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위한 성령의 공동체 – 경동교회 교환예배

Sunday, June 7th, 2015

창세 3:8~15 / 시편 130 / 2고린 4:13~5:1 / 마르 3:20~35

2015년 6월 7일 (성삼후 첫주일, 연중 10주일)
한국 기독교 장로회 경동교회 (교환예배) (성찬례 및 강론 동영상)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무엇보다 먼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의 모든 교우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안에서 함께 형제자매 된 기쁨으로, 경동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문안의 인사를 드립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처럼 말씀과 성사의 잔칫상을 함께 나누게 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저 자신은 사적으로 기독교 장로회에 깊고도 고마운 은혜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아직 철없던 시절, 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방황할 때, 저는 기독교 장로회의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을 통해서 성서와 복음에 관해 새로운 시선을 발견했고, 새로운 교회의 행동과 희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겨우 눈뜬 앳된 시선으로 여전히 어리둥절할 때, 꿈과 희망에만 사로잡혀 좌충우돌할 때에도 바른 신앙인의 길과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때로는 단호하게, 그러나 언제나 너그러운 인내로 저를 단련시키고 안내해준 어른들과 공동체도 바로 기독교 장로회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장 교단의 목회자와 신자로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들고 애쓰는 여러 지인과 친구들이 제 눈앞에 환하게 스쳐 지나갑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 어린 시절에 영향을 주신 세 분의 이름과 공동체를 여러분에게 꼭 밝히고 싶습니다. 안병무 박사님과 문익환 목사님, 그리고 경기도 구리시의 기장 구민교회와 김거성 목사님입니다.

잠시만 돌아보아도, 우리는 이처럼 서로 돕고 보살피며, 서로 도전하고 배우는 은혜와 은총 가운데 걸어왔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저희 서울 주교좌 성당과 여러분 경동교회는 서로 다른 전통과 경험을 들고,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모였습니다. 그분이 마련하신 부활의 잔칫상에서 먹고 마시며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깊이 생각하며 서로 먹이며 풍요로워졌습니다. 그 풍요로운 기쁨이 컸기에, 오히려 세상의 궁핍과 가난함, 갈등과 분열을 도드라졌고, 우리는 함께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 삶과 사회가 피폐해가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운 생명과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살펴보며, 우리의 다짐, 우리의 실천을 되짚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를 신비로운 ‘영적인 세계’의 비밀에 관한 가르침과 깨달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 비밀을 앞세워 사람을 현혹하는 일들이 종교계에서는 자주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과 경험은 이러한 통념과 사뭇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신앙의 핵심주제가 선명하고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창조 세계의 관계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루는 핵심 주제이자 내용입니다. 이 관계가 부서진 상태가 ‘죄’이며 ‘타락’이라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고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 삶 속에서 깨지고 뒤틀린 온갖 관계를 처음 창조 때로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라야, 종교이든 신앙이든 ‘악령’과 ‘성령’을 식별하는 잣대가 서고, ’성령’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명백해집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 인간의 죄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어서 생긴 일 자체만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사유화할 수 없는 공동의 나무를 훼손하거나 독점하는 잘못을 인간이 저지르기는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선들바람’ 부는 동산에서 인간과 함께 거닐고 싶으셨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며 아담을 찾으시는 하느님은 추궁하려는 소환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바람은 인간을 여전히 초대하여 함께 대화하며 산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초대를 거절합니다. 아담은 함께 가까이 사귀어야 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멀리 숨습니다. 하느님의 물음에 아담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에게 잘못을 덮어씌웁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며 감탄하며 여태껏 사랑하던 ‘여자’ 하와를 아담은 이제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이 핑계와 비난의 사슬은 이제 잘 보살피라고 맡겨놓은 피조물을 저주하는 일로 번집니다. 이 일로 함께 사귀며 나누던 관계, 의지하고 서로 도우며 서로 사랑하던 관계가 깨집니다. 이것이 바로 ‘죄’이고 ‘타락’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비난과 분열의 영이 만들어 내는 ‘죄’와 싸우는 일로 점철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싸우는 방식은 죄와 타락의 본질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 대안으로 ‘갈라지고 찢어진 상처를 보듬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두 일은 전혀 다른 ‘영’의 활동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을 무고하고 혐의를 덧씌우는 주장을 예수님께서 사탄의 비유를 들어 논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악령인 사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동료 인간을 향한 험담과 창조세계를 부수는 행동은 악령인 ‘사탄’의 짓입니다. 한국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염려하는 모든 사람은 이 험담과 파괴의 행동을 누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동족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서로 죽이고 죽임당한 한국전쟁은 어떤 영적인 힘이 만들었는지 바로 보아야 합니다. 65년간 서로 갈라져서 적대하는 이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깊이 성찰하고 물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국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라 자처하는 교회들이 보여준 상호 비난과 정죄, 분열과 갈등은 창조의 세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과 정말 관련이 있는 것인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식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혐의를 씌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차별받던 사람을 초대하여 사귀는 일을 펼치시자,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자신들과는 다른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며, 자신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꿈꾸고, 자신들과는 다른 모양으로 사랑과 삶을 일구어 가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멋대로 세운 기준과 울타리가 아니면, 모두 적이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대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이음새 없이 통짜로 만드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창조운 세계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고 분열시키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이는 이간질은 악령의 졸개나 하는 행동이니, 이를 제대로 묶어서 제압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서든, 교회에서든,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든 이 분열의 악령을 단단히 제압하고 몰아내야 합니다.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로 분열된 마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신앙체험과 교리만이 옳다고 우기며 분열하는 교회는 상처 입고 위로받으려 신앙을 찾은 사람을 속이며 생각과 태도를 완고하게 합니다. 세상의 생명을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회와 권력은 자기 안위와 안녕만 생각하고 타인을 거들떠 보지 않는 욕심 가득한 세상, 부패한 세상을 만듭니다. 생명을 초라하게 하고, 완고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는 모든 일은 ‘성령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신앙인과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성령을 모시고 이 죄에 단호하게 맞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낡은 것을 새롭게 변화하는 힘, 시들어가는 생명에 주시는 새 기운, 흩어진 것을 모아 하나로 세우시는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경동교회는 개신교의 깊은 말씀 전통에 터 잡아 성서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예언자의 삶을 증언하였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는 권력에 저항하며, 새로운 생명의 공간, 자유의 공간을 이 자리에 마련하였습니다. 힘없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을 이곳에, 여러분 마음에 깊이 초대하여 보호하고 함께 위로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 하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서울 주교좌 성당은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신앙하는 깊고 풍요로운 방식을 지켜왔습니다. 사회의 변화와 유행에 휘청거리는 번영의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보듬고 느리게 살며, 하느님의 세계를 우리 몸의 모든 감각으로 창조세계를 느끼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바쁜 삶에서 멈추고 하느님의 품을 닮은 아름다운 공간에 들어와 쉬도록 함께 초대하고, 빵과 잔을 나누며 우리가 모두 하나인 것을 확인하며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경동교회와 서울 주교좌 성당은 함께 세상에서 휘젓고 다니는 분열의 영, 반(反)생명의 ‘영’에 저항하고 상처 입은 세계를 껴안아 먹이며 살았습니다. 이 경험만이 갈라진 교회들이 다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생명의 성령에 사로잡힌 우리는 이제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세계에서 서로 초대하여 함께 거니는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며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의 아픔과 분열을 싸매고 고치는 일로 연대해야 합니다.

이 앞에 마련된 부활의 식사, 새로운 생명의 식탁에,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친교와 협력의 관계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새로운 형제자매’의 공동체입니다. 이 나눔의 공동체가 서로 먹이고 키우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어머니’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한 분 하느님,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와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는 삼위일체의 공동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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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삶 –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

Sunday, June 7th, 2015

성령의 삶 –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 (마르 3:20~25)1

종교는 신비로운 ‘영적인 세계’에 관한 가르침과 깨달음을 다룬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통념과 거리가 멉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창조 세계의 관계가 우리 신앙의 핵심 주제이자 내용입니다. 이 관계가 부서진 상태를 ‘죄’이자 ‘타락’이라고 그리스도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 삶 속에서 깨지고 뒤틀린 온갖 관계를 원래대로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라야 ‘악령’과 ‘성령’을 식별하는 잣대가 서고, ’성령’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명백해집니다.

인간의 죄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 먹어서 생긴 일 자체로 보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선들바람’ 부는 동산에서 인간과 함께 거닐고 싶으셨습니다(창세 3:8~15). ‘너 어디 있느냐?’ 며 아담을 찾으시는 하느님의 바람은 인간을 초대하여 함께 대화하며 산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초대를 거절합니다. 하느님의 추궁에 아담은 여태껏 사랑한 ‘여자’에게 잘못을 덮어씌웁니다. 함께 가까이 사귀어야 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내 뼈에서 나온 뼈’라고 기뻐하던 사람을 비난하고, 잘 보살피라고 맡겨놓은 피조물을 저주하는 일이 바로 ‘죄’이고 ‘타락’입니다.

동료 인간을 향한 험담과 창조세계를 부수는 행동은 악령인 ‘사탄’의 짓입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차별받던 사람을 초대하여 사귀는 일을 펼치시자,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이는 이간질은 악령의 졸개나 하는 행동이니, 이를 제대로 묶어서 제압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든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이 분열의 영을 몰아내야 합니다.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분열된 마음, 자신의 신앙체험과 교리만이 옳다고 우기며 분열하는 교회, 세상의 생명을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회는 ‘성령을 모독하며 큰 죄’를 짓습니다. 신앙인과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성령을 모시고 이 죄에 단호하게 맞서야 합니다. 우리는 낡은 것을 새롭게 변화하는 힘, 시들어가는 생명에 주시는 새 기운, 흩어진 것을 모아 하나로 세우시는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분열의 악령이 아닌, 생명의 성령에 사로잡힌 우리는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의 삶을 삽니다. 하느님의 창조세계에서 서로 초대하여 함께 거니는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며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의 아픔과 분열을 치유하는 일에서 연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며 초대하시는 이 사귐과 협력의 관계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요, 어머니’가 이루는 성령의 삶, 성령의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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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6월 7일 연중10주일 주보(↩)

일치와 진리 – 예수의 고별 기도와 성 알퀸

Wednesday, May 20th, 2015

부활 7주간(승천후주일) 수요일 & 성 알퀸 축일

사도 20:28~38 / 시편 68:28~29, 32~35 / 요한 17:11~19
2015년 5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본기도 – 요크의 알퀸 (Alcuin of York)

전능하신 하느님, 교만하여 무지한 시대에 주님의 종 알퀸 부제를 세우시어, 배움의 불꽃을 다시 붙여 주셨나이다. 비오니, 이 시대 속에서 흔들이며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어, 주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늘 이별을 합니다. 함께 자랐던 동무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도 하고, 부대끼며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자녀를 지방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지방으로 유학을 보내느라 떠나보내기도 하며, 군대를 보내느라, 시집 보내느라 잠시 작별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생의 큰 작별을 해야 합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자녀를 잃는 충격에 휩싸이기도 하며, 삶의 동반자였던 배우자를 잃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별의 목격자였던 자신이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합니다.

이러한 이별과 작별의 순간에는 늘 마음 절절한 부탁이 있습니다. 유언으로 마지막 당부를 하기도 하고, 묘비명을 새겨서라도 깊은 부탁을 남기기도 합니다. 남은 사람은 그 당부를 마음 깊이 새깁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의 이별 장면이 눈물겹습니다. 다시 보리라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기에 그들은 서로 목을 끌어안고 울며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었습니다. 이 작별의 순간에 사도 바울로 성인은 절절한 부탁을 유언처럼 남깁니다. 바울로 성인은 신자들과 교회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합니다. 성인께서 그들에게 주었던 가르침을 잊지 말고 되새기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성서 본문에서 발견하는 당황스러운 경고는 교회를 해치는 사람이 밖에서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나오니 특별히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정체는 분명합니다. “진리를 그르치는 말을 하며 신도들을 이탈시켜 자기를 따르라”고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해치는 일은 진리에 관한 그릇된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과 고별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가 눈물겹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눈물 어린 당부와 예수님의 고별 기도는 너무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탈하거나 흩어지지 않고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하나 되어 진리를 지키는 일이 바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며, 교회가 할 일입니다. 하나 되어 진리를 지키는 일이 예수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길입니다.

교회는 일치와 진리로 예수님의 기쁨을 넘치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오늘 성서 본문에서는 우리 삶과 우리 교회의 기쁨은 두 가지 길에 있습니다. 우리는 흩어지지 않고, 이탈하지 않고, 서로 하나가 되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제대로 배우고 지키며 물려주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교회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애쓰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에 지문이 같은 사람이 없듯이, 우리는 저마다 성격과 견해와 생활 방식이 다릅니다. 자라난 환경과 교육과 경험이 달라서 다른 우리를 더욱 다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명한 현실 속에서 ‘하나가 되어 일치’하라는 말씀은 허무맹랑한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신앙인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공동의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십니다. 설령 우리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가 깨졌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지고 멀어진 관계에 새로운 다리가 놓였습니다. 그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십자가 나무 그늘 아래서 우리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그늘 밖 땡볕 아래서 경쟁하면서 서로 할퀴는 관계를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목격했듯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관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경험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라고들 합니다. 늘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떠도는 그 말이, 누구를 흠집 내거나, 누구를 흔들거나, 누구를 질시하거나 비방하는 말일 때, 그 말 자체는 그 교회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요한 복음서가 늘 경계하는 ‘세상’입니다. 그곳은 생명의 영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 악령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이 악령은 삶의 여러 관계에 탈을 내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분란을 만들어 냅니다.

어떤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비방하는 말을 자기 입에 담아 퍼뜨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말 많고 탈 많은 동네를 만듭니다. 이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일 뿐입니다. 서로 하나 되어 일치하는 교회가 되려면, 이런 악령의 꾀임과 행동을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서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는 진리를 제대로 배우고 대화하여 교정하고 물려주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진리를 단박에 깨닫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리를 한 손에 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다른 여느 종교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생각에 마음을 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진리는 부단히 배우며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여러 다른 사람의 신앙에 담긴 작은 진리의 파편을 존중하며 자신이 지닌 진리의 파편과 맞춰갑니다. 마치 수천수만 개로 이뤄진 직소퍼즐의 그림을 둘러 모여 맞춰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진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걸으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행하면서 우리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그 동행의 길에서 익힌 신앙과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 더 큰 그림, 더 완벽한 그림을 만들도록 자신을 내어주고 기여하는 일이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의 바른 태도이고 행동입니다.

오늘은 8세기 영국 출신의 부제이자 수도자, 시인, 교회학자였던 알퀸(Alcuin of York) 성인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력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알퀸은 8세기 서방 교회가 신앙을 지식과 지혜의 전통 위에 다시 세우며 세상을 새롭게 이끌어 나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성인이었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 닮았는지 모르겠으나, 교만과 무지도 비슷한 관계입니다. 교만하면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조금 배웠다는 사람도 교만에 빠지면 배우기를 멈추거나 알량한 자기 생각에 고착되고 맙니다. 한편, 배우지 텅 빈 사람은 권위를 내세울 근거가 부족한 탓에 교만을 부립니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려는 행동입니다.

알퀸은 교회가 교만과 무지로 고통받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샤를마뉴 황제가 서 로마 제국 패망 이후 분열되었던 유럽을 신성 로마 제국으로 통일하던 때였습니다. 교만의 대결이 만들었던 정치의 오랜 분열을 마감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교부의 전통이 분열과 무지로 부서진 상태에서 신앙을 다시 세우려는 때였습니다. 샤를마뉴 황제는 변방 영국의 학자로 알려진 알퀸을 불러, 무너진 신학과 문학, 그리고 과학의 체계를 다시 세우게 했습니다. 그는 학교를 세워서 유럽 최초로 인문학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문법과 수사학, 대화법을 가르쳤습니다. 지금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문장에 물음표를 처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수와 기하학을 정리하여 교과서를 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은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는 신학자요, 문학가이기도 했습니다.

진리를 향한 다양한 배움과 방법을 들고 그는 영국을 비롯하여 지금의 프랑스, 독일 지역을 돌며 학교를 세우고 지식과 학문의 방법을 계속해서 전파했습니다. 알퀸은 이러한 배움과 교육과 탐구가 진리를 이해하는 바른길이요, 진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는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 교회는 흩어지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꿈과 희망은 성찬례를 비유하여 노래한 시에도 담겨 있습니다.

내 아침의 세월, 혈기가 넘칠 때, 나는 영국 땅에 씨를 뿌렸지.
그리고 이제 내 저녁 시절, 내 피가 점점 차가워져도,
여전히 프랑스 땅에 씨를 뿌리고 있네.
하느님의 은총으로 두 곳에서 모두 씨가 자라나기를 희망하네.
그래서 달콤할 꿀 같은 성서의 맛을 전하며,
오랜 가르침에 깃든 잘 익은 포도주를 다른 이들이 마시게 하며
나는 여전히 씨를 뿌리고 있네.

우리는 이 아침, 어떤 희망 속에서, 성서를 읽고, 이 성체와 보혈을 마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성찬례 속에서 어떤 일치와 어떤 진리를 함께 배우고 다지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데려가시지 않고, 악마에게서 지켜주겠노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머물러 우리에게, 우리 교회에 부탁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기쁨은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만들어 내고, 도통한 척하며 패거리를 만들어 교회를 흩어지게 하고 일탈시키는 무지가 아니라 쉬지 않고 진리를 향해 탐구하고 대화하는 일에 있습니다.

알퀸도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로처럼 사람들과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신앙의 지식과 지혜의 전통 위에 세워 흐트러짐 없이 하나로 이끌고자 했던 알퀸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기 먼지와 벌레와 재로 덮여있으나
내 이름은 알퀸, 늘 지혜를 사랑했나니
이 묘비를 읽은 이여, 내 삶과 영혼을 기억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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