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성모수태고지 – 하느님을 품는 신앙

Saturday, March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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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마르티니, 수태고지, 1333 년 경)

성모수태고지 – 하느님을 품는 신앙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모수태고지(3월 25일)는 천사 가브리엘이 시골 처녀 마리아 앞에 나타나, 인류의 구원자 예수를 잉태하게 되리라고 전해준 사건이다(루가 1:26-38). 이 이야기는 성서 전체를 통틀어 신앙인의 삶과 본질을 가장 빼어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인간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제멋대로 살았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다만, 세상의 방식과 기대와는 달리 가난한 시골 처녀의 가녀린 몸을 이용하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위에 하느님은 은총을 부어 용기를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감싸고 동행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고 이 일에 동참하겠다고 응답한다. 하느님의 구원 사건의 동역자로 초대받은 마리아는 이후로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을 도우며 선교에 동행한다. 자기 몸에서 나온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끊는 슬픔을 경험하고,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된다. 이처럼 신앙인의 역사가 수태고지에서 시작된다.

교회 전통은 새로운 역사의 시점을 지혜롭게 포착하여 연결했다. 교회는 원래 3월 25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날로 지켰다. 이날에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다고 믿은 교회는 서양력 ‘A.D.’ (Anno Domini: 주님의 해)에서 한 해의 시작을 3월 25일로 삼았다. 또한, 뜻밖의 소식을 용기 있게 받아들인 신앙의 출발점과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성된 종착점을 겹쳐놓았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을 잉태하신 날, 곧 수태고지 축일로 정한 이유이다. 탄생은 죽음을 향하지만, 죽음은 인생을 완성하여 새로운 탄생이 된다. 이에 따라 성인 축일은 대부분 순교와 죽음의 날을 새로운 탄생의 날로 지키며 정했다.

수태고지가 3월 25일인 탓에 성탄절은 12월 25일이 되었다. 만 아홉 달 뒤에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이다. 성탄절의 기원을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에서 찾는 주장도 있었지만, 점차 수태고지와 십자가 사건, 성탄절을 함께 잇는 계산법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앙의 삶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훨씬 잘 어울리는 설명이다.

수태고지 사건에 담긴 중요성 탓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도 잇따라 발전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는 성모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말에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져 오해하고는 했다. ‘어머니’는 친밀감과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다. 신앙은 자신의 실제 몸과 마음에 낯선 생명과 두려운 사건을 열림과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신앙을 ‘어머니’라는 여성의 이미지보다 잘 드러낼 말은 없다.

쉽게 이해하려면, ‘테오토코스’를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라고 풀이하면 좋겠다. 성모 마리아는 우리 모든 신앙인의 모본이다. 수태고지 사건에서 시작한 신앙인의 여정과도 잘 어울린다. 실제로, 동방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가장 완벽한 제자’로 보고 그의 삶을 따르는 일을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서방 교회에서는 중세 이래 마리아를 숭배하는 듯한 행태를 보였고(천주교), 이에 대한 불신으로 마리아를 신앙의 생각에서 아예 지우려 한 적도 있었다(개신교). 성공회는 초대 교회 전통에 충실하게 성모 마리아를 깊이 생각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수태고지를 받은 ‘성모 마리아’이다. 신앙인은 생각과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불편하고도 두려운 도전을 받아들인다. 우리 몸을 내어드려 하느님의 뜻이 우리 행동으로 드러나게 하고,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세상을 산다. 혹시나 이런 ‘수태고지’ 사건의 신앙을 잊을까 염려하여,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먹고 마시며 우리 몸 속에 품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품은 마리아이다.

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Sunday, September 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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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루가 14:25~33)

성서를 읽는 여러 방식 가운데 크게 잘못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문자적 해석’과, 무엇이든 심리적 상징으로 풀어내려는 ‘영적 해석’입니다. 실은, 편의에 따라서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자기도 모르게 섞어 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부모형제를 버리고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를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가 아니라면요. 그렇다고 ‘부모와 자기’를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특정한 요인을 상징한다고 엮어내려는 시도도 무리수입니다. 신앙인은 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의 행동과 몸짓에 우리 자신을 겹쳐서 살아가는 ‘제자’입니다.

“돌아서서” – 예수님은 군중을 이끄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치유와 기적으로 그분의 인기와 명성이 높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에 잡히는 혜택에 사람이 모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십니다. 또한, 모여 따르는 군중에게도 편리와 안정이 신앙의 진정한 이유인지를 묻습니다. 신앙인은 다 잘돼가는 일을 두고도, 그 일이 어떤 힘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늘 ‘멈추고 돌아서서’ 묻는 사람입니다. 이를 ‘성찰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워하라” – 사랑의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당황스럽습니다. 다시 읽으면, “원수를 사랑하라”와 “친지와 자신을 미워하라”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관습과 질서를 그냥 그대로 인정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사람, 심지어 ‘원수’, 다시 말해,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합니다. 이를 ‘타자를 향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르라” – 신앙은 제자가 되는 행동입니다. 세계를 보는 시선과 식견, 판단의 기준을 ‘세상’이 아닌 예수님으로 삼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러면 사람을 대하는 눈도 달라집니다. 편의와 소비를 제공하는 물질이 제일가치인 세상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인맥이 힘을 씁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바라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감에 도취하고, 낭패감에 절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인간을 나누지 않고, 인간 생명 자체, 그 전체를 볼 뿐입니다. 자신을 어느 높낮이에 끼워 넣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자체로 살아갑니다. 이를 ‘생명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먼저 앉아서” – 더 크고 깊은 세계를 배우고 대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망대를 높이 쌓아 올리려”는 성과주의가 우리 사회를 좀 먹고 갈라놓습니다. ‘4대강’ 사업의 무자비한 상처가 곳곳에 남아 눈물을 흘립니다. 상황을 외면하고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상상으로 허용한 ‘미사일 기지’는 두려움과 분노만 만들어냅니다. 신앙인은 “먼저 앉아서” 평화를 일구려 고뇌합니다. 이를 ‘지성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버리라” – 우리 삶의 행복과 인생의 구원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놓아주는 일로 통합니다. 재산과 명예와 지위라는 욕망의 사슬에 자신을 얽어매지 않고 손을 놓는 일이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우리의 행복과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예수님은 이 모든 삶을 “돌아보고” 이기심을 “미워하고” 낮게 “앉아서”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깊이 성찰하라고 하십니다. 찌꺼기를 “버리고” 바른 길을 “따르라”고 분부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주님의 기도 – 거룩한 삶의 찬미

Sunday, July 2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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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 거룩한 삶의 찬미 (루가 11:1~13)

왜 기도하는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기도로 무엇을 얻는가? 이런 질문에 많은 사람은 기도를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보는가 하면, 여느 종교의 표현을 따라 ‘치성’을 드리는 일로 이해하곤 합니다. 더욱이, 오늘 복음 본문 후반에 나온 비유 이야기를 근거로, ‘하느님께 떼쓰고 귀찮게 매달려서 소원을 이루는 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혹시 성과가 없으면,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돌리기도 합니다. 그렇기만 하다면야, 세상에 이루지 못할 소원이 없고, 사람마다 서로 다른 소원이 충돌하여, 기도는 사회 혼란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이런 문제점을 제자들도 아는지라, 기도를 제대로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새롭고 낯선 기도입니다. 그동안 다른 종교들과 선생들이 가르치던 기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옛 제자들과 신앙의 선배와 더불어 우리는 이 기도에 담긴 새로운 뜻을 되새기고, 우리 기도 생활의 틀로 삼아 모든 공동의 전례와 개인 기도에서 되풀이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담긴 한 마디 한 마디는 우리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어머니”라도 해도 좋습니다. 하느님은 철학에서 말하는 ‘신’도 아니요, 능력의 해결사도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의 근원이신 ‘부모님’이며 우리 삶의 핵심입니다. 게다가 우리말 쓰임새처럼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이지, 개인이 독차지하는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 신앙인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앙인은 서로 모두 형제자매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우리 생명을 낳으시고 보살피고 키워주시는 부모님 아래서 형제자매인 우리가 함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우리 신앙인의 삶으로 그 거룩함이 드러납니다. 본래 거룩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말하고 고백하는 바에 따라서 그분이 거룩해지고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깨지지 않은 온전함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창조대로 우리 삶을 바르고 온전하게 가꾸고 서로 보살피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바로 이 온전한 삶의 관계를 하느님의 자녀인 형제자매가 함께 누리는 세상입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우리 삶과 세상에서 펼치게 하는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상은 가난을 함께 물리치고 서로 용서하며, 이기심의 유혹을 이겨나가는 삶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과 닿아 있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 삶을 파괴하는 질투와 시기와 분쟁을 이겨나가는 힘입니다. 이 마음의 힘으로만 우리는 서로 용서할 수 있으며, 자기 중심주의의 유혹이 만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라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조건을 머리에 새겨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새로운 기도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은 자주 눈앞의 이익과 이기심으로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생명의 근원인 한 하느님 아래 형제자매가 된 교회가 세상 안에서 온전하고 거룩한 관계를 살겠다고 다짐할 때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삶의 찬미이며, 용서받고 하느님의 은총을 넘치게 누리는 행동 지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