으로 소비하는 쾌락’입니다.

쉰다는 것은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은, 내 주위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을 느리게 관찰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조용한 가운데서 아내의 손놀림을 살피는 일입니다. 무심한 듯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선이 붙은 남편의 등을 응시하는 일입니다. 좁은 방에 들어가 수학책 영어책에 머리를 박고 말라가는 자녀를 잠시 불러내어 허튼 농담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쉼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필요한 바에 눈을 뜨고 손을 내밀고 손을 잡아 끌어주는 일이 쉼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치유도 만들어 내고, 나 자신의 치유를 이끌어 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을 보자면, 예수님은 주어진 시간에 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성당으로 모여서 성찬례로 새벽을 여는 것처럼, 예수님은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시며” 쉬셨습니다. 이 새벽 기도의 시간, 이 새벽 미사의 시간은 여러분에게 쉼의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는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입니다. 예수님께도 그 빠른 길을 걷느라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이었습니다.

누구에게는 뭐 그리 큰 도움이 될까 생각하기 쉬운 아까운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을 잘 아셨고, 그 어둠 속에서 참 인간이셨던 당신이 지닌 어둠을 대면하는 분이셨습니다. 대면하기 싫은 자신의 어둠이든지, 우리 시대와 사회의 어둠이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내키지 않은 어둠의 시간이든지, 그 어둠의 시간 속에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어느 시인의 조언과 겹치는 말입니다.

“어둠과 비움에 머물라. 무에서 도망치지 말라.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키워내고자 유한한 기둥을 새로 세워
그 빈 곳을 채우려 하지 말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니, 도망치지 말라.” (Sandra Cronk)

이것이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한 몸을 쉬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이 목표를 향해서 긴박하고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함에 쓰러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이 비틀어지고 몸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이 불완전함으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완전성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본문대로 ‘피와 살’이 되셨습니다. 두 겹의 의미가 돋보입니다. ‘피와 살’은 불완전성과 한계, 유혹에 노출된 약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고통은 ‘피와 살’로 그려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와 살’이 되어서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 ‘피와 살’로 만든 이 성찬의 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절망, 슬픔과 눈물이 ‘주님의 피와 살’을 받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우리 이웃과 사회의 상처와 깨진 곳을 둘러보는 시선에서, 우리 자신의 깨진 곳이 보입니다. 그 사이로 구원이 빛, 치유의 빛, 너른 환대의 빛이 스며듭니다.

레너드 코헨은 노래합니다.

“아직 소리 나는 종을 울려야 하리
너를 완전히 하여 봉헌할 생각일랑, 잊어야 하리
깨지고 금 간 틈이 있지, 모든 것에는 그런 깨진 틈이 있어
바로 거기로 빛이 들어오리니
바로 거기로.”

경계를 가르며 살기 – 실베스터, 위클리프, 크로우더 축일

December 31st, 2014

실베스터, 존 위클리프, 사무엘 크로우더 축일
1요한 2:18~21 / 시편 96:1, 11~13 / 요한 1:1~18
2014년 12월 3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 우리는 다시 여느 아침처럼 이 아침에도 성찬례로 모였습니다. 마지막 날은 늘 새로운 날을 기대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기대하기 위해서 묵은 한 해의 절망과 슬픔을 되새기며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려니 여러모로 고통스럽습니다. 저 자신도 여러 가지 희망을 품고 기쁘게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로 돌아온 해였습니다. 그러나 제 앞에 펼쳐진 현실은 밖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나빴습니다. 우선은 주어진 일에 몸을 맡겨서 적응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사순절을 참 잘 보냈습니다. 매일 아침 성찬례 탓인지 몸과 마음이 상쾌했고 연일 계속되는 사순절 대심방의 피곤함에도 교우들과 나누는 이야기, 함께하는 기도를 통해서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는 했습니다.

저 스스로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사순절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스스로 사목의 감각을 찾고 있다고 믿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순절 막바지에 다다르며 부활을 기다리던 성주간 화요일, 4월 16일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세월호 안에서 삼 백 여 꽃다운 생명이 스러지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기쁨이 아닌 절망과 눈물로 부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도대체 부활은 무슨 의미일까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세상의 종교들이 주는 허무맹랑한 약속과 환상의 교리에 대해서 새로운 물음을 던져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사회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희망하고 믿고 따르는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교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인간의 구원은 무엇일까요? 그동안 우리가 외우며 머리에 박아 두었던 신앙과 교리들이 이 현실 속에서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요? 게다가, 세월호는 세월이 가면 잊히니까, 우리 신앙의 의문과 흔들림도 그저 세월에 묻어 보내버리고, 다시 예전의 모습대로 돌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사는 시간과 우리가 겪는 사건은 우리 삶과 생각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점에 불과한 시간을 우리 멋대로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정하고, 내일을 1월 1일 한 해의 시작이라고 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천체의 계산법을 따른 것도 아니요, 단순히 편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1년 단위로나마 지나온 시간을 되새겨 역사를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반복되는 시간과 날짜로 세월에 묻힐 어느 사건을 잊지 말자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반복되는 시간과 날짜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이루었는지 비교하고 살피는 계기를 갖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맞을 내일 1월 1일은 작년 1월 1일과 어떤 점에서 달라졌을까요? 우리가 맞을 내년 4월 16일은 어떤 점에서 작년과 달라졌을까요?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희망이 사실 그 변화와 차이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전과 이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깊이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시간을 부활 이전과 이후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하느님의 창조 사건이 어둠이라는 이전의 시간에서 빛이라는 이후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빛 속에서 살고 있는가? 이것이 여전히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안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세 분의 성인을 다시 돌아봅니다. 시간과 공간을 전혀 달리해서 살며 운명마저 전혀 달랐던 분들입니다. 오늘 12월 31일은 4세기의 로마 주교 실베스터 성인의 축일입니다. 오늘은 14세기 영국의 초기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 사제의 축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19세기 세계 성공회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 주교였던 사무엘 아자이 크로우더 주교의 축일입니다.

실베스터 주교는 4세기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그동안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의 칙령을 내린 이후에 공식적으로 교회를 이끌었던 첫 지도자였습니다. 박해와 순교로 점철되었던 그리스도교는 이제 자유를 얻었고, 황제마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갑작스럽게 황제의 보호라는 권력까지 얻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교회를 이끌던 실베스터 주교는 교회라는 거룩한 권력이 로마 제국이라는 세속의 권력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로마 교회를 다스렸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권력보다 더 크신 힘이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기준에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눈과 머리가 변하기 쉽습니다. 이후 서방 교회는 권력 탐하기에 앞장섰습니다. 주교는 순교하는 자리에서 군림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성직자는 섬기고 보살피는 자리를 떠나 지옥의 심판을 들먹이며 사람을 위협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와 평화의 사랑의 삶이 아니라, 두려움을 통한 맹신과 광신의 포로가 되었고, 종교 지도자들이 던져주는 축복이나 애걸하며 살았습니다.

14세기에 영국 교회에 나타난 존 위클리프는 이렇게 변해버린 교회를 통탄하며 일어섰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백성이어야 할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무지한 것을 보고 애석해 했습니다. 이러한 무지가 권력을 잡은 고위 성직자들의 계략인 것을 알았습니다. 위클리프는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할 일은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얻은 지식을 이용하여 언어를 모르는 사람의 입과 귀가 되는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실생활에서는 이미 죽은 언어가 된 라틴어 성경을 당시 사람들이 쓰던 평범한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제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번역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관한 지혜, 세상에 관한 지식을 번역하여 사람들이 편하게 읽고 이해하며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정한 장을 마련해야 합니다. 위클리프는 성경 번역과 지식의 나눔이야말로 권력의 남용과 오용을 넘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위클리프 성경’은 영국 교회가 얻은 놀라운 신앙 유산입니다.

바른 신앙의 길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는 “죄 없이 살해당한 어린이들”의 축일 미사를 마치고 이틀 후 오늘 과로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를 싫어했던 교회와 세상 권력은 그를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늘어나자 권력은 30년이 넘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고 화형하여 그 재를 길거리와 강에 흩뿌리는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가 번역한 성경과 그 유산은 죽은 지 30년인 넘어서도 여전히 권력에 위협이 되었던 탓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19세기와 아프리카 서부로 옮겨갑니다. 탈출한 흑인 노예 출신 사무엘 아자이 크로우더가 아프리카인으로서 세계 성공회 역사상 처음으로 주교가 되었습니다. 1864년의 일입니다. 백인 선교사들은 아프리카 종족 언어를 몰랐고 별로 배울 생각도 없었습니다. 풍토병에 선교사들이 쓰러지면서야 토착민을 선교사로 세우고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사무엘 크로우더 주교가 나왔습니다. 그는 최초의 아프리카인 주교로서 그의 사목에 열정적으로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백인 선교사들의 우월주의는 크로우더 주교를 늘 무시하고 하대했습니다. 그는 묵묵히 참아냈고 서 아프리카 지역에서 놀랄만한 교회의 성장을 일구어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주름잡던 백인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식민지에서 오히려 복음이 새롭게 피어났습니다. 그 복음이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새로운 힘으로 사람들과 함께 일어설지 크로우더 주교는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4세기 실베스터 교황 이후 1500년 만에, 크로우더 주교는 주교의 진정한 역할을 다시 살려냈는지도 모릅니다. 권력의 위세에 따른 작위적인 존경은 거들떠보지 않고, 온갖 무시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교회의 역할로 것 다시 살려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짜에 지상의 생을 마감했던 이들의 삶을 돌아보며 오늘 성서를 읽은 뜻이 새롭습니다. 한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해를 여는 시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서는 늘 전환의 시점에서 볼 때라야 더욱 또렷합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참된 지식을 지닌 사람’입니다. 참된 지식을 지닌 이들은 거짓에 기댄 권력과 그 위압을 비판하고 몰아내는 일을 자임해야 해야 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은 참된 지식을 지녔다고 할 수 없고, 세상의 마지막을 살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된 지식을 지닌 신앙인의 임무는 오늘 시편 기자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새 노래로 하느님을 노래하여라. 그는 정의로 세상을 재판하시며 진실로써 만백성을 다스리신다.” 여전히 진실이 감춰지고 정의가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세상을 내버려 두는 한 우리가 부를 새 노래는 없습니다. 찬송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 요한 복음사가는 우주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시를 읊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 처음에 빛이 있었습니다. ‘말씀’과 ‘빛’의 뜻은 여럿이지만, 굳이 ‘말씀’과 ‘빛’이라 부른 이유를 되새겨야 합니다. ‘말씀’은 대화와 소통입니다. ‘말씀’이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 사건은 이 우주적인 대화와 소통의 가장 깊고 완벽한 표현입니다. 대화와 소통은 마음을 닫아걸고 제압하려는 권력을 뚫어 여는 자유와 희망입니다. ‘빛’은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활동입니다. ‘빛’은 그늘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이 ‘말씀’과 ‘빛’이 그리스도 신앙과 실천의 핵심입니다.

한 해 동안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있어 고단한 한 해를 버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 시기를 걸어서 저는 복되었습니다. 이 고마움은 우리 모두 옆에 앉으신 분들과도 서로 나눠야 할 인사입니다. 이제 우리는 절망의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우리는 빛과 어둠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공간과 시간을 가르는 경계에 서 있습니다. 이전과 이후가 분명한 신앙의 삶을 우리는 다시 되새깁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내일은 참된 희망과 기쁨의 시간이길 빕니다. 묵은해의 절망과 슬픔을 딛고서, 그러나 잊지 않고 깊이 기억하면서, 새해에는 이 희망과 기쁨을 함께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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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lake, Elohim Creating Adam, 1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