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 하느님 자비의 선순환

Sunday, September 17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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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하느님 자비의 선순환 (마태 18:21-35)

그리스도교를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 하면 신앙인은 자못 뿌듯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사람들이 험악하게 내뱉는 ‘응징과 심판’이라는 단어가 앞말을 삼켜버리기도 합니다. 두 별칭 앞에 ‘하느님’을 붙이곤 해서 혼란은 더 깊어집니다. 이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혼란스러운 신앙을 바로 세우며, 자비로운 하느님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신앙은 억울한 마음과 앙갚음의 악순환을 끊고, 하느님 자비의 선순환에 자신을 옮겨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삶에 흐르는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십니다. 유명한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 명령은 근거와 의도가 분명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후예 라멕이 자신을 해치면 “일흔일곱 갑절로 보복하리라”는 협박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창세 4:24). 자기 중심주의에서 나온 질투와 악행, 두려움과 보복의 악순환은 사회 안의 갈등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대결과 전쟁놀음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어디에서든 이를 멈추도록 끊어서 궤도를 돌리는 일이 인간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용서와 구원의 선순환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일곱 번 용서’는 인간이 행동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일흔 번’을 곱하여 인간의 셈법을 훌쩍 넘습니다. 하느님의 셈법이라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셈법은 아무리 너그러워도 제한과 조건에 걸려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흔듭니다. 불행하게도 그 셈법은 그에 따른 판단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셈법은 자비의 셈법입니다. 신앙인의 구원은 응징과 심판이 아니라, 모두 함께 누리며 축하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 길이 억울하고 힘들다고 느낀다면, 오히려 우리가 이미 구원의 선순환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용서는 종교 감정의 영역과 개별적인 인간관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비유 이야기는 경제 문제를 다룹니다. 일만 달란트의 탕감과 백 데나리온의 빚 독촉의 비교는 천문학적 부를 누리는 이들이 하루 생활비에 아둥바둥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현실의 고발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는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자비의 선순환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더 많이 지닌 이들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고, 더 많은 은총을 경험한 이들은 더 깊은 신앙의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신앙의 은총과 사회 안의 책임을 분리하려는 태도는 예수님의 길에서 벗어난 행동입니다.

신앙인은 오늘 읽은 구약의 요셉 이야기처럼, 눈물의 참회와 고통스러운 용서로 악행과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며 살아갑니다. 형들이 흘린 참회의 눈물은 우리가 받은 세례의 물입니다. 오늘 성당 입구에서 십자성호를 몸에 그으며 적신 물입니다. 우리는 이 눈물로 묵은 감정과 세상의 셈법이 만든 악순환을 끝내기로 다짐합니다. 용서는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의 눈물이 참회의 눈물과 만날 때 새롭고 거룩한 일이 펼쳐집니다. 그 눈물은 생명의 물로 변화하여 우리를 씻기고 먹이며 우리를 하느님 자비의 삶에 참여하도록 이끕니다.

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Sunday, August 13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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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마태 14:22-33)

희망은 고난으로 단단해집니다. 신앙은 풍파로 흔들리는 삶의 진실 안에서 자라납니다. 믿음은 여리고 아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성큼 다가옵니다. 삶의 상처는 쓰라려서 우리를 주저하게 하지만, 잠시 멈추어 세상의 아픔까지 헤아리게 합니다. 새로운 용기와 신앙의 은총은 여린 상처 안에서 조용히 솟아오르려 꿈틀거립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셨다는 오늘 복음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이어 나오는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을 흔드는 상처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참담한 죽음 탓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뱃속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던 사이였습니다. 두 분은 세례로 연결되었고, 요한이 갇히자 예수님께서 세상 전면에 나서셨습니다.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인간이 처절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주님은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 속에서 요한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홀로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병자들과 배고픈 이들이 따라나섰을 때, 그들의 처지가 마음 아팠습니다. 친구를 잃은 슬픔 속에서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슬픔의 눈길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바라보며 펼치신 성찬례였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슬픔을 안고 땅과 하늘이 만나는 거룩한 시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쟁으로 몸부림치며 성취를 향해 달음질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려고 멈춰서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상처와 슬픔을 하느님께 내보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희망과 신앙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기대와 달리 ‘조용하고 가녀린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듯이,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상실 안에서 눈물의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우리를 넘실거리며 위협하는 파도는 절망과 상실의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것을 피하며 허둥댈수록 그것들은 우리를 더욱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그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눈물 속에 내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의 바다에 몸을 던져서 그 눈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깨닫고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삶의 고난과 상실을 잊으려 하고 귀찮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삶의 무게가 파도가 되어 그를 두렵게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과 행복에 눈을 팔 자,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배고프고 가녀리고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깊은 슬픔과 눈물을 살피고, 함께 밥을 굶고, 함께 밤을 새우며 함께 깊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그 눈물의 바다 위를 걷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슬픔과 상처의 눈물 위를 예수님과 함께 걷는 신앙인인가요?

[전례력 연재] 눈물의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Saturday, July 2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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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7월 22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막달라 마리아는 성서 인물 가운데 가장 야릇한 시선을 받는 성인일 테다. 예수와 특별한 인연 때문에 역사는 다양하고 극적으로 성인의 삶과 운명을 상상했다. 예수의 연인으로 착색하여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에 발견된 고대 파피루스 조각에서는 ‘예수의 아내’라는 표현이 나와 떠들썩했다. 거기에 나온 ‘아내’를 막달라 마리아로 섣불리 단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몇 년 후 그 파피루스는 가짜로 판명 났다. 소설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은 이런 상상력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그렇다면 복음서와 교회는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까?

막달라 마리아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그는 예수와 함께 여행하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자기 돈을 들여 예수의 선교를 돕던 사람이었다. ‘일곱 마귀’로 고생하던 그를 예수께서 구해주신 뒤에 그리했던 것 같다. 이 ‘일곱 마귀’의 정체는 알 수 없다. 학자들은 정신이나 육체에 깃든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이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서방 교회는 복음서 이야기를 엮어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 몸을 파는 여인으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예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보았다. 이 사건이 벌어진 한참 뒤에 이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를 풀어 닦아드린 아름다운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온다. 참회와 헌신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중세교회는 이 여인에게서 신앙인의 모본을 찾고는, 그를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물이라고 멋대로 결론 내렸다. 12세기 때부터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이런 상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묻힌 현장에 있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의 첫 증인이었다. 모든 복음서의 한결같은 기록이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는 향유를 들고 무덤을 찾았다. 그런데 시신이 없어져 그 기회마저도 사라졌다. 마리아는 상실과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서 예수를 다시 만났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의 음성을 알아들었고,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

다른 열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이 여성이 다른 열두 남성 사도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했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여기며 존경했다. 서방 교회도 나중에는 그를 ‘사도들을 향한 사도’라고 불렀다. 서방 교회는 최근에야 동방 교회를 따라 축일을 7월 22일로 정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한 분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테오토코스)로, 다른 한 분은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불렸다. 예수를 신실하게 따랐던 두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이 걸어야 할 길이다. 신앙인은 예수를 마음과 가슴에 품은 사람이다. 신앙인은 예수를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 연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삶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 전체를 대면하면서 그 안에 깃든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1. [성공회 신문 2017년 7월 22일 치 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