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종교와 영성이 충돌할 때

April 18th, 2012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10년을 돌아보는 글에서 적은 바 있거니와, 그분의 놀라운 영성과 지성이 세계 성공회 안에서 일어난 갈등을 극복하려던 대주교직 수행과 빗나갔던 사실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아쉬움과 낭패감의 원인은 여럿이겠지만, 나는 그분이 평소에 주장하던 예언자적이고 복음적인 삶에 대한 초월적 영성이, 제도의 일치라는 오래된 관념과 관습에 짓눌린 탓이라고 보았다. 게다가 세계 성공회의 식민적 유산과 그 역사에 대한 세심한 식별과 분석을 간과한 점도 지적했다.

미국 성공회의 신학자이자, 미국 종교 및 교회 현상을 연구하는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lter Bass)의 글을 소개한다. (한국에서 강연했을 때, 이분을 몇 번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시는지들 모르겠다.). 내 생각과는 약간 다르지만, 현재 서구 사회의 종교 현상의 큰 흐름으로 지목되는 “Not Religious, But Spiritual”(‘제도적인 종교인이기를 거부하고, 영성을 추구한다’)의 맥락에서 살피는 의견과 그 전개가 매우 설득력 있다.

배스는 세계 성공회의 갈등과 분열을 동성애 문제로 벌어진 교회 내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서구 사회에 흐르는 매우 중요한 긴장, 즉 종교와 영성의 긴장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장 리더십에 대한 옛 이해와 새로운 이해의 갈등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시대적 요구에서 나온 것이라 이해하더라도, 이제 그마저 제각기 자기 권력을 탐하는 틀이 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문제는 닫힘과 열림이다.

한편, 배스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 지도자에 대한 기대는 분명했다. 주교는 평신도를 지도하면서, 복종과 희생과 영웅적 신앙 행동을 촉구했다. 주교는 위에서 아래로 신앙을 명령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혀 다르다.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제도적 기관들은 두 패로 나뉘어 갈등한다. 한쪽에는 예로부터 익숙하고 검증된 리더십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통제, 획일성과 관료제가 그 특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는 검증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고 그 미래를 향한 약속을 열어주는 리더십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풀뿌리의 권한, 다양성, 관계적인 네트워크가 그 특징이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분열이 아니다. 오히려 제도와 영의 분열이다.

하향식 구조는 저물고 있다. 성공회가 겪은 갈등을 보면, 영적인 리더십과 제도적인 리더십이 분명히 구분된다. 영적인 리더십, 그 새로운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기대는 기존의 관습적인 주교의 역할과는 구별되고 갈등한다.

배스는 이 문제를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에게서도 발견한다. 그는 분명히 탁월한 영성가요 신학자이다. 대주교로서 그는 세계 성공회의 “영적인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는 성공회라는 종교 기업의 CEO로 행동하며, 사업 중심, 이익 중심, 자산 유지, 새로운 시장 개척에 관심을 두었다. 이것은 생동감 있는 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관료적인 기업체 문화이다.

배스는 영성과 제도의 갈등과 그 변화를 관찰한다.

역사의 시간 속에서 신앙은 늘 하향적이었다. 영적인 힘은 교황이나 대주교가 신자들에게 내려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제가 경건한 신자들에게, 목사가 교회 회중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변했다. 사람들은 영성은 하느님을 찾는 풀뿌리 모험이며, 진정성을 담은 통찰과 영감의 여정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제도적인 교회나 회당, 사원에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성은 아래부터의 신앙을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신학과 관습에 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두려운 나머지, 세계 성공회를 포함한 많은 제도적 종교들은 이를 명령과 통제로 고치려 한다. 그리고 그 조직을 더욱 위계적인 권위주의로 몰아가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섬기는 열망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이러면 제도적 종교는 더더욱 어려워지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더 나은, 더 정의로운, 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큰데도, 교회라는 제도, 국가, 경제가 이런 열망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영성과 제도에 놓인 틈이 문제다. 이 틈을 메꾸고 그 제도적 기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새롭게 등장하는 문화 경제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사실 영적 쇄신은 곳곳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기존 교회와 기존 신자들이 관습에 사로잡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그동안에 제도로서 종교와 교회는 죽어간다.

이 시대에, 영적 쇄신은 벗들과 신뢰를 나누고 서로 배우는 대화 속에서 일어난다. 새로운 일은 거리에서 커피숍에서, 지역의 작은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정의와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에서 일어난다.

이런 평가와 전언은 세계 성공회와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를 향한 것만은 아니다. 바로 우리 교단, 우리 교회, 그리고 성직자인 나 자신을 향한 것이다.

한편, 풀뿌리 영성에 대한 배스의 낙관을 그대로 우리 교회와 사회에 적용하기를 나는 주저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영성에 대한 관심은 실제로는 개인주의에 들러붙은 영성주의(spritiualism)의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위적인 제도만큼이나 복음적 가치를 해친다. 게다가 풀뿌리의 주인공인 신자들도 여러모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정말로 깊고 풍성한 풀뿌리 영성을 키워내지 않고 또 다른 관습적 신앙 체험을 무기 삼아 섣불리 권위를 부리지는 않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 안에 또아리 튼 관료주의와 권위주의, 관습주의, 세대주의도 교회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만연한 현상이다.

이는 변화의 기로에 서서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 모든 사회와 교회가 씨름해야 할 문제이다. 수구의 탐욕이 새로운 시대를 열리도 만무하지만, 진보연하는 수사와 이미지 뒤에 여전히 만연한 관료주의와 타성으로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떼제로 향하는 젊은 벗들에게

April 16th, 2012

이 나이 되도록 프랑스 떼제 공동체에 가보지 못했지만, 지난 25여년 동안, 떼제는 내 신앙의 동경이요, 기도 생활의 모본이요, 신앙의 벗들, 그리고 가족과 나누는 기도의 못자리였다. 10대 말에 책으로 접했던 떼제 이야기와 떼제 성가, 그리고 다양한 떼제 기도 경험, 한국 화곡동 떼제 공동체 기도 체험, 그리고 성가수녀원에서 한동안 지속했던 떼제 기도 모임, 미국에서 가족과 종종 찾던 머시 센터의 떼제 기도 모임.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걱정할 때, 떼제에는 세계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그곳의 불편한 삶을 감수하고, 그 젊음의 생명과 서로 나누는 우정을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이해하며 함께 모여 기도한다. 이런 ‘봄의 새순’ 같은 기도가 교회의 생수이겠건만, 10년 전에 성공회 신문에 이를 다시 소개하고, 실제로 여러 모양으로 시도했건만, 여전히 우리 교회에 자리 잡지 못한다. 아마도 성과를 빨리 바라는 조급증 때문일 테다. 다른 이들에게서 그윽하게 빛나는 거룩한 얼굴을 인정하지 못하는 질시 때문일 성도 싶다. 푸릇하고 젊은 가슴 안에 심어야 할 깊은 기억이 여러 이유와 모양으로 짓눌리는 시절 탓일 테다.

이제는 내 아들과 딸과 더불어 언제나 한번 가볼까 궁리할 뿐인 터에, 떼제를 향하는 젊은이들, 떼제 순례 중인 이들을 향해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이 건네의 우정의 인사를 옮긴다.

내가 십대였을 때 처음 떼제에 갔습니다. 그 첫 기억은 텐트에 퍼붓듯 쏟아지는 비였죠. 무서웠어요. 여러분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기를 정말로 바랍니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이나, 새로운 일이 생기는 순간에 그것도 꼭 나쁜 신고식이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왜냐면 내 두 번째 경험 때문인데요. 떼제에서는 그런 일 때문에 친구 사귀는 일이 정말 쉬워진다는 것을 경험했거든요. 사람들이 그냥 와서 자신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주 다른 배경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다른 나라와 다는 문화에서 온 사람들은 여러분이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말이에요. 그리고 함께 있다는 걸로 서로 기뻐할 겁니다. 떼제 경험의 중요한 부분은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문화들, 새로운 경험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에는 친구가 될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세 번째 경험은 어떤 점에서 가장 깊이 기억에 남는 것인데, 바로 성당 안에서 가진 침묵의 시간입니다. 떼제의 본당, 전체 공동체 교회 안이었죠. 작은 마을 성당에서 경험한 침묵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지만 역사적인 성당이고 때로는 정교회 전례를 거행하기도 합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촛불과 함께하는 깊은 침묵, 하느님과 함께 머물려고 시간을 내어놓는 사람들. 내 생각에, 떼제에 있으면서 가장 어렵기도 하고 가장 흥미로운 경험은 속도를 늦추고 느리게 사는 것을 배우는 일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모든 것들이 빛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죠. 말들과 사진들과 촛불의 은은한 빛, 그리고 다른 사람들 얼굴에서 빛나는 은은함으로 서서히 다가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정적을 배우고,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픈 바를 말씀하시도록 내어 놓는 것을 배웁니다. 어떤 좋은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 늘 바쁘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죠. 여러분이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떼제 경험이 여러분 인생에 깊은 기억으로 남길 바랍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방문해서 가지게 된 기억처럼 말이죠. 그 경험이 친구를 사귀고, 하느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모든 것을 느리게 하는 시간, 여러분 자신을 위한 시간, 기도와 사랑이 비추는 은은한 빛 속에 흠뻑 젖는 시간이길 빕니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성 토요일: 무덤의 침묵

April 6th, 2012

성삼일(Holy Triduum)과 그 전례적 의미에 관한 글을 작년에 서울 교구 성직자들과 나눴다. 그 글을 이룬 파편들은 이미 이 블로그 여기저기에 있으니, 이곳에 적지 않은 성 토요일에 관한 부분만 따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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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요일은 성 금요일이 보여주는 부재와 결핍이 가장 고조된 날이다. 십자가 처형 후 예수님의 시신은 내려져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치되었다. 그 무덤은 어둡고 차가운 곳이다. 그 무덤은 단단하게 막혀서 어떤 생명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부재와 침묵의 그늘이 지배하는 곳이다. 십자가 처형 이후로 정지된 시간의 연속이다. 다만,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피어오를 희망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서 무덤에 찾아가려 했던 여인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부재와 결핍에 따른 침묵은 우리 인간의 몫일 뿐이다. 성서(1베드 3:19)와 전통(사도신경)은 성 토요일에도 예수님께서 그 구원의 사건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지하 세계에서도 펼치셨노라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부재와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구원의 위업을 멈추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되찾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를 위해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이해를 통해서라야 우리는 정교회 이콘 전통이 보여주는 부활의 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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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이콘 – 음간(하데스)에서 아담과 하와를 이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