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환대와 6.10 민주 항쟁

June 10th, 2014

2014년 6월 10일 화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신부

1열왕 17:7~16 / 시편 4 / 마태 5:13~1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은 6월 10일입니다. 27년 전 오늘 6월 10일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깨닫는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6.10 민주 항쟁” 혹은 “6.10 민주화 운동”이라 불리게 된 사건입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약 20일 동안 한국 사회 전역에서 진행된 민주화 시위를 일컫습니다. 27년 전 6월 10일은 수많은 사람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희생을 위에 세워진 역사였습니다. 1980년 광주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는 통제와 압제가 계속되었고 그에 따른 희생이 잇따랐습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숨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한 생명의 죽음을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 아닌 말로 덮으려 했습니다. 사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으나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었습니다. 박종철 씨가 고문으로 구타와 물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것이 의로운 몇 사람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드러났고,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열망에 불을 댕겼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군사 정권이 만든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이에 향한 반대 시위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와 함께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그리고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로 민주화의 외침을 쏟아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바로 전날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시위하던 연세대생 이한열 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6월 10일 명동 성당을 점거하고 독재 정치를 막을 내리는 싸움이 불길이 되어 올랐습니다. 이를 저지하고 억압하던 당시 정권은 결국 6월 29일 여당의 대표 노태우의 입으로 헌법 개정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를 다 써서 얻은 민주화 운동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며칠 후인 7월 5일 이한열 씨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서울 주교좌 성당 뜰 한쪽, 사제관 앞 나무 그늘에는 “유월 민주 항쟁 진원지”를 기리는 기념비가 수줍게 앉아 있습니다. 자기 업적을 내세우지 않는 이 수줍음과 27년 전 일어난 역사의 거대한 사건은 큰 대조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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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는 당시 경찰의 통제로 “국민대회’ 장소인 천주교 명동 성당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서울 주교좌 성당의 주임사제 고 박종기 신부님은 밖에서 서성이며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국민운동 본부’ 집행부를 사제관으로 안내합니다. 그리하여 서울주교좌성당과 사제관은 한국 민주화에 획을 긋는 유월 민주 항쟁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그 두렵도록 암울한 시대에 정의와 자유의 숨통이 트인 작은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이 대조에서 우리는 신앙의 사건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속에서 우연히 일어났던 작은 환대의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작고 수줍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자기 배 안에 아기를 품게 되리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마리아는 이 생명을 그 작은 몸에 받아들입니다. 수줍고 작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소식을 그 마음에 품어 환대의 공간을 열어주었을 때, 하느님께서 역사에 참여하시는 구원의 역사인 성육신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엘리야 예언자는 악한 왕 아합을 호되게 비판하고, 그와 그의 왕국에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 때문에 엘리야는 아합 왕의 탄압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렙다라는 작은 마을에도 숨어들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여인에게 음식을 청합니다. 그 가난한 여인은 아들 하나를 홀로 키우던 과부였고 겨우 한 끼가 될까 하는 식사를 아들과 나눈 뒤에 죽음을 기다릴 작정이었습니다. 여인은 그날 먹을 것 전부를 낯선 손님인 엘리야에게 내어 줍니다, 엘리야는 그 적은 음식을 다시 여인과 나누어 먹으며, 과부의 환대에 하느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마리아의 환대와 사렙다 과부의 환대는 결코 손익계산을 따진 접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평판과 효율성과도 한참 거리가 먼일이었습니다. 그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수줍고 겸손한 환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환대는 더욱 넉넉했고 더 큰 역사가 움텄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이 역사에 관여하는 성육신 사건이 일어났고, 엘리야 예언자는 선포와 사명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소금과 빛이 되는 일은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처지 그대로 낯선 이들과 나누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일과 낯선 이들에게 마음을 여는 일을 통해서 그저 그만그만한 우리 교회는 뜻밖에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됩니다.

이 환대를 주저하는 이유와 핑계와 염려가 우리 교회에는 많습니다. 낯선 사람과 주장을 불온하게 여기고 불편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염려와 자신의 편안함에 머문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낯선 이를 통해 주시는 뜻밖의 은총과 축복에서도 제외되고 맙니다. 작은 환대의 용기가 없이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도 그저 공허해질 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서 쓸모없이 밟히는 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다시 돌아봅니다. 27년 전 6월 10일 그 작은 환대의 자리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더 많은 희생을 감수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긴 고통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이 이 고통을 줄이는 일에 쓰임 받았으니 하느님께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 수줍은 환대의 신앙과 실천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이 세상을 향해 보여야 할 선교입니다.

이제 다시 물어야 합니다. 27년 전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난 세월에 자기 생각과 행동을 맡겨 변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지금 우리가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수줍은 환대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나요? 우리는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에게 마지막으로 대접한 작은 밀떡을 이 성찬의 식탁에서 나눌 수 있나요?

성령 강림 – 샬롬과 살림의 질서

June 8th, 2014

성령 강림 – 샬롬과 살림의 질서

주낙현 신부

성서는 하느님의 일이 내림과 올림의 형태로 반복되는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역사에 관여하시려고 인간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성육신 사건입니다.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셨다가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오르셨습니다. 부활 사건입니다. 그 부활의 연속선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끝에 오르셔서 참 인간이 얼마나 거룩하고 높은 존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승천 사건입니다.

이제 새로운 내림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역사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구원을 살아가는 신앙인 공동체인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그 삶이 인간의 역사 곳곳에 확대되는 삶을 보여줍니다.

http://ecva.org/exhibition/WaP/080-KathyBozzuti-Jones-WAP.htm

사도행전이 전하는 보도에 따르면, 성령이 내려오시자 출신과 성격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어떤 걸림돌도 없이 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출신과 지식과 언어에 대한 차별이 그쳤습니다.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 의식을 내다 버리고, 하느님의 구원이 ‘만민’에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남녀노소 어떤 차별 없이 각자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건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이를 서로 존중합니다. 말 못 하며 살아야 하던 ‘종’들도 ‘예언자’의 위치를 얻습니다. 세상의 질서가 바뀝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건네신 ‘샬롬’(평화)의 질서, ‘살림’의 문화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 속에 깃든 새로운 ‘샬롬’의 기운입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살림’의 숨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서로, 그리고 이웃과 나누는 호흡입니다.

성공회, 천주교, 개신교 같은 서방 교회는 성령이 불처럼 내린 것을 상상하며 ‘홍색’을 전례 색깔로 삼았습니다. 한편, 정교회 같은 동방 교회에서는 성령이 주시는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 ‘녹색’을 성령강림일의 전례 색깔로 삼았던 점이 흥미롭습니다. 연중 기간에 생명의 ‘녹색’을 사용하는 것은 이 관습을 되새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활밤에 새 불을 축복하며 열린 시간은 이제 하늘에 불처럼 내려오는 성령과 더불어 새로운 시간의 삶을 채웁니다. 그러니 성령강림일 이후의 삶은 성령으로 옛 질서를 불태우고, 성령 안에서 샬롬과 살림을 누리면서 그늘 진 곳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삶입니다.

고독한 종교, 하느님과 동행하는 신앙

June 2nd, 2014

2014년 6월 2일 월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주낙현 신부

사도 19:1~8 / 시편 68:1~6 / 요한 16:29~3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종교는 고독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홀로 맞이하는 인간의 고독은 모든 철학과 종교의 어머니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시작된 원천에 관하여 물으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만들었고, 자기 인생의 마지막 종점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 속에서 종교의 질문을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시작이 무엇이든, 그 마지막이 어떻든, 한 인간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 고독한 인간을 대하는 여러 종교의 태도와 대답은 저마다 다양합니다.

불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말합니다. 인간의 고독에 관한 뛰어난 통찰입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오로지 ‘나’만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때 ‘나’는 한 개인의 ‘나’가 아닙니다. 내가 있어 우주가 있고, 모든 우주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과 우주 전체가 바로 ‘나’인 것을 깨달으라고 초대합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앞에 홀로 선 인간을 말합니다. 절대 초월인 하느님과 완전히 동떨어진 인간을 부르신 하느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과 계명에 따라 사는 일이 인간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길 앞에 먼저 하느님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절대 복종하여 주어진 길을 따르면 만사형통하리라는 믿음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이 고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까요? 불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대체로 ‘정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고독 그 자체를 깊이 파고 들어간다면, 그리스도교는 애초부터 ‘동적’이고 관계적인 면이 강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 삶에 ‘관여’하고, 우리 생각에 ‘도전’하고,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우리 삶 속에서 ‘만나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우리와 ‘동행’하는 하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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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는 고독의 그림자가 짙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결국에는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일은 아닙니다. 그 고난의 세상을 예수님께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아시는 예수님,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동행’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동행하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고독할 때 찾아오시는 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안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자리는 좁기만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하느님 없이 적당히 살다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 배신을 당할 때, 사람은 쉬이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때 우리는 대부분 허기진 배를 채우듯이, 지금까지 차 있었던 공간을 그 모양 그대로 채울 대체물을 찾습니다. 종교의 신이 그런 대체물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 대체물로 찾는 신은 지금까지 자신을 채웠던 어떤 것이지, 참 하느님은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하느님의 자리는 좁아졌기에 크신 하느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내 필요에 따라, 내 상황에 따라 찾았다가 다시 버리는 신은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내 모든 생활을 만족스럽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이 생활하게 된 것만도 천만다행이라며 고맙다고 기도드리는 신은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아니, 다른 종교의 신은 될지언정, 예수님께서 몸소 모시고 가르치시며 사셨던 하느님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가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못났다면 못난 대로, 실패했다면 실패한 대로, 기뻐한다면 기뻐하는 대로, 행복하다면 행복한 대로, 우리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우리 숨을 드나드는 호흡처럼, 우리 몸에 흐르는 피처럼 그렇게 우리와 동행하는 하느님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는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과 동행하려고 고독해지려는 종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따돌림당하는 종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외치고 몸소 실현하려다가 오해를 받고 욕을 먹고 비난받는 종교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위해 따지고 밝히고 선포하다가 문제아라고 손가락질받는 종교입니다. 이렇게 따돌림당하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당하며 박해받는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한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바로 그 고독 속에서라야, 나 자신이 텅 비어 있을 때라야, 동행하시는 하느님 전체가 내 삶 전체와 동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느님의 진실을 외치다가,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다가 오해받고, 욕먹고 따돌림받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런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 행복의 기준’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독한 이들을 다독이고, 그 안에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서로 발견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라야 하느님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모신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한 이들이 서로 격려하고 격려받는 공동체를 통해서라야, 세상에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나라가 그 숨을 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스며들며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작을 수도 있습니다. 이 교회를 이루는 사람은 소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고독할 때라야,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알고, 정의롭게 고독한 다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독할 때라야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진정 이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정의를 위해 일하며 고독해져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며 고독해져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일하며 고독해져야 합니다.

그 고독 속에서, 세상을 이기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