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리 주교, 영국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설교

Wednesday, June 16th, 2010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가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Southwark)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주일 미사에서 전한 설교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쇼리 주교의 방문과 설교, 성찬례 집전을 둘러싼 여러 논의와 논쟁들이 있다고 하나, 기회가 닿으면 그 논란의 지경을 살피겠고, 우선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설교문 및 설교 녹음(영문) 링크

Mary_Magdalene_Rubens_web.jpg
삼위일체 후 2주일
2사무 11:26-12:10 / 갈라 2:15-끝 / 루가 7:36-8:3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The Most Revd Katharine Jefferts Schori
Presiding Bishop of The Episcopal Church

저는 악명 높은 곳에서 왔습니다. 도박과 성매매가 합법적인 네바다에서 교구장 주교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알코올중독 치료 모임에 적용하는 12단계 치유 프로그램을 알코올중독자나 약물중독자들뿐만 아니라, 도박 중독자에게도 적용해서 진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섹스 중독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열기도 합니다. 제가 거기 있을 때, 꽤 널리 돌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 신부님이 이른바 마담이라는 포주와 그 고용인들에게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찾아오라고 권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따뜻한 환대를 통해 밤일하는 여성들이 자주 들러 쉬도록 했습니다. 물론 어떤 교회들은 예수님의 저녁 식사 참석자처럼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가 들인거야?’ 그래서 그 여성들은 그 저녁 식탁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영국 성공회에서는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성공회 어느 부류는 장소에 맞는 옷차림을 꼭 갖춰야 한다는 것으로 꽤 유명합니다. 물론 행동거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지요. 이런 식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온 마음을 다해서 응답하고, 예배에 쓰이는 여러 책을 적절하게 잘 알아서 찾아야 해. 앞문은 절대 지나다니지 않도록 해야 하고.’ 많지는 않더라도, 교회에 늘 앉는 자기 자리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앉는 걸 싫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초대받지 않았더라도 팔을 펴서 누구나 환영하는 교회 공동체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압니다.

제게는 연세 지긋한 친구 한 분이 있는데요, 수십 년 동안 대학 채플린으로 일하시던 매우 기발한 신부님이십니다. 한번은 이 분이 미국 횡단 여행을 하며 여러 교회를 방문한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캠핑해야 해서 매일 씻지는 못했죠. 그런데 성직 셔츠를 입고 교회에 가면 다른 대접을 받더라는 거에요.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로드 아일랜드 교구의 주교님은 임기 중 마지막 안식년의 일부를 노숙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면서 보냈습니다. 여성 주교인 이 분은 자기 교구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에서 잠을 자고, 주일에는 그 위층에 있는 교회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주교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노숙인인 자신을 환영해 잘 대접해 주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줄 바로 옆에 앉은 냄새 나는 노숙인 안에서 사랑의 주님을 볼 수 있거나, 기꺼이 보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불청객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타자’를 두려워하도록 할까요? 우리의 오랜 유전자 기억에는 낯선 이를 만나면 곧장 각성 상태로 이끄는 어떤 장치가 존재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생존 장치입니다. 낯선 이를 경계함으로써 우리 인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또 다른 것도 있습니다. 좀 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 사람의 죄를 두고 냉큼 심판하려는 비약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죄성, 그리고 경쟁하려는 경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이쿠, 고맙게도 저 여자는 나보다 훨씬 더 죄 많은 여자야. 감사합니다. 하느님.’

시몬의 집을 배회하던 그 여인은 머리를 가리지 않고 들어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거리에서 몸 파는 여자 아니야?”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 여인은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일을 벌이고 맙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고, 그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습니다. “저런 저런, 저 여자 이제 향유를 발라주고 있네. 어떻게 이런 일을 가만 보고 있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거야? 이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떤 작자들인 줄 알겠네, 알겠어 할 것 아냐? 참 내.”

저들이 과도하게 혹은 부적절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덮어씌우는 경멸은 아직도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예수를 향한 이 여인의 사랑스러운 응답이 바로 그 여인의 용서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하느님과 맺은 올바른 관계를 축하했습니다. 그 여인은 그걸 청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에 대한 용서의 증거가 이미 드러났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꾹꾹 눌러 담고도 넘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머리카락과 나르드 향처럼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 4;18). 예수님은 이 말씀을 끊임없이 반복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우리의 자매와 형제에게서 우리 자신을 몰아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우리 주변 사람들 속에서 그 두려움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식사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다른 식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거리의 여인이 자신의 명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용서받은 여인은 탕자의 누이입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오누이들입니다. 스스로 의로운 척하는 껍데기를 버리고자 할 때, 우리는 이들 가족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그 껍데기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덮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그처럼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껍데기가 바로 우리와 마음 깊이 ‘고향으로 환대’하는 사건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껍데기를 벗겨나가도록 하는 일은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릅쓸 모든 위험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로 성인께서 갈라디아 서신에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바울로 성인은 자신이 율법에서 지시하는 세부 사항을 지키는 것이 마치 베니어합판의 여러 층을 쌓아 붙이는 것과 같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 쌓여가는 층들이 합판을 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층들은 인간 안에서 벗겨져 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투명함과 맞바꾸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 층들은 우리를 하느님과 누리는 바른 관계로 이끌지 못합니다. 사랑이 그리로 이끕니다. 바울로 성인은 말씀합니다. “만일 내가 전에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스스로 법을 어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껍데기로 층층이 덮여 있는 자아는 상처받을 만큼 충분히 연약하지 않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기 있는 사람 안에서 사랑을 향한 인간의 속 깊은 열망을 발견할 수 있나요?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열망을 되새기고, 그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나요? 그것은 자비심입니다. 바로, 사랑에 우리를 여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가 아닌, 자비행이야말로 껍데기를 벗기는 한 시작입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모든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몰인정한 주인과 그 손님들에 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식사 잔치는 훨씬 더 흥미롭게 진행될 테니까요. 이들을 저버린다면 자비심의 실제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요, 그 여인의 눈물이 흘러 넘친 것처럼, 그들도 흘러 넘칠 가능성입니다. 껍데기가 벗겨나가도록 놔두는 일은 아주 모험 어린 큰 위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그 껍질 밑에 있는 한 형제요, 자매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이 동적인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이 저녁 잔치를 시몬에 남겨 두시고, 다른 곳을 방문하러 떠나십니다. 방탕한 이를 향한 사랑과 방탕한 이를 향한 용서가 필요한 곳으로. 그분의 길동무들은, 말 그대로 그분의 식탁 동료는, 그 열두 명과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이었습니다. 흠… 굳세고 건강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셋은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입니다.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그들은 그 공동체를 돕고 먹였습니다. 그들은 잔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깊이 받아들여지고 깊은 사랑을 알게 되어 치유와 용서를 얻은 이들은 다른 죄인들을 찍어 내려는 자기 방어적인 껍데기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눈물을 감추거나 값비싼 향유를 숨겨두는 일이 사랑을 펼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지라도 말입니다. 결국, 그 깨달음은 그들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마련된 자리로 이끌었으며, 이로써 그들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염려마저 치유했습니다. 이 식탁에 우리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환대의 눈물과 떠돌이의 입맞춤, 그리고 고향의 맛 난 냄새가 있습니다.

이 잔치에 함께 하시렵니까?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로이 나가십시오. 평화에 기대어 낯선 세 사람에게 같은 말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를 누리십시오.

Mary_Magdalene_DaVinci.jpg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랑

Monday, March 30th, 2009

1.
여러 죽음의 소식들이 지난 몇 주간 내 자신과 주위를 우울하게 했다. 우리 사회의 오랜 야만을 고발하며 한국의 한 여성 연예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저혈당 쇼크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진 이웃 지인의 죽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전에, 이제 지성에 경륜과 너그러움을 더하여 새로운 목회를 꽃피우던 지인 목사님이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하셨다. 그동안에 이웃 도시에서는 네명의 경관이 총격에 쓰러졌다. 죽음은 그 자체로 삶 전체를 압도하며 넘실 거리기에, 옆에서 바라보는 처지에서도 할 말을 찾기 어렵다. 대신 그 앞에 침묵과 눈물만을 보탤 뿐이다.

2.
죽음 앞에 선 산 자의 침묵과 눈물 속에서 죽음은 숭고하다. 죽음은 이후에 내내 해석되면서 그 의미를 더한다. 사랑이 깊을 수록, 쓰러진 이가 젊을 수록, 혹은 더 많은 기대를 받던 이일 수록, 무너지는 억장과 슬픔에 비례하여 커지는 그 의미는 비루한 언어로 담기에 벅차다.

그 슬픔의 눈물 안에 자신을 비춰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같은 직종이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으면,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엿보기도 한다. 아, 나도 준비해야지, 생각한다. 이 순간, 그 죽음의 사건은 타인의 것이 되고, 금새 나는 자신의 미래를 염려한다. 그런데 이게 연민에 의한 감정의 중첩 지점인지, 아니면 타인의 죽음과 내 삶을 거리두기 시작하는 변곡점인지 잘 분별할 수 없다. (분별이 어려운 걸 보면 그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겠지.)

아마 삶의 자리가 달랐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처음의 충격과는 달리,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 대한 응시보다, 이내 그와 연관된 이야기거리로 관심이 옮아간다. 때로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딱히 서른 생애를 이 땅에서 몸부림쳤던 삶 자체의 숭고함에 맞춰진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시간으로 에둘러 실체를 가리고, 귀 막고, 덮어두더라도 그 분노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 틈을 타 진실은 감춰지고, 뒤마려운 이들은 반격을 준비한다. 죽음과 삶 자체보다는 이야기거리로 옮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 가십거리가 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추모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소비하게 된다. 우리가 늘 그들 삶의 한부분씩을 훔치며 소비했던 것처럼.

3.
밥 한숟가락을 물어 목구멍에 넘기려는 찰라, 한웅큼 치밀어 오르는 울컥증과 그만큼의 눈물이 섞이는 순간,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 빈자리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밥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넘긴다. 생의 욕구가 더 큰 탓일까?

4.
장례식은 죽은 자가 마련한 마지막 환대의 잔치이다(적어도 우리 전통의 장례와 그에 대한 내 경험의 해석으로는). 죽은 이를 보내려는 일정이 가져온 오랜만의 만남 속에서, 훔친 눈물은 금새 지인들끼리 나누는 반가운 히히덕거림이 되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슬픔과 반가움의 결이 어떤 불폄함 없이 겹쳐진다. 우리 삶은 이렇게 겹쳐진 것들도 가득차 있다.

5.
우리에게는 죽음을 설명할 말과 논리가 많지 않다. 때로 종교를 통해서, 혹은 경전의 몇 구절과 그 해석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하는 바, 혹은 희망하는 바를 선포할 뿐이다. 엄밀히 그건 설명도, 논리도, 설득도, 심지어는 위로도 아니다. 다만 이 죽음을 대면하기 위해 살아 있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하나의 화두일 뿐.

6.
그렇더라도 죽음에 대해서 분노할 일이 남아 있다. 그것이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일 때, 그 죽음이 조건지어져 있을 때다. 그건 사랑때문이다. 아직 사랑할 일이 많은 이가 이내 꽃피울 그 사랑의 기회를 잃는다면, 그 기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도록 내몰린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을 사랑할 기회마저 어떤 이에게서 빼앗아 버릴 때, 그 죽음을 대하는 분노가 스러져서는 안된다.

다시, 삶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복잡한 연민의 중첩 과정 속에서, 결국 스스로에게 악다물며 되뇌이는 말은, “더 많이 사랑해야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더 많이 기뻐해야지,””사랑의 기억으로 삶을 수 놓아야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서는 안될 일이다.

그 사랑을 막는 것들, 훼방하고, 심지어 훼손하는 것들에 향한 분노가 여전히 살아 남아야,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를 지켜나갈 수 있겠다. 죽음과 삶이 숭고한 것은 사랑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침묵과 눈물로 말을 잃는 것도 실은 그 사랑때문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 사랑을 앗아가는 것들과 끈질기게 대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