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Sunday, March 8th, 2015

안식의 복음 – 거룩한 관계를 향한 부르심 (출애 20:1~17, 요한 2:13~22)1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출애 20:2).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이 경험하는 하느님께는 늘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붙은 이름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처럼 사람과 깊은 인연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역사의 사건 속에서 사람 일에 관여하고 관계하는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입니다. 이 역사와 사람에 관여하며 올바르게 관계하는 일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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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약 본문인 십계명의 내용과 구조가 이채롭습니다. 역사 속에서 해방을 일으킨 하느님을 확인한 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필요한 질서와 명령이 뒤따릅니다. 첫 세 계명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질서입니다.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느님이 분명하기에 인간의 편의와 계산에 따라 사람이 멋대로 정한 ‘다른 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1계). ‘우상’은 조각이나 그림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보다 더 가치와 무게를 두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2계).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멋대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3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뒤 여섯 계명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의 질서,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깊이 존중합니다. 부모공경(5계)과 더불어 생명파괴와 사랑의 신뢰 관계를 배신하지 않고(6계, 7계), 부당한 재물 수익(8계)과 모함(9계)을 생활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소유의 탐욕을 향한 경고(10계)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런 욕심으로 숱하게 깨지는 인간사를 볼 때 마음 깊이 새길 계명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십계명을 이해하는 열쇠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에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이 계명에 관한 설명이 상세하고 길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노예 상태에서 구해낸 하느님이라는 첫 시작의 표현과도 맞닿습니다. 쉬지 못하고 강요된 일에서 사람을 이끌어 내어 쉬게 하십니다. 네 번째 계명은 쉼을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연관 짓습니다. 하느님도 쉬셨습니다. 노예를 탈출시켜 쉼을 마련해 준 일은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멈추어 쉬지 않으면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도 귀 기울일 시간도 마련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쉼’의 공간과 여유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 여유를 다시 마련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물론이려니와 부모형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자녀도 올바로 살필 수 없습니다.

쉼과 거룩함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은 ‘따로 떼어 놓는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생각을 하느님을 향하여 따로 떼어놓고 쉬는 일이 거룩한 생활의 시작입니다. ‘거룩함’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쉼이 없으면 건강을 해치고 마음의 불안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삶이 어려워집니다. 멈추고 쉬어서 사랑하는 사람, 곁에 앉은 이웃을 느린 시선으로 살피지 않으면, 우리 삶은 건강하거나 온전하기 어렵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노여운 것은 떼어놓고 멈추어 기도하는 공간과 시간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의 분주함과 손익계산이 신앙인을 옥죄면 복음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종교를 통해 개인의 축복(‘유대인의 기적’)과 합리적 처세술(‘그리스인의 지혜’)에만 골몰하면, 세상 사람처럼 ‘복음’을 ‘어리석은 일’이라 치부하며 살아갑니다. 복음은 멈추어 쉬면서 자신을 덜어내어 역사의 하느님을 생각할 때 드러납니다. 마음과 생활을 따로 떼어 역사의 하느님을 예배하며 세상의 생명을 그윽하게 바라볼 때 온전하고 ‘거룩한 관계’가 다시 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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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8일치 – 수정(↩)

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

Wednesday, February 11th, 2015

창세 2:4b~9, 15~17 / 시편 104:10~11,28~31 / 마르 7:14~23
* 병자를 위한 기도일

2015년 2월 1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오늘 2월 11일을 우리는 기도서 전례력에 따라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지킵니다. 연중 ‘녹색’의 절기가 계속되는데, 오늘 전례 색깔은 ‘자색’이라고 친절하게 지시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드리는 성찬례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를 기도하는데, 특별히 왜 오늘을 잡아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정했을까요?

그 연원은 이렇습니다. 정확하게 표기하면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World Day of the Sick)입니다. 이날은 성공회나 다른 단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23년 전,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지정한 축일입니다. 1년 뒤 1993년 2월 11일부터 지키기 시작하여 다른 그리스도교단에도 퍼졌습니다. 성공회는 천주교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이 축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고 기도서와 교회력에 넣은 교단이겠다 싶습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축일을 정하면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온종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을 가졌으면 합니다.” 당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 자신은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12년 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기도일을 2월 11일로 선택한 것은,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1858년 루르드 마을에 열네 살 먹은 소녀 버나뎃 수비루에게 성모가 세 번이나 나타났습니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순례자 중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곧 치유의 순례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수녀가 된 버나뎃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다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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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병자들을 위한 기도 축일의 연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부탁 가운데 있는 말이 눈에 듭니다. 오늘은 “병자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병자들의 고통을 치유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 새롭습니다. 무엇보다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말이 어떤 새로운 울림을 주지 않나요?

우리는 고통을 제거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치유가 아니라, 고통을 봉헌한다니 무슨 말일까요? 다른 여느 종교들이 손쉽게 병자의 치유와 기적을 말하곤 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많은 사람이 어떤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신앙은 치유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그 고통 자체에 관한 깊은 생각, 그 고통 자체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있는 그대로 바치는 일을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을 읽으면서, 우리는 종종 치유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참모습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에서 돋보이는 장면은 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병자들이 세상 사람에게서 손가락질받고 차별받는 현실을 향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쳐부수고, 오히려 병자들과 힘없는 이들의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통로라고 그들의 가치와 고통을 새롭게 선언해 주십니다. 병든 일은 현상이요 현실일 뿐, 어떤 나쁜 것도 아니요, 어떤 죄의 결과도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런 뒤, 예수님은 다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하여 눈과 몸을 돌려 자유와 해방을 선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따뜻하게 손을 얹어 어루만지십니다. 이 자유와 해방, 그리고 손을 얹어 어루만지는 일이 치유의 본질입니다.

둘째, 병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이 기도의 날을 제정한 요한 바오로 2세도, 성모 마리아 발현의 복된 증인이었던 버나뎃도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교황은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났고, 버나뎃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던 이들도 다시 병을 얻거나, 노환을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은 있지만 죽지 않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병이 들든지 건강하든지 모두 죽습니다. 다만 시간차가 있을 뿐입니다.

이 시간 차이를 두고 누구는 축복이 덜하고, 누구는 축복을 더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인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 시간 차는 큰 안타까움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집니다. 적어도, 우리마저 죽으면 우리가 품고 기억하는 안타까움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다릅니다. 그 누구의 고통이든지, 짧은 생명이든지, 긴 생명이든지,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잊혀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기억됩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슬픔, 그리고 병약함과 고통마저도 우리는 봉헌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우리는 평일 성찬례 동안에 마르코 복음서를 읽습니다. 마르코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부지런히 걷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눈치채셨지요? 이때,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표지는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입니다. 치유는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이지, 치유가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 목적은 우리가 모두 병든 사람이라는 깨달음과 받아들임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과연 그런가요?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고 병이 납니다. 나쁜 병균이 몸 안으로 들어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생명력의 바탕이기도 하지만,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생물학계와 의학계의 진리입니다. 이 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피할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한다고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시간 차이일 뿐입니다. 이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에서 나온 것,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많은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게다가 이것이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를 깨뜨리기 문제들이기에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일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다는 표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존중하려 할 때 이런 유혹에서 그나마 조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에 세심하게 접근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목록은 언제든지 유혹에 넘어가 넘어질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넘어집니다. 이 나약함과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가 조금 덜하다고 쉽게 남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해야 하지만 피하기 쉽지 않은 곤혹스러운 우리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연약함이 우리 모든 인간이 고통 당하는 병고인 것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높으나 낮으나, 잘 나거나 못 나거나, 젊거나 원숙하거나 모두 조금씩 병자입니다. 사람과 나누는 관계,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를 깨뜨리며 살아가는 병자입니다. 죄인입니다. 이 병고와 죄를 무엇으로 씻어내어 깨끗하게 하려는 일이 신앙일까요?

아닙니다. 이 병고와 죄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펼쳐집니다. 사람을 인과응보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향하여 측은지심을 느끼는 일이 시작됩니다. 아프고 비틀리고 억압받으며 차별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초대하고 환대하여 어루만지며 기름을 바르고 싸매며 치유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그 가운데 우리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제 마음의 어려움과 몸의 고통을 봉헌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기름을 이마에 바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화해와 용서와 치유를 생각하고 우리를 봉헌합시다. 기름을 바를 때 여러분의 손을 뻗어 서로 어깨에 얹어 삶을 봉헌하는 우리의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십시오.

(기름을 이마에 바르는 예식)
(기름을 바르는 예식 끝난 뒤)

기도합시다.

생명과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 병중에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나이다. 구하오니, 세상의 병든 이들과 우리를 돌아보시어 연약한 육신과 영혼을 강건케 하시고, 주님의 보살핌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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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를 바라보는 청명한 상상력

Thursday, October 2nd, 2014

(註: 지난 9월 25일 오전 지하철 이수역(총신대입구역) 사고와 관련하여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놀라던 차에, 언론의 보도와 인터넷에 올라오는 무명의 댓글들을 보며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단숨에 글을 적었다. 며칠 후 유가족과 함께 그분의 화장예식을 집례한 뒤, 슬픈 마음을 담아 간단히 적어 올렸다. 슬로우뉴스의 편집장인 민노씨가 이 글을 보고 슬로우뉴스에 올리자고 제안하자, 잠시 망설인 끝에 그러자고 했다. 개인의 잡감을 적는 페이스북의 글이 우리 사회에서 신뢰받는 드문 인터넷 매체에 적절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엉성한 글에서나마 진심 어린 호소를 읽어내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기록을 위해 그 글을 이곳에도 옮긴다.)

지하철 이수역의 로사 할머니

지하철 이수역 사고의 희생자는 저희 성공회 주교좌성당의 80대 여성 교우이신 ‘로사’님입니다. 목요일 아침에 성당에서 있을 성서 공부 모임에 참여하려다가 변을 당하셨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슬퍼서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삭일 수 없어서 고인과 가족께 결례라 생각하면서도 한마디 적습니다.

희생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

SNS 등에서 고인을 향한 애도의 염을 표하는 분들이 있기도 하고, 사이사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한 댓글도 보입니다. 차마 옮길 수 없는 무례하고 잔인한 말들입니다. 이 잔인성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을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고 후 빨리 기관차를 출발하라고 말했다는 사람도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익명의 말들이니 그냥 덮고 싶습니다.

그러나 CBS 김현정 뉴스쇼 인터뷰에서 서울메트로 홍보실 차장이 뱉은 발언과 이어가는 대화는 우리 사회의 병폐, 특히 책임을 진 사람들의 책임 전가와 안전사고의 희생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홍보실 차장과 앵커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김현정: 그러니까 어제 오전 9시 50분쯤 총신대입구역 승강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겁니까?

김광흠(서울메트로 홍보실 차장): 그때 총신대입구역에서 열차가 출발하려고 하는데 80대 할머니 한 분이 뒤늦게 열차에 타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전동차 문은 닫히고, 전동차 문이 닫히니까 할머니가 급한 마음에 전동차 문에 지팡이를 끼워 놓으신 거죠. 그리고 그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스크린도어, 요즘 안전문이라 얘기하는데요. 스크린도어는 안 닫힌 상태였고, 지팡이는 전동차 문 사이에 껴 있었는데 그것이 얇다 보니까 전동차 문이 닫힌 걸로 인식이 됐었고요. 그래서 차장이 열차를 출발시키는 바람에 발생한 사망사고입니다.

김현정: 할머니가 지팡이를 놓으셨으면 되는데 잡고 계셨군요.

김광흠: 예. 지팡이를 잡고 계시는 바람에 안타까운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책임 기관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언론 플레이가 훤히 드러납니다. 그 차장의 발언대로라면, “지하철을 타려고 했으니까 사고가 난 겁니다. 지하철을 타지 않았으면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세월호에 탔으니까 죽은 것이다, 수학여행 제주도로 안 갔으면 사고 났을 리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팡이’는 사고 원인이 아닙니다

사고의 정확한 구성이 어떻든, 이런 이야기를 멀리서 듣는 안타까운 마음에서는 ‘그 지팡이를 놓으셨다면…’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고 원인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니 책임 기관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이 할 말은 전혀 아닙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언론 플레이일 뿐입니다.

밝히거니와, 희생당하신 분은 80세 초의 여성이시고 신체장애가 있으셔서 거동이 매우 느리신 분입니다. 지팡이는 그분의 수족과 같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거동이 느릴 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으시고 독립하여 홀로 사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판단력에 별 의심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 연세에 비해 흔치 않은 고등교육을 받으셨으며 매사에 삶과 행동과 판단이 사려 깊고 정확하신 분입니다.

사고의 원인은 명백합니다. 지하철 안전 운영 규정에 어긋나는 지하철 운행이 있었기에 사고가 났습니다. 이 책임을 경감하려는 발언은 그저 한 인간의 생명에 무례할 뿐만 아니라 잔인합니다.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듯하면서 슬그머니 개인도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식으로 물타기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사회는 무례하고 잔인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없고, 문제점이 개선될 여지가 적어집니다. 비슷한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책임 전가는 생명 자체에 잔인한 생각을 품게 합니다

분명한 책임, 특히 공적이고 우선적인 책임을 회피하며, 희생당하거나 피해를 본 개인에게 어떤 작은 원인이라도 전가하려는 행위는 곧바로 한 인간, 아니 생명에 대한 잔인한 사고를 품게 합니다. 어떤 안전 사고 등에 관하여 ‘그 사람도 잘못했네.’ ‘참 운이 없네’ 하는 등의 말을 입은 물론이려니와 생각에도 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을 담는 순간, 우리는 공적 기관이 책임을 회피하려는 잔인성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 개인도 그 잔인성의 희생자가 될 일이 뻔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이 지상에 한 생명이 왔다가 떠나는 일은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고귀하고 장엄한 일입니다. 그 장엄한 생명의 생멸을 손쉽게 바라보면, 자기의 손익계산과 편의대로 바라보면, 우리 삶이 비천해집니다. 비천하고 잔인한 나락에 이 사회와 우리 생각, 우리 자신을 내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간곡한 호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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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lake, Pity, c. 1795)

생명과 죽음에서 존엄을 지우는 ‘오염된 상상력’

로사 교우님의 장례가 있었고 저는 화장예식을 인도하며 한줌의 재가 된 고인을 모셔야 했습니다. 하얀 재가 된 몸에서 타지 않은, 어린이 주먹 만한 세 개의 큰 쇳덩어리가 여러 나사와 함께 나왔습니다. 척추 수술을 하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느릿한 걸음의 신체장애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분은 서둘수도 없었고 억지를 쓰며 문을 열려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한 세대를 귀하게 살았던 드문 여성 지성인이요, 사랑스러운 어머니가 공적 기관의 안전 불감증과 무책임으로 희생되었지만, 생명을 향한 고귀한 마음이 희미해진 사회의 ‘오염된 상상력’ 안에서 허투루 보도되고 그려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 사회를 향한 안타까움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귀한 생명을 앗긴 일을 자신의 편의와 오도된 입방아의 소재로 삼아선 안 됩니다.

죽음을 비웃는 오염된 상상력을 거둬내고, 죽음에서 생명의 신비와 깊이를 바라보는 청명한 상상력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로사 교우님의 재 앞에서 다짐하며 드린 기도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이 사회를 향해 던지는 호소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