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와 진리 – 예수의 고별 기도와 성 알퀸

Wednesday, May 20th, 2015

부활 7주간(승천후주일) 수요일 & 성 알퀸 축일

사도 20:28~38 / 시편 68:28~29, 32~35 / 요한 17:11~19
2015년 5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본기도 – 요크의 알퀸 (Alcuin of York)

전능하신 하느님, 교만하여 무지한 시대에 주님의 종 알퀸 부제를 세우시어, 배움의 불꽃을 다시 붙여 주셨나이다. 비오니, 이 시대 속에서 흔들이며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어, 주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늘 이별을 합니다. 함께 자랐던 동무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도 하고, 부대끼며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자녀를 지방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지방으로 유학을 보내느라 떠나보내기도 하며, 군대를 보내느라, 시집 보내느라 잠시 작별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생의 큰 작별을 해야 합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자녀를 잃는 충격에 휩싸이기도 하며, 삶의 동반자였던 배우자를 잃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별의 목격자였던 자신이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합니다.

이러한 이별과 작별의 순간에는 늘 마음 절절한 부탁이 있습니다. 유언으로 마지막 당부를 하기도 하고, 묘비명을 새겨서라도 깊은 부탁을 남기기도 합니다. 남은 사람은 그 당부를 마음 깊이 새깁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의 이별 장면이 눈물겹습니다. 다시 보리라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기에 그들은 서로 목을 끌어안고 울며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었습니다. 이 작별의 순간에 사도 바울로 성인은 절절한 부탁을 유언처럼 남깁니다. 바울로 성인은 신자들과 교회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합니다. 성인께서 그들에게 주었던 가르침을 잊지 말고 되새기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성서 본문에서 발견하는 당황스러운 경고는 교회를 해치는 사람이 밖에서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나오니 특별히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정체는 분명합니다. “진리를 그르치는 말을 하며 신도들을 이탈시켜 자기를 따르라”고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해치는 일은 진리에 관한 그릇된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과 고별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가 눈물겹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눈물 어린 당부와 예수님의 고별 기도는 너무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탈하거나 흩어지지 않고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하나 되어 진리를 지키는 일이 바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며, 교회가 할 일입니다. 하나 되어 진리를 지키는 일이 예수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길입니다.

교회는 일치와 진리로 예수님의 기쁨을 넘치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오늘 성서 본문에서는 우리 삶과 우리 교회의 기쁨은 두 가지 길에 있습니다. 우리는 흩어지지 않고, 이탈하지 않고, 서로 하나가 되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제대로 배우고 지키며 물려주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교회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애쓰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에 지문이 같은 사람이 없듯이, 우리는 저마다 성격과 견해와 생활 방식이 다릅니다. 자라난 환경과 교육과 경험이 달라서 다른 우리를 더욱 다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명한 현실 속에서 ‘하나가 되어 일치’하라는 말씀은 허무맹랑한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신앙인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공동의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십니다. 설령 우리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가 깨졌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지고 멀어진 관계에 새로운 다리가 놓였습니다. 그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십자가 나무 그늘 아래서 우리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그늘 밖 땡볕 아래서 경쟁하면서 서로 할퀴는 관계를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목격했듯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관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경험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라고들 합니다. 늘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떠도는 그 말이, 누구를 흠집 내거나, 누구를 흔들거나, 누구를 질시하거나 비방하는 말일 때, 그 말 자체는 그 교회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요한 복음서가 늘 경계하는 ‘세상’입니다. 그곳은 생명의 영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 악령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이 악령은 삶의 여러 관계에 탈을 내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분란을 만들어 냅니다.

어떤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비방하는 말을 자기 입에 담아 퍼뜨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말 많고 탈 많은 동네를 만듭니다. 이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일 뿐입니다. 서로 하나 되어 일치하는 교회가 되려면, 이런 악령의 꾀임과 행동을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서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는 진리를 제대로 배우고 대화하여 교정하고 물려주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진리를 단박에 깨닫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리를 한 손에 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다른 여느 종교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생각에 마음을 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진리는 부단히 배우며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여러 다른 사람의 신앙에 담긴 작은 진리의 파편을 존중하며 자신이 지닌 진리의 파편과 맞춰갑니다. 마치 수천수만 개로 이뤄진 직소퍼즐의 그림을 둘러 모여 맞춰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진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걸으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행하면서 우리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그 동행의 길에서 익힌 신앙과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 더 큰 그림, 더 완벽한 그림을 만들도록 자신을 내어주고 기여하는 일이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의 바른 태도이고 행동입니다.

오늘은 8세기 영국 출신의 부제이자 수도자, 시인, 교회학자였던 알퀸(Alcuin of York) 성인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력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알퀸은 8세기 서방 교회가 신앙을 지식과 지혜의 전통 위에 다시 세우며 세상을 새롭게 이끌어 나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성인이었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 닮았는지 모르겠으나, 교만과 무지도 비슷한 관계입니다. 교만하면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조금 배웠다는 사람도 교만에 빠지면 배우기를 멈추거나 알량한 자기 생각에 고착되고 맙니다. 한편, 배우지 텅 빈 사람은 권위를 내세울 근거가 부족한 탓에 교만을 부립니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려는 행동입니다.

알퀸은 교회가 교만과 무지로 고통받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샤를마뉴 황제가 서 로마 제국 패망 이후 분열되었던 유럽을 신성 로마 제국으로 통일하던 때였습니다. 교만의 대결이 만들었던 정치의 오랜 분열을 마감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교부의 전통이 분열과 무지로 부서진 상태에서 신앙을 다시 세우려는 때였습니다. 샤를마뉴 황제는 변방 영국의 학자로 알려진 알퀸을 불러, 무너진 신학과 문학, 그리고 과학의 체계를 다시 세우게 했습니다. 그는 학교를 세워서 유럽 최초로 인문학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문법과 수사학, 대화법을 가르쳤습니다. 지금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문장에 물음표를 처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수와 기하학을 정리하여 교과서를 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은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는 신학자요, 문학가이기도 했습니다.

진리를 향한 다양한 배움과 방법을 들고 그는 영국을 비롯하여 지금의 프랑스, 독일 지역을 돌며 학교를 세우고 지식과 학문의 방법을 계속해서 전파했습니다. 알퀸은 이러한 배움과 교육과 탐구가 진리를 이해하는 바른길이요, 진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는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 교회는 흩어지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꿈과 희망은 성찬례를 비유하여 노래한 시에도 담겨 있습니다.

내 아침의 세월, 혈기가 넘칠 때, 나는 영국 땅에 씨를 뿌렸지.
그리고 이제 내 저녁 시절, 내 피가 점점 차가워져도,
여전히 프랑스 땅에 씨를 뿌리고 있네.
하느님의 은총으로 두 곳에서 모두 씨가 자라나기를 희망하네.
그래서 달콤할 꿀 같은 성서의 맛을 전하며,
오랜 가르침에 깃든 잘 익은 포도주를 다른 이들이 마시게 하며
나는 여전히 씨를 뿌리고 있네.

우리는 이 아침, 어떤 희망 속에서, 성서를 읽고, 이 성체와 보혈을 마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성찬례 속에서 어떤 일치와 어떤 진리를 함께 배우고 다지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데려가시지 않고, 악마에게서 지켜주겠노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머물러 우리에게, 우리 교회에 부탁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기쁨은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만들어 내고, 도통한 척하며 패거리를 만들어 교회를 흩어지게 하고 일탈시키는 무지가 아니라 쉬지 않고 진리를 향해 탐구하고 대화하는 일에 있습니다.

알퀸도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로처럼 사람들과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신앙의 지식과 지혜의 전통 위에 세워 흐트러짐 없이 하나로 이끌고자 했던 알퀸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기 먼지와 벌레와 재로 덮여있으나
내 이름은 알퀸, 늘 지혜를 사랑했나니
이 묘비를 읽은 이여, 내 삶과 영혼을 기억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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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신앙 – 대결과 회복과 샬롬의 실천

Sunday, April 26th, 2015

착한 신앙 – 대결과 회복과 샬롬의 실천 (사도 4:5~12, 요한 10:11~18)1

부활 이전과 이후가 베드로의 삶을 가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실수투성이였습니다. 스승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쳤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부활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도 ‘무서워서’ 다른 동료와 문을 닫아걸고 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대담하게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인 대사제들과 한판 대결을 펼치는 베드로입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로 삶의 질서가 역전됩니다. 부활 이전에 예루살렘은 정치와 종교 권력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곳 대사제들의 힘에 갈릴래아 시골뜨기 예수님은 힘없이 죽임을 당했고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천한 갈릴래아 어부 출신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루살렘 앞에 당당하게 섰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 ‘가문’과 갈릴래아의 어부 ‘제자들’이 대결합니다. 신앙은 족보나 가문이 아니라 제자됨에 있습니다. 신앙의 힘은 옥죄고 통제하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숨을 불어넣는 복음에 있습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시선 속에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착한 목자는 목숨을 바칩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남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자들과 대비가 뚜렷합니다. 착한 목자는 ‘스스로’ 행동하는 자유인입니다. 현실의 ‘세상’이 만든 온갖 틀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에 반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 기운과 힘을 누립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이 부서지고 못난 돌을 버릴 때, 선하신 하느님, 착하신 예수님은 버림받은 돌을 삶과 우주를 받치는 머릿돌로 회복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참 좋다’ 하신 말씀과 예수님을 표현하는 ‘착하고 선하다’는 말은 원래 같습니다. 그러니 착한 목자가 이끄시는 구원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신 창조의 질서를 되살려내는 일입니다. 부서진 것들이 회복되어 제자리에 놓여 서로 아름다운 관계, ‘샬롬’을 마련하는 일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종교적인 확신이나 교리에서 나오지 않고, 부서지고 깨진 사금파리들이 있는 그대로 모여 서로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려고 겸손하게 자신을 바치는 길에서 나옵니다.

부활의 신앙은 창조의 질서와 관계를 깨뜨리는 권력에 맞서고 강압의 틀에 도전합니다. 온전한 회복과 평화의 샬롬을 세우려고 ‘성령을 받아’ 용기 있게 나서는 자유입니다. 모든 부서진 상처들을 마음 아프게 모아서 아름다운 샬롬의 모자이크를 만드는 손길입니다. 이것이 ‘착한’ 목자를 따르는 제자들이 걸어야 할 ‘보기 좋은’ 신앙의 길, ‘선한’ 구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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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26일치(↩)

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Sunday, March 8th, 2015

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출애 20:1~17, 요한 2:13~22)1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출애 20:2).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이 경험하는 하느님께는 늘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붙은 이름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처럼 사람과 깊은 인연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역사의 사건 속에서 사람 일에 관여하고 관계하는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입니다. 이 역사와 사람에 관여하며 올바르게 관계하는 일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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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약 본문인 십계명의 내용과 구조가 이채롭습니다. 역사 속에서 해방을 일으킨 하느님을 확인한 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필요한 질서와 명령이 뒤따릅니다. 첫 세 계명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질서입니다.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느님이 분명하기에 인간의 편의와 계산에 따라 사람이 멋대로 정한 ‘다른 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1계). ‘우상’은 조각이나 그림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보다 더 가치와 무게를 두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2계).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멋대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3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뒤 여섯 계명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의 질서,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깊이 존중합니다. 부모공경(5계)과 더불어 생명파괴와 사랑의 신뢰 관계를 배신하지 않고(6계, 7계), 부당한 재물 수익(8계)과 모함(9계)을 생활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소유의 탐욕을 향한 경고(10계)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런 욕심으로 숱하게 깨지는 인간사를 볼 때 마음 깊이 새길 계명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십계명을 이해하는 열쇠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에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이 계명에 관한 설명이 상세하고 길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노예 상태에서 구해낸 하느님이라는 첫 시작의 표현과도 맞닿습니다. 쉬지 못하고 강요된 일에서 사람을 이끌어 내어 쉬게 하십니다. 네 번째 계명은 쉼을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연관 짓습니다. 하느님도 쉬셨습니다. 노예를 탈출시켜 쉼을 마련해 준 일은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멈추어 쉬지 않으면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도 귀 기울일 시간도 마련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쉼’의 공간과 여유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 여유를 다시 마련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물론이려니와 부모형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자녀도 올바로 살필 수 없습니다.

쉼과 거룩함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은 ‘따로 떼어 놓는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생각을 하느님을 향하여 따로 떼어놓고 쉬는 일이 거룩한 생활의 시작입니다. ‘거룩함’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쉼이 없으면 건강을 해치고 마음의 불안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삶이 어려워집니다. 멈추고 쉬어서 사랑하는 사람, 곁에 앉은 이웃을 느린 시선으로 살피지 않으면, 우리 삶은 건강하거나 온전하기 어렵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노여운 것은 떼어놓고 멈추어 기도하는 공간과 시간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의 분주함과 손익계산이 신앙인을 옥죄면 복음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종교를 통해 개인의 축복(‘유대인의 기적’)과 합리적 처세술(‘그리스인의 지혜’)에만 골몰하면, 세상 사람처럼 ‘복음’을 ‘어리석은 일’이라 치부하며 살아갑니다. 복음은 멈추어 쉬면서 자신을 덜어내어 역사의 하느님을 생각할 때 드러납니다. 마음과 생활을 따로 떼어 역사의 하느님을 예배하며 세상의 생명을 그윽하게 바라볼 때 온전하고 ‘거룩한 관계’가 다시 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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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8일치 –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