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악령과 대결하는 신앙

Sunday, June 19th, 2016

possessed_by.jpg

폭력의 악령과 대결하는 신앙 (루가 8:26~39)

지난 몇 주일 동안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이 이채롭습니다. 병든 하인을 염려하는 이방인 백인대장, 외아들마저 잃는 저주를 받은 과부, 그리고 행실이 나쁘다고 평판이 난 여인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이 모든 것을 합쳐서 ‘더러운 악령이 떼로 붙은’ 가련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가까이하거나 관심 두지 말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행동이나 처지가 별난 사람들입니다. ‘부정한 이들’과 접촉하여 ‘오염’되는 일은 율법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오염’과 대면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정죄하고 피하는 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면하여 사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일을 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꺼리며 싫어하더라도, 바르고 옳은 일이라면 그리해야 합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생명의 치유와 회복에 관한 일이라면, 어떤 손해가 나더라도 감행하는 일이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오늘 만난 ‘마귀 들린 사람’의 처지가 참담합니다. 옷도 입지 않고 무덤 사이를 오가며 발작을 일으키고 소리를 지르며 괴력을 보이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깃든 갖가지 상징이 뚜렷합니다. 문명과 담을 쌓으려는 미개함, 절망과 죽음을 부추기는 문화, 바른 비판을 두고 참견하지 말라는 억지, 스스로 삼가지 못하여 멋대로 하려는 방종의 그림자가 어둡습니다. 이 ‘악령’의 이름이 ‘군대’라 하니, 당시로는 섬뜩한 이름입니다. 그때 ‘군대’는 포악한 식민지 점령군 로마 군대를 연상하게 합니다. 군대와 무기가 만드는 전쟁이 파괴하는 인간의 참상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오염’에 손을 대실 뿐만 아니라, 이제 ‘군대’라는 폭력의 힘과도 대결하십니다.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폭력은 어떤 것이라도 사람에게 붙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폭력을 당하는 일도 멈추게 해야 합니다. 힘 있는 이들이 약한 이들을 조롱하고 희롱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신앙인은 이런 ‘폭력의 악령’마저 우리 앞에서 무릎 꿇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향한 깊은 연민으로 단호해야 합니다.

이런 일에 손해와 위험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과 폭력의 ‘군대 마귀들’을 없애는 일에 수많은 ‘돼지떼’라는 재산을 잃습니다.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더 큰 손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자기 동네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할 지경입니다. 말이 간청이지, 떠나라는 위협이 분명합니다.

손해와 위험을 무릅쓰고 이 모든 ‘오염’에 관여하고 ‘폭력의 악령’과 대결하며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을 되찾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온전한 우리 자신입니다. 정죄와 혐오, 희롱과 차별, 폭력과 죽음의 사회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맑고 투명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우리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세상에 나아가서 하느님께서 베푸신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실천하여라.”

부서진 틈으로 스미는 구원의 눈물, 은총의 향기

Sunday, June 12th, 2016

Tears_Washing_Jesus.png

부서진 틈으로 스미는 구원의 눈물, 은총의 향기 (루가 7:36~8:3)

여성은 ‘세상의 절반’이라는 말은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무슨 뜻일까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듣노라니 당혹과 충격을 감출 수 없습니다. 무고한 여성이 끔찍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목숨을 잃고, 젊은 여성 교사가 학부형 남성들이 저지른 비인간적 폭행의 무참한 기억을 뇌리에 남겨야 하고, 가난한 여학생들은 자신의 몸을 청결하게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몰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21세기 한국의 민낯이라면, 우리는 문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야만의 시대를 향하는지 모릅니다. 희생자가 된 여성의 사적인 처신을 먼저 들춰내려는 변명마저 스멀스멀 오르는 지경이라면, 온전한 세상을 이루는 ‘절반’을 우악스러운 힘으로 짓눌러 하느님의 창조 질서마저 거부하는 반(反)신앙의 행태입니다.

이미 2천 년 전 일입니다. 여성을 향한 폭력과 차별과 왜곡을 역사의 유물로 만드신 오늘 복음의 사건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나누십니다. 주님은 빈자이든 부자이든, 소위 ‘의인’이든 ‘죄인’이든, 그 누구의 초대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차별 없는 용인을 배반이라도 하듯이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은 ‘행실 나쁜 한 여자’가 벌인 일을 두고, 오히려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성 바리사이파 사람은 이름 있는 ‘시몬’이고, 여기가 어디라고 판을 깨며 밀고 들어온 사람은 ‘근본도 이름도 없는 여성’입니다. 돋보이는 이 대비 속에서 오히려 신앙의 이해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바리사이파는 ‘구별된 거룩한 남성’으로서 율법을 수호하는 사람입니다. 내려온 관습과 율법을 지킨다면서 죄의 경계를 제멋대로 정해서 다른 사람을 쉽게 심판합니다. 사람마다 지닌 복잡하고 난처한 처지를 너그럽게 헤아리지 않습니다. 사람과 어울리되 이익에 따라 관계의 거리를 조정합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완벽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반면, 문제의 주인공은 우쭐대는 유명인사들의 파티장을 침범하는 ‘행실 나쁜 여성’입니다. 세상 풍파에 부서진 사람입니다. 그는 값비싼 향유를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며, 낯선 사람의 발에 입 맞추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닦아드립니다. 지극한 친밀함으로 경계를 뚫고, 차별의 벽을 성큼 넘습니다. 그의 눈물은 무디고 굳어버린 종교를 적시고, 그의 향유는 계산으로 이뤄진 장소에 손에 잡을 수 없는 풍요로운 향기를 선사합니다. 거짓된 웃음의 인사치레에 뜨거운 살의 접촉을 마련하여 머리카락이 휘감는 사랑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이 용기가 여인의 신앙이요,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이 펼치는 은총이요, 용서와 구원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펼치는 구원 선교의 여인들을 소개합니다.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다 셀 수 없는 여인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하느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회복하시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힘없는 사람, 연약한 사람, 부서지고 깨진 사람, 여전히 차별받는 사람이 지닌 상처를 그 자체로 죄의 결과로 말할 수 없다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오히려 그 상처의 눈물과 아픔은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는 통로입니다. 그 깨진 틈으로 은총의 향기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터진 눈물로 우리의 잘못을 씻고 새로운 은총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슬픔에 닿아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

Sunday, June 5th, 2016

Jesus raises the son of the Widow of Nain.jpg

슬픔에 닿아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 (루가 7:11~17)

자녀를 잃은 슬픔은 그 누구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위로의 말을 찾기 어렵고, 자기 몸이 끊어져 나간 듯한 아픔을 겪은 당사자도 그 슬픔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그저 어둠의 구멍 속으로 끝을 모르고 계속 추락하는 느낌일 뿐이라는 증언과 함께 어떻게도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없는 상태를 눈물로만 확인할 뿐입니다. 오늘 성서 이야기는 극한의 슬픔에 덮인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어머니의 추락을 멈추려 그 슬픔의 밑바닥에 닿으려 온 몸을 내미는 엘리야 예언자와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 만남 속에서 구원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엘리야와 과부는 이미 인연이 깊습니다. 박해를 피해 숨어다니며 배고픔에 지쳤던 낯선 손님 엘리야에게 자신과 아들의 마지막 식사를 포기하고 바쳤던 환대의 여인입니다. 그 환대에 내린 축복으로 여인과 아들은 배고픔을 면했지만, 아들은 이내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에게 아들은 함께 죽을지언정 먼저 보낼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죽음에 책임을 지겠다는 엘리야의 태도가 결연합니다. 어머니의 슬픔을 자신의 온몸에 담아 싸늘한 아들의 몸에 겹칩니다. 자신을 죽음의 현실에 내어놓은 행동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에 담긴 뜨거운 생명을 아들의 몸에 전하려는 몸부림입니다. 슬픔이 서로 닿아 이어졌을 때 생명은 다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만난 장례 행렬은 두 겹으로 겹쳐진 슬픔을 또렷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남은 자식마저 보내는 무참한 현실입니다. 두 겹의 상실은 한 여인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 합니다. 상여를 따르는 그의 발걸음은 자기 존재의 무덤을 향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절망의 행진을 멈출 힘은 오직 연민입니다.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은 연민의 손을 뻗어 감히 오염과 부정과 죽음의 현실에 ‘손을 댑니다.’ 죽음을 멈추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당신 손을 더럽히시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나 슬픔과 절망에 닿은 손은 더럽혀지지 않고, 오히려 “젊은이”를 일으켜 세우며 여인의 존재도 지켜냅니다.

우리 사회에 상실의 슬픔과 죽음의 절망이 편만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의 목격자이면서도 종종 방관자로 머물기도 합니다. 비난과 책임을 면하려는 변명에 분노하면서도, 어쩌면 이런 사회와 공동체를 만들어낸 우리 자신의 책임은 돌아보지 않거나 손을 멀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로는 어머니에게 숙명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잃은 사람의 불행을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슬픔의 깊이에 손을 내밀고 몸을 겹쳐서 어머니의 눈물과 온기를 다른 모든 생명을 품어 전하려 합니다. 죽음의 행렬을 가로막는 이 용기야말로 세상의 젊은 생명을 더 잃지 않고 세우는 신앙의 몸부림입니다. 타인의 슬픔이 우리 몸에 닿아 우리가 그 슬픔을 부축할 때 구원의 틈이 열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연민이 낳는 구원이요,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 펼치는 구원의 손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