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 ‘뒤를 돌아보지 않는’ 나그네 길

Sunday, June 26th, 2016

wandering-jews-for-jesus-600.jpg

신앙 – ‘뒤를 돌아보지 않는’ 나그네 길 (루가 9:51~62)

복음은 종종 우리가 바라는 기대와 어긋나기도 합니다. 간절한 소원을 품고 성당에 들어왔는데, 전례에서 들려오는 복음은 우리에게 매우 낯선 명령을 내립니다. 지친 마음과 몸을 위로하러 찾았는데, 복음의 풀이인 설교는 우리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더 복잡하고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설교자도 사람을 괴롭히려는 마음을 품지 않는데, 하느님께서야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외면하실까요?

다만, 신앙의 길은 우리가 일상에서 평범하게 기대하는 것 너머를 바라볼 때 열립니다. 우리 생각을 초월한 공간을 향해 몸을 한 번 맡겨보겠노라고 굳게 마음먹을 때, 우리 소원과 위로의 길이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음을 결연하게 다지시고’ 새로운 일이 펼쳐질 ‘예루살렘’으로 길을 걷습니다. 권력과 부의 집착이 쌓은 ‘옛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자기 포기와 헌신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건설하시려는 의지입니다. 그 길목마저 쉽지 않습니다. 낯선 땅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며,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낯익은 관습과 땅을 지키는 사람의 ‘냉대’마저 받아야 합니다.

사람 마음은 거의 똑같습니다. 자신을 환대하지 않으면 섭섭하고,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분개합니다. 종교와 정치는 더 위험해서 믿음과 이념이 다르면 쉽게 정죄하고 심판하려 듭니다. 제자들처럼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는 분노가 우리 사회와 종교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태도를 호되게 꾸짖습니다. 그곳에서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올 테니까요.

예수님은 심판의 분노를 우회하고, 집착을 버리는 자유의 길을 걷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 말씀은 신세 한탄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여우와 새’가 상징하는 생존 자체가 목적인 동물의 질서를 떠나고, ‘굴과 보금자리’가 뜻하는 안위의 집착에서 벗어난 선택입니다. 신앙의 길은 ‘나를 따르라’는 초대에 응답하여, 세상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삶의 쳇바퀴와 자신이 세운 기대에서 실제로 떠나는 연습입니다. 과거의 부채감과 죄책감에서 자신을 풀어주어 자유를 얻는 훈련입니다. 자신과 자녀, 가족과 친구 관계에도 해당합니다.

예수님의 조건이 마음에 걸리나요? 부모 장례도 못 치르고, 작별 인사도 막는 냉혹한 주문은 당시 상황에서 나온 과장법입니다. 엘리야도 제자 엘리사에게 작별 인사의 기회는 주었습니다. 제자가 되려는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악의 유혹은 선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일 때 파고들어 번져갑니다. ‘이쯤이야’ 하고 눈 감아서 미끄러지고 망가지는 일이 세상에 숱합니다. 당연하고 익숙한 질서, 그리고 과거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다 보아서는” 신앙의 길이 계속 흔들린다는 경고입니다. 우리 삶에 새로운 사고와 행동이 필요하다는 촉구입니다.

신앙의 길은 체험과 신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성을 결연하게 떠날 때 시작합니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스스로 낯선 나그네가 되어 새로운 만남에 자신을 여는 길입니다. 처음에는 괴롭고 불편한 길처럼 들리지만, 곧 여행의 새로운 은총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처럼 신앙의 길을 걷는 나그네입니다.

복음 – ‘귀에 거슬리는’ 진리

Sunday, August 23rd, 2015

복음 – ‘귀에 거슬리는’ 진리 (요한 6:56~69)1

성당 입구에는 세례대나 성수대가 있어서, 들어올 때 성수를 몸에 찍으며 세례의 은총을 되새깁니다. 세례 때 약속했던 대로, 죄의 과거에서 몸을 돌이켜서 구원의 제대를 향해 순례하겠다는 다짐과 행동이 은총의 첫걸음입니다. 성당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분리된 공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분리와 구별을 ‘거룩함’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상식과 잣대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구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삶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우리를 더욱더 격려합니다. 어둠과 빛, 세상과 진리, 그리고 먹어도 죽을 빵과 영원한 생명의 빵을 구별하고, 빛과 진리와 생명을 선택하라는 부탁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에게서 이해하기 쉬운 ‘말씀’과 따라 살기 쉬운 ‘길’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길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못마땅하고’ 귀에 ‘거슬리도록’ 불편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61~62절). 세상과 달리 자주 손해 보고, 더 참고,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보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선택과 은총이 만나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불편한 말씀과 길을 따르겠다고 작정할 때, 새로운 삶, 세상을 변화하는 삶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우리 삶을 ‘영원한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 신앙의 출발입니다. 불편한 선택을 제거하고 손쉽고 값싼 축복을 남발하는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기대는 오히려 신앙을 ‘배반’하는 길로 빠집니다(64절). 실제로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른바 번영과 축복의 종교를 기대하는 이들을 두고 예수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67절).

베드로의 당찬 대답은 우리 대답이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겠습니까?” 이 대답은 우리가 몸담은 교회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작고 불편하고 어렵고 못마땅하고 거슬리더라도, 우리 교회가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지니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오해받고 배반당했던 예수님을 우리 안에 성체와 보혈로 모시고, 세상에서 배척받은 사람들, 낯선 사람들까지도 품으면서 주님 걸으셨던 길을 뚜벅뚜벅 뒤따라야 합니다.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의 부탁대로 우리는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하고, 평화의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지니고 걷습니다. 여기에 우리와 우리 교회의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Christ of the Breadlines.jp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23일 연중21주일 주보 []

소명의 예복 – 성 버나드 축일

Thursday, August 20th, 2015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 축일 / 연중 20주일 목요일

판관 11:29~40 / 시편 40:5~13 / 마태 22:1~141

2015년 8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축일 본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주님의 종 클레르보의 버나드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의 사랑을 향한 불꽃을 켜게 하시고 주님의 교회에서 타올라 비추는 빛이 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그 사랑과 수련의 정신으로 타올라 주님 앞에 선 빛의 자녀로 이 세상을 걷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참으로 보고 싶거든, 먼저 들으십시오. 귀로 들어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클레르보의 버나드). 아멘.

저는 방금 오늘 기념하는 클레르보의 버나드 성인의 말을 인용하여 이 시간을 열었습니다. 다시 나눕니다. “참으로 보고 싶거든, 참으로 알고 싶거든 먼저 들으십시오. 귀로 들어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들어야 새로운 앎이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3천 년 전, 사회의 혼란과 전쟁의 시기에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눈물을 머금고 지켰던 입다 장군과 그의 딸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하느님의 선교 사명을 몸소 안고 분투하셨던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우리는 900년 전, 교회의 부패와 혼돈, 기근과 전쟁의 시기를 살았던 버나드 성인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42년 전,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을 낳고 기르시고 보살피다가 하느님 품에 다시 안기신 이** 교우를 기억합니다.

이 역사의 이야기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과 관련돼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다시 말해 소명을 벗어난 신앙인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연고로든지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삶의 어떤 이유에서든지, 신앙의 좋은 습관에서든지 여러분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이 아침의 제단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의 경험을 통해서든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는 소명을 받았고, 참으로 좋은 자녀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저처럼 일생, 교회를 자기 집으로, 자기 몸으로 섬기라는 소명을 받아 그 직무와 책임을 진 성직자도 있습니다. 그 직무와 책임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듯 모르듯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소명을 식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역사 안에서 우리보다 먼저 살다간 삶의 귀를 기울이면서 여러분 자신의 소명, 저 자신의 소명을 다시금 생각하고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그 삶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새롭고도 도전이 되는 깨달음을 얻는 시간입니다.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이스라엘의 장군 입다는 암몬 군대와 전쟁을 벌이면서 난처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장군 입다는 하느님께 청원하고 서원합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신다면,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며 가장 먼저 달려오는 제 식솔을 하느님께 바치겠습니다. 결국,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승전보를 들은 장군의 딸이 가장 먼저 나와 아버지를 반겼습니다. 입다에게 승리의 기쁨은 잠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외동딸을 바쳐야 하는 현실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옷을 찢으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하느님께 약속한 것이니 자신이 따르겠노라는 순종으로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순종은 이처럼 위로의 힘을 가졌습니다.

Jephthah.png

그러나 더 큰 도전과 깨달음은 소명의 대가와 본질입니다. 3천 년 전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은 장가 잘 가고 시집 잘 가서 아이들 많이 두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자기 개인의 학문이나 직업적인 성취, 자기 소원 성취로 생각합니다. 재산이 불어나고 좋은 곳에 취직하고 승진하여 남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입다의 딸이 받은 소명의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의 소명은 아버지가 옷을 찢으며 소리쳐야 할 만큼 세상 사람이 보기에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소명이 참된 것인지를 식별하는 기준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인으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 삶의 고생과 고통을 자동으로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인이기 때문에 더 손해 보며 살아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늘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가족 간의 갈등 뿐만 아니라, 가족이 지닌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이 너무도 깊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프거나, 부모님이 세상을 먼저 떠나 이별해야 하는 슬픔은 가족을 이루는 인연과 소명이 남겨준 아픔입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늘 멋진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선교 사명을 간직한 교회가 되도록 분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과 꿈이 꽃피는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위한 도구로 전락합니다. 이때 교회는 자신도 불행하고 하고 남도 불행하게 하는 지옥 같은 곳이 되고 맙니다. 순종과 소명에 관한 식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버나드 성인은 마음 아프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온갖 좋은 의도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네.”

우리가 받았다는 신앙인의 소명, 가족의 소명, 교회 일꾼의 소명에 깃든 어둡고 아픈 일들을 껴안지 않고 피하면서, 자신의 어둠과 약점을 숨기면서, 자신의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을 방어하면서 마음을 닫고 귀를 닫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영역에서 즐거움으로 안주하려 할 때,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지옥으로 이끌고 맙니다.

입다의 딸이 보여준 놀라운 평정심과 아버지를 향한 위로는 소명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당 시대가 추구하고 환호하던 삶의 가치를 거절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로써 입다의 딸은 이후에 나온 수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삶을 미리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삶을 홀로 살았고 세상의 안위와는 다른 박해와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복잡한 두 이야기가 하나로 섞여 있습니다. 첫째는 주인의 아들 혼인 잔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잔치에 초대받았는데도 오지 않고 매우 무관심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초대를 적극적으로 거절하고 심부름꾼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대신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알레고리(우화)이기 때문에 그 뜻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았는데도 사람들은 그 잔치를 제대로 즐길 생각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잔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잔치에서 먹고 노는 새로운 방법을 나누려 해도 무관심합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대로 살 테니 참견하지 말라고 오히려 나무라고 구박합니다. 새로운 변화의 노력에 무관심합니다. 오히려 이를 타박하고 비난합니다. 이러면 답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희망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 경력과 가족 대대로 신앙 경력이 얼마나 길든, 그들은 교회를 책임지거나 이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예 새로운 사람들로, 지금껏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들도 하느님의 잔치, 하느님의 교회, 이 성당을 새롭게 채우겠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래도록 이 성당을 지킨 우리라면 이제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무관심과 투정과 타박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우리도 참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서서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이 잔치에 초대해야 하지 않을까요?

두 번째 사건은 손님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여러 의미를 비추는 비유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뽑자면, 우리가 하느님의 잔칫상, 하느님의 성전, 하느님 교회의 신앙인과 일꾼으로서 우리가 갖춰야 할 태도와 자격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걸맞은 내용을 갖춰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초대했으니 오합지졸이든 뭐든 괜찮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은 예복을 입지 않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이끌기 위해서 자신의 헌신과 성실, 그리고 신앙과 신학의 내용을 갖춰야 합니다. 이에 나태하거나 불순종하거나, 부르심은 내가 받은 것이라며 행동하는 일은 예복을 입지 않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오늘 복음서에서 이미 들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쫓겨나게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클레르보의 성인 버나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신앙인과 교회, 그리고 성직자들을 서슴없이 질타했습니다. 교회의 게으름은 신학의 게으름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교회 일꾼의 게으름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 성취에 몰두할 때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열심이어도 의도와 꿈이 아무리 좋아도, 그 방향이 어긋났으면, 그것은 지옥으로 향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을 찾는 행동은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남이 자신의 지식을 알아줬으면 해서 지식을 구하는 행동은 허영심에 불과합니다. 남을 섬기고 키워주기 위해 지식을 찾고 연마하는 행동, 이것이 사랑입니다.”

버나드 성인은 신앙인과 교회 일꾼들이 보인 게으름을 질타했습니다. 교회의 속을 꽉 채우는 지식, 교회를 섬기며, 신앙인을 끌어올리는 지식이 아니고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도 담지 말라는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생전에 일군 수도회와 교회의 개혁으로 큰 존경을 받았지만, 거만하고 완고하고 엄격하다는 비난에도 평생 시달려야 했습니다. 십자군과 관련하여 성인 자신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의 수도회, 엄률 시토회의 수련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성인은 쓰러져가던 중세에 새로운 빛을 만들어 냈습니다.

S-Bernard.jpg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신학, 시시덕거리며 자기 주위에서 안위를 이끌어 안주하는 신앙은 오히려 참 물맛을 못 느끼게 합니다. 참 술맛을 음미하지 못하게 합니다. 신앙의 참 기쁨과 즐거움을 방해하며 우리 소명의 식별력마저 흔듭니다.

42년, 아니 그 이전 이후에도 계속 돌아가시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우리 신앙의 선배와 동료들은 궁핍과 곤궁 속에서 우리를 키워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교회를 지키는 소명이 주는 무게를 그들 어깨에 감당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나마 누리고 있는 교회의 처지, 우리 가족과 살림의 처지는 그들이 받은 소명과 헌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와 시간을 이유로 이 땀과 수고를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찬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기억하겠다고 우리 신앙인은 이런 망각에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시 3천 년 전 입다의 딸이 받아들였던 마음 아픈 소명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초대한 잔칫상에 함께 모여 들었고,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모두 초대하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게으른 신앙과 신학을 개혁하며 신앙의 빛을 다시 키웠던 버나드 성인의 삶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삶을 이끌고 지탱해 주었던 가까운 우리의 선조,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를 기념합니다.

“참으로 보고 싶거든, 참으로 알고 싶거든, 이 모든 먼저 듣고 기억하십시오. 귀로 들어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들어야 새로운 앎이 열립니다. 그렇게 새로운 하느님 나라가 열립니다.”

이 소명에 관한 기억과 배움과 헌신이 우리의 예복입니다. 예복을 입고 여기 이곳에 주님께서 마련하신 성찬의 잔치에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요?

  1. 성인 축일 본문이 아닌 평일 성찬례 성서 본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