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신앙 – 대결과 회복과 샬롬의 실천

Sunday, April 26th, 2015

착한 신앙 – 대결과 회복과 샬롬의 실천 (사도 4:5~12, 요한 10:11~18)1

부활 이전과 이후가 베드로의 삶을 가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실수투성이였습니다. 스승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쳤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부활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도 ‘무서워서’ 다른 동료와 문을 닫아걸고 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대담하게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인 대사제들과 한판 대결을 펼치는 베드로입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로 삶의 질서가 역전됩니다. 부활 이전에 예루살렘은 정치와 종교 권력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곳 대사제들의 힘에 갈릴래아 시골뜨기 예수님은 힘없이 죽임을 당했고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천한 갈릴래아 어부 출신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루살렘 앞에 당당하게 섰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 ‘가문’과 갈릴래아의 어부 ‘제자들’이 대결합니다. 신앙은 족보나 가문이 아니라 제자됨에 있습니다. 신앙의 힘은 옥죄고 통제하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숨을 불어넣는 복음에 있습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시선 속에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착한 목자는 목숨을 바칩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남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자들과 대비가 뚜렷합니다. 착한 목자는 ‘스스로’ 행동하는 자유인입니다. 현실의 ‘세상’이 만든 온갖 틀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에 반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 기운과 힘을 누립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이 부서지고 못난 돌을 버릴 때, 선하신 하느님, 착하신 예수님은 버림받은 돌을 삶과 우주를 받치는 머릿돌로 회복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참 좋다’ 하신 말씀과 예수님을 표현하는 ‘착하고 선하다’는 말은 원래 같습니다. 그러니 착한 목자가 이끄시는 구원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신 창조의 질서를 되살려내는 일입니다. 부서진 것들이 회복되어 제자리에 놓여 서로 아름다운 관계, ‘샬롬’을 마련하는 일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종교적인 확신이나 교리에서 나오지 않고, 부서지고 깨진 사금파리들이 있는 그대로 모여 서로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려고 겸손하게 자신을 바치는 길에서 나옵니다.

부활의 신앙은 창조의 질서와 관계를 깨뜨리는 권력에 맞서고 강압의 틀에 도전합니다. 온전한 회복과 평화의 샬롬을 세우려고 ‘성령을 받아’ 용기 있게 나서는 자유입니다. 모든 부서진 상처들을 마음 아프게 모아서 아름다운 샬롬의 모자이크를 만드는 손길입니다. 이것이 ‘착한’ 목자를 따르는 제자들이 걸어야 할 ‘보기 좋은’ 신앙의 길, ‘선한’ 구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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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26일치(↩)

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Sunday, March 8th, 2015

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출애 20:1~17, 요한 2:13~22)1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출애 20:2).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이 경험하는 하느님께는 늘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붙은 이름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처럼 사람과 깊은 인연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역사의 사건 속에서 사람 일에 관여하고 관계하는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입니다. 이 역사와 사람에 관여하며 올바르게 관계하는 일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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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약 본문인 십계명의 내용과 구조가 이채롭습니다. 역사 속에서 해방을 일으킨 하느님을 확인한 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필요한 질서와 명령이 뒤따릅니다. 첫 세 계명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질서입니다.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느님이 분명하기에 인간의 편의와 계산에 따라 사람이 멋대로 정한 ‘다른 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1계). ‘우상’은 조각이나 그림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보다 더 가치와 무게를 두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2계).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멋대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3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뒤 여섯 계명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의 질서,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깊이 존중합니다. 부모공경(5계)과 더불어 생명파괴와 사랑의 신뢰 관계를 배신하지 않고(6계, 7계), 부당한 재물 수익(8계)과 모함(9계)을 생활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소유의 탐욕을 향한 경고(10계)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런 욕심으로 숱하게 깨지는 인간사를 볼 때 마음 깊이 새길 계명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십계명을 이해하는 열쇠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에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이 계명에 관한 설명이 상세하고 길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노예 상태에서 구해낸 하느님이라는 첫 시작의 표현과도 맞닿습니다. 쉬지 못하고 강요된 일에서 사람을 이끌어 내어 쉬게 하십니다. 네 번째 계명은 쉼을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연관 짓습니다. 하느님도 쉬셨습니다. 노예를 탈출시켜 쉼을 마련해 준 일은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멈추어 쉬지 않으면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도 귀 기울일 시간도 마련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쉼’의 공간과 여유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 여유를 다시 마련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물론이려니와 부모형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자녀도 올바로 살필 수 없습니다.

쉼과 거룩함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은 ‘따로 떼어 놓는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생각을 하느님을 향하여 따로 떼어놓고 쉬는 일이 거룩한 생활의 시작입니다. ‘거룩함’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쉼이 없으면 건강을 해치고 마음의 불안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삶이 어려워집니다. 멈추고 쉬어서 사랑하는 사람, 곁에 앉은 이웃을 느린 시선으로 살피지 않으면, 우리 삶은 건강하거나 온전하기 어렵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노여운 것은 떼어놓고 멈추어 기도하는 공간과 시간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의 분주함과 손익계산이 신앙인을 옥죄면 복음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종교를 통해 개인의 축복(‘유대인의 기적’)과 합리적 처세술(‘그리스인의 지혜’)에만 골몰하면, 세상 사람처럼 ‘복음’을 ‘어리석은 일’이라 치부하며 살아갑니다. 복음은 멈추어 쉬면서 자신을 덜어내어 역사의 하느님을 생각할 때 드러납니다. 마음과 생활을 따로 떼어 역사의 하느님을 예배하며 세상의 생명을 그윽하게 바라볼 때 온전하고 ‘거룩한 관계’가 다시 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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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8일치 – 수정(↩)

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

Wednesday, February 11th, 2015

창세 2:4b~9, 15~17 / 시편 104:10~11,28~31 / 마르 7:14~23
* 병자를 위한 기도일

2015년 2월 1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오늘 2월 11일을 우리는 기도서 전례력에 따라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지킵니다. 연중 ‘녹색’의 절기가 계속되는데, 오늘 전례 색깔은 ‘자색’이라고 친절하게 지시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드리는 성찬례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를 기도하는데, 특별히 왜 오늘을 잡아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정했을까요?

그 연원은 이렇습니다. 정확하게 표기하면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World Day of the Sick)입니다. 이날은 성공회나 다른 단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23년 전,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지정한 축일입니다. 1년 뒤 1993년 2월 11일부터 지키기 시작하여 다른 그리스도교단에도 퍼졌습니다. 성공회는 천주교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이 축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고 기도서와 교회력에 넣은 교단이겠다 싶습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축일을 정하면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온종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을 가졌으면 합니다.” 당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 자신은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12년 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기도일을 2월 11일로 선택한 것은,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1858년 루르드 마을에 열네 살 먹은 소녀 버나뎃 수비루에게 성모가 세 번이나 나타났습니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순례자 중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곧 치유의 순례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수녀가 된 버나뎃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다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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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병자들을 위한 기도 축일의 연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부탁 가운데 있는 말이 눈에 듭니다. 오늘은 “병자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병자들의 고통을 치유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 새롭습니다. 무엇보다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말이 어떤 새로운 울림을 주지 않나요?

우리는 고통을 제거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치유가 아니라, 고통을 봉헌한다니 무슨 말일까요? 다른 여느 종교들이 손쉽게 병자의 치유와 기적을 말하곤 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많은 사람이 어떤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신앙은 치유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그 고통 자체에 관한 깊은 생각, 그 고통 자체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있는 그대로 바치는 일을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을 읽으면서, 우리는 종종 치유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참모습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에서 돋보이는 장면은 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병자들이 세상 사람에게서 손가락질받고 차별받는 현실을 향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쳐부수고, 오히려 병자들과 힘없는 이들의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통로라고 그들의 가치와 고통을 새롭게 선언해 주십니다. 병든 일은 현상이요 현실일 뿐, 어떤 나쁜 것도 아니요, 어떤 죄의 결과도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런 뒤, 예수님은 다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하여 눈과 몸을 돌려 자유와 해방을 선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따뜻하게 손을 얹어 어루만지십니다. 이 자유와 해방, 그리고 손을 얹어 어루만지는 일이 치유의 본질입니다.

둘째, 병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이 기도의 날을 제정한 요한 바오로 2세도, 성모 마리아 발현의 복된 증인이었던 버나뎃도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교황은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났고, 버나뎃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던 이들도 다시 병을 얻거나, 노환을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은 있지만 죽지 않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병이 들든지 건강하든지 모두 죽습니다. 다만 시간차가 있을 뿐입니다.

이 시간 차이를 두고 누구는 축복이 덜하고, 누구는 축복을 더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인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 시간 차는 큰 안타까움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집니다. 적어도, 우리마저 죽으면 우리가 품고 기억하는 안타까움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다릅니다. 그 누구의 고통이든지, 짧은 생명이든지, 긴 생명이든지,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잊혀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기억됩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슬픔, 그리고 병약함과 고통마저도 우리는 봉헌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우리는 평일 성찬례 동안에 마르코 복음서를 읽습니다. 마르코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부지런히 걷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눈치채셨지요? 이때,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표지는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입니다. 치유는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이지, 치유가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 목적은 우리가 모두 병든 사람이라는 깨달음과 받아들임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과연 그런가요?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고 병이 납니다. 나쁜 병균이 몸 안으로 들어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생명력의 바탕이기도 하지만,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생물학계와 의학계의 진리입니다. 이 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피할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한다고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시간 차이일 뿐입니다. 이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에서 나온 것,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많은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게다가 이것이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를 깨뜨리기 문제들이기에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일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다는 표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존중하려 할 때 이런 유혹에서 그나마 조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에 세심하게 접근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목록은 언제든지 유혹에 넘어가 넘어질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넘어집니다. 이 나약함과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가 조금 덜하다고 쉽게 남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해야 하지만 피하기 쉽지 않은 곤혹스러운 우리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연약함이 우리 모든 인간이 고통 당하는 병고인 것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높으나 낮으나, 잘 나거나 못 나거나, 젊거나 원숙하거나 모두 조금씩 병자입니다. 사람과 나누는 관계,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를 깨뜨리며 살아가는 병자입니다. 죄인입니다. 이 병고와 죄를 무엇으로 씻어내어 깨끗하게 하려는 일이 신앙일까요?

아닙니다. 이 병고와 죄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펼쳐집니다. 사람을 인과응보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향하여 측은지심을 느끼는 일이 시작됩니다. 아프고 비틀리고 억압받으며 차별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초대하고 환대하여 어루만지며 기름을 바르고 싸매며 치유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그 가운데 우리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제 마음의 어려움과 몸의 고통을 봉헌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기름을 이마에 바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화해와 용서와 치유를 생각하고 우리를 봉헌합시다. 기름을 바를 때 여러분의 손을 뻗어 서로 어깨에 얹어 삶을 봉헌하는 우리의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십시오.

(기름을 이마에 바르는 예식)
(기름을 바르는 예식 끝난 뒤)

기도합시다.

생명과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 병중에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나이다. 구하오니, 세상의 병든 이들과 우리를 돌아보시어 연약한 육신과 영혼을 강건케 하시고, 주님의 보살핌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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