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 – 실패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Sunday, April 2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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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 – 실패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요한 13:31~35)1

“사랑 –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 깨나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며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마음의 상태. 이루어지게 되면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 된다.”

몇 년 전 우리나라 극장에도 개봉했던 영화 “행복한 사전”에 나오는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랑에 관한 수많은 책과 자료를 골몰히 살펴서 단순 명쾌한 설명을 담아 사전을 펴내려는 수고 끝에, 그 단어를 삶으로 체험하면서야 그 낱말풀이가 생명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마음을 들뜨게 하여 “하늘에 오르는 기분”을 마련합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 독서에 나오는 대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 땅의 기쁨을 누리고, 새 하늘로 오르는 희망의 환시는 모두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서로 사랑’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설레고 들뜬 사랑 뒤에는 실패와 상처의 어둠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 직전에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에 이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 가리옷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고 “나간 뒤에” 오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제자들은 서로 사랑과 상호 신뢰를 확인하고 다짐하며 스승의 몸과 피를 나누었지만, 그중 한 명은 곧바로 배신의 길을 걷습니다. 뒤이어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부인할 것입니다.

자신의 복락을 바라며 우리가 다짐하는 신앙은 흔들리기 쉽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맹세하는 사랑은 연약합니다. 굳은 신앙으로 성찬례에 함께한 경험도 서로 배신하는 실패를 막지 못하고, 거친 풍파가 넘실대는 삶 속에서 우리가 약속하는 사랑의 감정은 흔들리고 상처 입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걷는 실패와 상처를 아십니다. 이 처지를 아신다는 사실이 오히려 우리의 위로입니다. 이러한 이해와 위로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자신을 향하고, 자기만 바라봐 달라는 사랑은 ‘옛 것’입니다. ‘새 것’은 자기사랑이 가져온 실패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타인에 눈을 돌릴 때, 타인과 더불어 ‘서로 사랑’을 마련할 때 일어납니다. 이때라야 새로운 생명과 삶이 하늘과 땅에 펼쳐지는 약속이 이뤄집니다.

이 약속을 견디어 사랑을 이뤄내는 조건을 눈여겨 보십시오. 유다는 배신했습니다. 배신은 거대한 결단이 아닙니다. 손쉬운 해결책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한 실패를 받아들이며 함께했던 기억 ‘안’에 머물렀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과 통회를 안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모든 기억과 경험을 괴롭도록 벼리고 담금질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새로워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삶을 자기 몸으로 재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우리 삶의 실패와 절망 속에서 우리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으로 우리는 ‘자나 깨나 여전히 그리워하고 몸부림치며’ 서로에게 머물며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 위로와 격려의 사랑을 더 넓은 세계에 펼치는 일이 ‘서로 사랑’의 선교 명령입니다. 헤아리시고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타인을 초대하며, 자신을 용서하고, 서로 용서하는 용기를 북돋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 삶에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집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4월 24일 부활 5주일 주보 []

예수의 정체 – 신뢰와 사랑의 공동체

Sunday, April 17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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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정체 – 신뢰와 사랑의 공동체 (요한 10:22~30)1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오?” 이 퉁명한 질문에는 낯설고 새로운 사람 예수님을 배척하는 적대의 감정이 물씬 묻어납니다. 오늘 장면에 이르도록 예수님은 앞에서 몇 번이고 “나는 ~ 이다”는 특유의 어법으로 당신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나는 ~ 이다”는 어법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자주 쓰시던 형식이니, 유대인들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습니다. 그의 정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거듭 말했는데도 “분명히 말해 달라”고 다시 요구합니다. 자신들의 기준과 판단에 들지 않으면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낯선 이를 향한 배척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적대감은 사람의 ‘마음을 조입니다’(24절). 멀쩡한 눈과 귀를 막아서 스스로 듣지도 믿지도 못하게 합니다. 이러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볼 리 없습니다. 신앙이 깊어지기는커녕, 신앙에서 떨어져 스스로 만든 편견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맙니다. 더 심해지면, 좁고 완고한 자기주장을 신앙이라 우기기 시작합니다. 특이하고 강렬한 종교 체험, 교리에 관한 근거 없는 맹신, 질문과 대화가 없는 믿음, 자신의 성취를 축복이라고 여기는 일로 빠져듭니다. 이러한 감옥에 갇히지 말라고, 예수님은 신앙의 식별 기준을 다시 세우시고, 신앙생활의 진수를 다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신앙 식별 기준은 ‘받아들여 아는 것’과 ‘받아들여져 속하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이든, 낯선 가르침이든 그 불편한 도전을 받아들여 배우는 일에서 신앙이 출발합니다. 서로 인정하여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속하는 관계가 신앙입니다. ‘목소리’를 알아듣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 이르려면, 수많은 만남과 접촉, 갈등과 화해, 배움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체험과 주장을 조율하며 사귀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조율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그러니 배움과 사귐의 공동체가 신앙의 식별 기준입니다. 이 관계의 가장 깊은 상태를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라는 사랑의 일치 선언으로 가름하십니다. 서로 다른데도 그 안에서 함께 일치하려는 신앙 공동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정체이며, 하느님과 일치를 체험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신앙인은 이 부활의 공간에 ‘속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의 진수는 이 공동체 속한 사람들의 삶과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새롭고 낯선 이를 받아들이고, 대화하고 배우며, 사귀어 서로 목소리를 알아듣는 신뢰의 삶입니다. 이 배움과 실천의 공동체가 서로 신뢰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움직이는 상태, 이것이 바로 영원히 사는 부활의 몸입니다. 부활의 생명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신뢰의 공동체로 태어난 생명은 누구도 빼앗아 가거나 부술 수 없습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 되려는 인간의 간절함이 만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를 향한 사랑이 넘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4월 17일 부활 4주일 주보 []

부활하는 사랑 – 용서와 환대의 밥상

Sunday, April 1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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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사랑 – 용서와 환대의 밥상 (요한 21:1~19)1

그리스도교 신앙은 낯선 나그네가 던지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받아들이는 순간에 펼쳐집니다. 낯익은 것을 떠나 새롭고 낯선 일에 마음을 열고 새 사람을 만나는 일로 교회는 성장합니다. 낯선 사람이 피워놓고 기다리는 모닥불에 지치고 젖은 자기 몸을 맡길 때, 그동안 믿고 누렸던 과거에서 벗어나 어색하고 불편하고 초라하기까지 한 밥상에 초대받아 함께 음식을 마련하고 나눌 때, 우리 삶은 새로운 기운을 회복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아침 밥상의 풍경이 주일에 모여 나누는 우리 성찬례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낙향하여 어부로 돌아옵니다. 밤새 그물질했으나 허탕입니다. 삶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고 실패가 따릅니다. 실패에 따른 낙담과 배신에 따른 죄책감이 압도하면 익숙한 일도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그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그물 내릴 곳을 알려주자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못 잡았다”고 자신의 한계와 실패를 인정할 때, 그동안 자신이 세운 목표와 욕심으로 가렸던 눈의 비늘을 뗐을 때, 오히려 새로운 시선과 깨달음을 얻습니다.

낯선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실마리는 그동안 자기 생각과 고집에 눈이 멀어 살피지 못했던 가까운 곳, 가까운 사람에게 있습니다. 바쁜 삶 탓에, 너무 익숙해서 허투루 대하고 잊고 사는 귀한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낯익어서 낯설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기쁨 속에서든 절망의 아픔 속에서든 여전히 곁에서 동행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낯익어 낯선 얼굴들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몸소 모닥불을 피워놓으십니다. 부끄러움의 바다에 뛰어들어 젖은 채로 떨지 말고, 과거를 불태우고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회복하라는 초대입니다. 손수 아침 밥상을 차리시면서도,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오라’시며 그 밥상을 우리와 함께 만들고 완성하시는 세심한 배려가 돋보입니다. 빵과 생선을 손수 ‘집어주시는’ 주님의 행동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의 손길이요, 우리가 밖을 향해 내밀어야 할 사랑의 손길입니다.

이 환대와 나눔의 밥상에서, 이제 예수님은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온전하게 일으키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사랑 확인은 과거 세 번의 부인이 남겨놓은 죄책감을 완전히 없앱니다. 참된 용서와 화해는 ‘마음이 슬퍼지도록’ 애틋한 상태일 때라야 가능합니다. 또한, 자신을 용서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삶과 세상에 사랑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에 사랑을 다시 세우고, 교회 안에 ‘수많은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끌어안도록 전도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용서하고 다른 이들과 화해하며, 낯설고 새로운 이들을 환대하여 함께 밥상을 차려 봉헌하며 나누는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 사랑의 나눔이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교회의 삶이며 선교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4월 10일 부활 3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