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 –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Sunday, October 5th, 2014

출애 20:1~4,7~20 / 시편 19 / 필립 3:4b~14 / 마태 21:33~46
2014년 10월 5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일 오전 9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지난 주일 복음 말씀 끝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해가 짧아지고 한 해의 막바지를 향해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이 선언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시간을 저마다 달리하여 꽃피우는 시간을 걷습니다. 유년과 청년 시절을 걷기도 하고, 열매가 여무는 장년의 시간을 보내기끝도 하며, 그 열매의 쓴맛과 단맛을 느끼는 중년과 노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또한, 저무는 해의 아름다운 빛에 우리 인생의 아름다우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황혼을 비추기도 합니다. 이 세월 속에서 우리는 삶의 수많은 경험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과거의 어려움을 이겨내서 여기까지 온 분도 계시고,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서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민을 안고 교차하며 걷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걸음걸이가 어떤 것이든, 성서는 우리가 걷는 모든 행진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걸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처럼, 그 나라는 쉬지 않고 달음질쳐야 하는 곳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주신 법을 잘 따라서 약속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우리 인생의 목표는 분명 하느님 나라입니다. 교회로 모인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는 순례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당연한 확신은 이제 예수님 때문에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들어가고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도덕적 잣대에서 비난을 받던 세리들과, 개인의 도덕적 잣대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니 당황스럽습니다. 성서를 정직하게 읽으려는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하느님 나라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다시 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오늘 우리는 이어지는 다른 비유의 말씀 앞에 섰습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인”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고 버티면서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사악한 소작인 이야기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와 많은 설교자는 이 비유에 누군가를 하나씩 대입하면서 해석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며, 소작인들은 유대인이며, 주인이 보낸 종들은 예언자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라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때에 이르러 유대인들을 버리고 도조를 잘 내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소작인이니 주인에게 도조를 잘 내는 사람이 되자는 말로 설교의 교훈이 끝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세월이 흐르면서 엉뚱하게 적용되곤 했습니다. 이 대입법에 따르다 보니, 소작인인 유대인들은 주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들이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더욱 커지자, 교회는 이 죄목으로 유대인들에게 들씌워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반유대주의, 유대인 차별주의가 등장했습니다. 1900여 년 동안 발전한 이 반유대주의 결과는 바로 독일 나치의 히틀러가 벌인 유대인 학살이었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겪었던 현대의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워서,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사람을 내쫓고 장벽을 치며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항하자 이들을 향해 총을 쏘고 민간인들에게도 폭탄을 던지는 일을 서슴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서로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복수를 하는 형국입니다.

이 비극적인 경험은 성서 이야기에 누구를 끼워 넣어서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비난하는 일에 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본문을 예수님의 뜻과 이후의 역사에 비추어서 다시 봐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비유를 교리에 따라 대입하지 말고 좀 더 확대해야 합니다. 자신의 눈,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넓이를 조금이라도 헤아리면서 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고 들으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이요, 우리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창조의 질서요, 우리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정치와 경제의 질서입니다. 포도원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맛있는 포도 열매를 맺어서 우리에게 달콤한 영양을 주어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쌓아놓으면 썩어버릴 탱탱한 포도를 술틀에 이겨서 포도주를 만들어 우리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더욱 널리 선사하려는 것입니다. 생명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이 포도원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의 목적입니다. 이 포도원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포도원은 탐욕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소출을 나누지 않고 쌓아놓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누가 그에 항의할라치면 이를 내쫓거나 두들겨 패는 폭력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다 가로채겠다는 생각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기쁨을 나누며 누리려던 포도원이 탐욕과 폭력과 전쟁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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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손쉬운 대입법을 피해서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이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탐욕과 폭력과 전쟁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그 안에 의식 무의식으로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춰봐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에 영양을 공급하는 일을 막고 있지 않은지, 다른 사람과 나눌 기쁨을 울타리치고 독차지하지 않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서 신앙이 출발합니다. 여기서 영성이 뿌리를 내려 깊어지고 바른 식별이 자라납니다. 그 신앙과 영적인 식별로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이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폴 크루그먼 교수가 지난 9월 30일 뉴욕 타임스에 쓴 칼럼을 나누고 싶습니다. 칼럼의 제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자들”(Our Invisible Rich)입니다. 핵심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시민들에게 주요 대기업 임원의 연봉이 일반 노동자보다 얼마나 높은지를 물어보는 설문 조사를 한 적 있다. 미국 응답자는 대체로 대기업 임원이 그 회사 노동자보다 30배 정도 더 많이 벌 거로 추정했다. 이런 추측은 1960년대에는 대략 실제 현실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 격차는 급증해서 오늘날 고위 임원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그 회사 평균 노동자의 300배 정도이다. 40년 전인 1975년 미국 상위 1% 부자가 미국 전체 자산 총합의 25%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40%로 늘었다. 그리고 이 늘어난 자산 대부분은 상위 0.1%에게 돌아갔다. 미국인은 우리 세상의 지배자들이 얼마나 벌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으며, 부의 집중도를 과소평가한다.”

경제학자만이 세계의 현실을 이렇게 진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구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성직자들이 가장 영향을 받은 구약학자로 입을 모으는 월터 브루그만 교수는 최근 행한 “구약과 설교”라는 강연에서 현 세계를 이렇게 통렬하게 진단했습니다.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이 시장 이데올로기라는 전체주의 안에서 살아간다. 특히 내가 사는 미국은 시장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군사적인 힘을 동원하여, 자신들만 예외적으로 세계를 지키는 경찰이라고 자임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화를 가장하여 이 세계 전체를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이 세계화와 전체주의는 폭력을 부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교대에 선 설교자는 이 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언자의 외침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회중석에 앉은 신자들은 이 현실을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복지와 안녕은 예언자적 설교와 건강한 신앙에 서야 한다. 이것이 이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지탱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공교롭게도 포도원 비유 이야기는 뛰어난 경제학자와 원숙한 신학자가 지적하는 세계의 경제 질서에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비유 이야기는 곧바로 배척과 폭력, 살인과 전쟁이라는 세계 정치의 문제에 닿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는 사회이고, 우리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염두에 두어야 할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에덴동산인 포도원을 생명의 기쁨을 선사하는 포도원으로 회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세계의 여러 개신교회는 이번 주일을 세계 성찬례 주일(World Communion Sunday)로 지킵니다. 우리 성공회와는 달리, 성찬례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개신교계에서 이 날만이라도 성찬례를 지켜보자는 생각에서 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회는 본질적으로 성찬을 나누는 교회임을 잊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동등하게 정의롭게 공평하게 나누면서 한 식구가 되는 세계 공동체인 것을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고, 자기 소유만을 늘리려다 폭력과 전쟁을 일삼는 경제와 정치 질서에 대항하여, 작고 부족한 한 몸, 한 잔을 함께 나누는 일로 일치하자는 깊은 소망입니다.

얼마 전 은퇴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은 성공회의 위대한 전례학자 그레고리 딕스 신부님의 말을 인용하여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찬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이나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합니다. 대신 우리는 ‘성찬례의 인간’ 즉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변화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간 교회로 모여 복음을 읽고, 우리 삶을 봉헌하여 변화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창조 세상을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이 안에서 참된 소작인의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탐욕스럽게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협작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지키려다가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소작인의 포도원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일꾼을 서로 받아들여 서로 수고하고 서로 격려하여 서로 넉넉하게 덤을 주어 보내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길입니다. 우리 땀과 눈물로 맺은 탱탱한 포도의 달콤한 맛을 함께 나누고, 우리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함께 나누어 마실 때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맛보는 성찬의 잔치가 여기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멘.

시간, 순종, 참여 – 성 베네딕트 축일

Friday, July 11th, 2014

성 베네딕트 축일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사제)

성 베네딕트(St. Benedict of Nursia, c.480~c.540)는 서방 교회 수도회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6세기에 다양한 수도회 전통을 집대성하여 베네딕트 규칙서와 수도회를 만들었고, 이후 많은 수도회의 모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되다’는 뜻의 이름을 지닌 베네딕트 성인은 로마 귀족 출신이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이런 계층이 주도하던 사회와 문화에 큰 의문을 품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베네딕트 성인의 삶과 신앙과 신학은 ‘베네딕트 규칙서’에 가장 잘 드러납니다. 후대 사람들은 베네딕트의 규칙서와 수도회가 서구 유럽의 문화와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합니다. 뛰어난 교부학자이자 영성가인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2012년 은퇴)께서는 베네딕트 영성 전통을 ‘시간의 균형, 순종, 참여’의 측면에서 요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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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시간은 노동과 공부와 기도로 균형 있고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시간은 무엇을 성취하는 데 대부분 사용되고, 그 피로를 풀려고 지나치게 노는 일로 채워지기 일쑤입니다. 열심히 살기는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사는 시간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잠시 멈추어 “기억을 되살리고 지성을 깊이 하고, 사랑이 성장하도록 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공부와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밖에 있는 남을 발견하고, 하느님을 즐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순종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고집과 생각을 포기하는 훈련입니다. 순종은 굴종이 아닙니다. 남에게 경청하는 일이 순종입니다. 지위고하, 나이, 신분을 넘어서 서로 경청하는 행동이 진정한 권위의 시작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경쟁적인 싸움을 거절하는 한편, 자신의 삶과 조직에 균형과 억제를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받아들여야 권위가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은 획일화시키려는 관료적 힘에는 반드시 저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피어나도록 돕고 거룩함을 위해 서로 격려할 때 참 공동체가 마련됩니다.

참여는 사회와 조직의 삶에서 저마다 소임을 찾아 책임을 다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소임을 누구에게 맡겨놓고 방관해서는 권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면 누군가는 계속 수동적인 삶을 강요받게 되고, 그 영혼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 상처 난 영혼에서 난폭한 분노와 테러리즘이 나옵니다. 중앙집권적인 문화는 참여가 없는 문화입니다. 관료정치는 비인간적인 정치입니다. 이에 맞서는 힘과 내용을 갖추고 활발히 연구하고 논쟁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요 참여입니다.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는 베네딕트 영성을 통해서 성서의 인간학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 섬기고, 모든 이를 위해 각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을 존중하고 격려하며, 이로써 관상적인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성 베네딕트 규칙서 우리말 번역은 곳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베네딕트 영성 입문에 좋은 책으로는 성공회 신자이자 베네딕트 영성 전문가인 에스더 드 왈이 쓴 “성 베네딕트의 길”을 추천합니다.

  1. 7월 6일 주보에 실은 글을 성인 축일에 맞춰 약간 수정하여 올린다.(↩)

제도 종교와 영성이 충돌할 때

Wednesday, April 18th, 2012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10년을 돌아보는 글에서 적은 바 있거니와, 그분의 놀라운 영성과 지성이 세계 성공회 안에서 일어난 갈등을 극복하려던 대주교직 수행과 빗나갔던 사실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아쉬움과 낭패감의 원인은 여럿이겠지만, 나는 그분이 평소에 주장하던 예언자적이고 복음적인 삶에 대한 초월적 영성이, 제도의 일치라는 오래된 관념과 관습에 짓눌린 탓이라고 보았다. 게다가 세계 성공회의 식민적 유산과 그 역사에 대한 세심한 식별과 분석을 간과한 점도 지적했다.

미국 성공회의 신학자이자, 미국 종교 및 교회 현상을 연구하는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lter Bass)의 글을 소개한다. (한국에서 강연했을 때, 이분을 몇 번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시는지들 모르겠다.). 내 생각과는 약간 다르지만, 현재 서구 사회의 종교 현상의 큰 흐름으로 지목되는 “Not Religious, But Spiritual”(‘제도적인 종교인이기를 거부하고, 영성을 추구한다’)의 맥락에서 살피는 의견과 그 전개가 매우 설득력 있다.

배스는 세계 성공회의 갈등과 분열을 동성애 문제로 벌어진 교회 내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서구 사회에 흐르는 매우 중요한 긴장, 즉 종교와 영성의 긴장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장 리더십에 대한 옛 이해와 새로운 이해의 갈등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시대적 요구에서 나온 것이라 이해하더라도, 이제 그마저 제각기 자기 권력을 탐하는 틀이 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문제는 닫힘과 열림이다.

한편, 배스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 지도자에 대한 기대는 분명했다. 주교는 평신도를 지도하면서, 복종과 희생과 영웅적 신앙 행동을 촉구했다. 주교는 위에서 아래로 신앙을 명령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혀 다르다.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제도적 기관들은 두 패로 나뉘어 갈등한다. 한쪽에는 예로부터 익숙하고 검증된 리더십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통제, 획일성과 관료제가 그 특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는 검증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고 그 미래를 향한 약속을 열어주는 리더십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풀뿌리의 권한, 다양성, 관계적인 네트워크가 그 특징이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분열이 아니다. 오히려 제도와 영의 분열이다.

하향식 구조는 저물고 있다. 성공회가 겪은 갈등을 보면, 영적인 리더십과 제도적인 리더십이 분명히 구분된다. 영적인 리더십, 그 새로운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기대는 기존의 관습적인 주교의 역할과는 구별되고 갈등한다.

배스는 이 문제를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에게서도 발견한다. 그는 분명히 탁월한 영성가요 신학자이다. 대주교로서 그는 세계 성공회의 “영적인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는 성공회라는 종교 기업의 CEO로 행동하며, 사업 중심, 이익 중심, 자산 유지, 새로운 시장 개척에 관심을 두었다. 이것은 생동감 있는 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관료적인 기업체 문화이다.

배스는 영성과 제도의 갈등과 그 변화를 관찰한다.

역사의 시간 속에서 신앙은 늘 하향적이었다. 영적인 힘은 교황이나 대주교가 신자들에게 내려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제가 경건한 신자들에게, 목사가 교회 회중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변했다. 사람들은 영성은 하느님을 찾는 풀뿌리 모험이며, 진정성을 담은 통찰과 영감의 여정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제도적인 교회나 회당, 사원에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성은 아래부터의 신앙을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신학과 관습에 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두려운 나머지, 세계 성공회를 포함한 많은 제도적 종교들은 이를 명령과 통제로 고치려 한다. 그리고 그 조직을 더욱 위계적인 권위주의로 몰아가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섬기는 열망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이러면 제도적 종교는 더더욱 어려워지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더 나은, 더 정의로운, 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큰데도, 교회라는 제도, 국가, 경제가 이런 열망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영성과 제도에 놓인 틈이 문제다. 이 틈을 메꾸고 그 제도적 기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새롭게 등장하는 문화 경제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사실 영적 쇄신은 곳곳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기존 교회와 기존 신자들이 관습에 사로잡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그동안에 제도로서 종교와 교회는 죽어간다.

이 시대에, 영적 쇄신은 벗들과 신뢰를 나누고 서로 배우는 대화 속에서 일어난다. 새로운 일은 거리에서 커피숍에서, 지역의 작은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정의와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에서 일어난다.

이런 평가와 전언은 세계 성공회와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를 향한 것만은 아니다. 바로 우리 교단, 우리 교회, 그리고 성직자인 나 자신을 향한 것이다.

한편, 풀뿌리 영성에 대한 배스의 낙관을 그대로 우리 교회와 사회에 적용하기를 나는 주저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영성에 대한 관심은 실제로는 개인주의에 들러붙은 영성주의(spritiualism)의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위적인 제도만큼이나 복음적 가치를 해친다. 게다가 풀뿌리의 주인공인 신자들도 여러모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정말로 깊고 풍성한 풀뿌리 영성을 키워내지 않고 또 다른 관습적 신앙 체험을 무기 삼아 섣불리 권위를 부리지는 않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 안에 또아리 튼 관료주의와 권위주의, 관습주의, 세대주의도 교회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만연한 현상이다.

이는 변화의 기로에 서서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 모든 사회와 교회가 씨름해야 할 문제이다. 수구의 탐욕이 새로운 시대를 열리도 만무하지만, 진보연하는 수사와 이미지 뒤에 여전히 만연한 관료주의와 타성으로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