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기도 5 – 캐나다 성공회 기도서

September 5th, 2012

일본에서 더듬거리는 우리말로 전화가 걸려왔다. 오래 사귀며 우정을 나누었던 고토 신부님이었다. 오랜 만에 듣는 목소리와 안부에 반가왔고, 암으로 투병했던 사모님의 건강한 목소리까지 들으니 울컥하도록 기뻤다.

안부에 이은 부탁이 있었다. 일본 성공회 중부 교구 선교 100주년 기념 미사가 있을 예정이란다. 중부 교구는 캐나다 성공회가 선교했으므로, 그 노고를 기념하기 위하여 캐나다 성공회 기도서 성찬례를 이용하기로 했단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실 터이니, 성찬기도 부분만 우리말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기도서를 들춰 여러 번 고쳐 읽고, 잠시 허튼 번역을 일삼았다. 다른 성공회 관구의 성찬 기도를 나누려고 여기에도 졸역을 옮긴다.

캐나다 성공회 대안 예식서

The Book of Alternative Services of the Anglican Church of Canada

성찬기도 5 Eucharistic Prayer 5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

마음을 드높이
주님을 향하여 (주님께 올립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경이로운 세상을 선물로 주셨고
우리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나왔으며
또한 주님의 능력으로 온 우주를 지키시오니
우리가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나이다.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어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도록 하셨으며,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도록 하셨으나,
우리는 나쁜 행실로 주님을 거역하였나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 세상을 고치시고
우리를 모아 한 가족이 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땅과 하늘에서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이들과 함께
주님의 놀라운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하나이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에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

주님의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려 주셨으니,
우리가 사랑이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나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배고픈 사람들을 돌보시며
아픈 사람들과 쫓겨난 사람들과 함께 고통 당하십니다.
배신 당하고 버림 받으셨으나, 우리에게 되갚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셨나이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들을 일으키시어
우리에게 주님 사랑의 힘을 보여 주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나이다.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기 전날 밤,
예수께서는 벗들과 나누는 만찬에서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떼어, 벗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드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해 주는 내 몸입니다.”

식사를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잔을 드시고,
축복하시며 벗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여러분은 이 잔을 받아 드십시오.
이것은 내 피의 잔,
여러분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았으니,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은혜로우신 하느님,
이 빵과 포도주로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축하하며
예수 안에 계시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나이다.
주님의 성령을 우리와 이 예물 위에 보내시어
이 빵을 떼며, 주님 자녀로 모인 우리가 이 생명을 나눌 때에
예수의 현존을 깨닫게 하소서.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하느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의 종으로 불러 주셨으니
예수의 용기와 사랑을 우리 안에 채워 주시어
온 세상이 주님 나라의 식탁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전능하신 아버지를 영원토록 찬미하나이다.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번역: 주낙현 신부)

위계, 민주주의, 깨어있는 영성

September 5th, 2012

(거의 세기말에나 있을 법한 행태가 우리 교회 어느 구석에서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이나 속이 쓰렸다. 바다 건너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려 하나,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이 블로그 제목이 ‘성공회 이야기’이니 속 쓰리더라도 그 치부에서 나온 몇 생각을 트위터에서 옮겨 놓아야겠다.)

교회의 ‘위계’ 전통, 특히 성직의 위계는 기본적으로 사목적 보살핌과 하느님의 선교를 위한 가치에 종속된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이 처한 사회의 맥락에 휘둘려 그 사회의 억압적 위계 문화를 자신의 위계질서에 그대로 적용하여 오용하곤 했다.

위계질서 자체가 봉건적인 것은 아니다. 봉건사회의 주종 관계 행태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탓에 위계 질서를 그렇게 오해하고 남용한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는 이런 오용이 설 자리가 없고, 오히려 ‘보살핌’을 위한 위계를 회복할 기회일 테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각종 위계, 특히 교회 내의 위계가 ‘봉건적 행태’를 답습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교회가 시대착오적 행태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이런 교회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우리 사회에는 적어도 ‘군사문화’가 심은 두려움과 어쩔 수 없이 습득한 ‘군대문화’의 일상적 폭력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이 어둠은 무의식에 내려앉아 두려움과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바로 참된 영성의 적이다.

이 어두운 무의식의 극복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과제인 한편, 종교가 대안적 가치 공동체로서 존재할 이유가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종교가 가장 못된 힘 부림을 일상화하는 일이 잦다. 특히 성직 사회에서.

이런 곳에 자유와 해방의 복음이 있을 리 없다. 이에 저항하는 이들은 반골, 혹은 현실 부적응자로 찍혀 치도곤당하기 일쑤다. 이 치도곤은 ‘도통’한 자들의 지혜로운 조언이라는 당의정을 입곤 한다. 이 정도면 ‘자신에게 깨어있는 영성’은 없는 것.

현실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관계는 모두 ‘권력관계’이다. 이 권력관계에 종속된 현실을 비판하고 넘어서려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더는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고 하셨다. 자신의 권력을 되돌아볼 줄 아는 것이 신앙과 영성의 시작이다.

이것이 ‘자신에게 깨어있는 영성’이며, 우정의 영성이다. 자신의 권력을 깨어 살피는 신앙과 영성에서 바로 권력이 아닌, 권위가 나온다. 이것이 아닐 때, 종교인들은 ‘도통한 척’하는 권위주의자, 관료주의자이기 일쑤다.

반도의 달 – R.S. 토마스

May 15th, 2012

루인 반도의 달 The Moon in Lleyn1

R. S. 토마스

마지막 그믐달
예수의 달은
어둠 속에 묻히니, 뱀이
그 알을 먹어치우네. 여기
나는 무릎을 꿇고, 돌로 지은
성당 안은 오직
그늘이라는 침묵의 신자들과 바다의
소리로만 가득하니, 예이츠가
옳았다고 믿기는 쉬운 것. 마치
성가대는 노래하지 않고, 조개들이
그들을 삼킨 것처럼 썰물이 찰싹거리며
성서를 쓸어가고, 교회의 종소리는
그 누구도 연약한 기적의
빵으로 불러오지 못하네. 모래알은
다시 굴러 들어와 벽에 있는 금색의
유리잔에 들기를 기다리니. 종교는 끝난 것, 그리고
초승달의 그 몸에서 무엇이 나오리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네.

그러나 한 소리가 있어
내 귀에 울리니, 왜 그리 빨리 단정하는가,
죽을 목숨아. 바로 이 바다들이
세례를 받았느니. 이 교회는
시간도 파멸시킬 수 없는
성인의 이름을 가졌느니. 도시들에서
자신의 약속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다시 순례자가 되느니,
이곳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영에 따라
새 기운을 찾느니.
그대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하리. 이 달이
지상의 가로막는 그늘을 뚫고 길을 내듯이,
기도도
그 흐르는 단계가 있으니.

(1974)

RSThomas_Moon.JPG

  1. 역자 주 – 루인 반도: 웨일스 북서쪽 반도로, 고대 순례길의 하나였으나 지리적으로 고립되었으나 최근에 다시 휴양지로 유명해진 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