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 낭만과 현실의 식별

Friday, February 6th, 2015

성소'(聖召)에 관하여 큰 오해가 즐비한 듯하다. 특별히, 그것이 성직 성소, 수도 성소인 경우에 그 오해가 크다. 모든 신자가 나누는 성소는 자기 신앙 체험에 근거한 것일 테다. 세례는 모든 신자가 받은 거룩한 부르심의 공개적 징표이다. 그러나 성직 성소와 수도 성소일 때는 ‘구체적인 공동체로 부르심’이라는 점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신앙 체험 안에서 어떤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그것이 곧바로 ‘공동체’ 성소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성직과 수도직을 통해서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겠다’는 낭만 넘치는 기대는 성직과 수도직 자체에 대한 오해이다. 성직/수도 성소는 현실의 ‘공동체와 그 규칙’ 안으로 들어가는(into) 성소이다. 그 안에서 나눌 책임과 책무까지 따라온다. 그 현실의 제한과 책임 안에서 복음의 전통과 그 실천을 드러내는 일이 ‘공동체 성소’이다.

그러니 이 성소에 좀 더 세심한 식별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 성직자나 수도자 ‘개인’으로서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자유롭게 내 신앙의 꿈’을 펼쳐보리라는 생각과 의지는 매우 고맙고 가상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와 공동체는 물론, 자신의 삶마저도 불행으로 이끌기 일쑤다. 성소와 그 방향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그 기대와 의지는 적어도 성직/수도 성소는 아니다.

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Sunday, January 25th, 2015

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마르 1:14~20)1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부르심’입니다. 인간 밖이든 인간의 내면이든 인간이 나서서 ‘신’을 찾는 것이 여러 종교의 특징이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하느님께서 나서서 인간을 찾습니다. 이를 ‘부르심’ 또는 ‘소명’이라 합니다. 이 부르심의 특징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방향이 다릅니다. 성서의 많은 내용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면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신 뜻과 목적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복음과 하느님 나라입니다.

여느 다른 종교와 그 방향의 달라서 성서의 이야기와 등장인물도 사뭇 낯섭니다. 낯설어서 새롭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불러 낯선 땅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하고 도망치다 큰 물고기에 삼켜 그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겨우 밖으로 나옵니다. 그제야 요나가 가고 싶지 않던 곳에 가서 회개를 외치니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마음과 행실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낯설고 확신할 수 없는 곳에 자기 몸을 던졌을 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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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에도 낯선 방향 전환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선포가 낯설고 새롭습니다. 요한은 하늘나라가 ‘오고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십니다. 미래나 외계에 있으리라 생각한 하늘나라가 우리 현실 안에 이미 다가왔다고 합니다. 경전의 글귀나 설법에 있다고 생각한 복음이 실은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의 행동에 이미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와 복음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 역시 낯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여느 종교가 약속하는 미래 보장이 없고 자세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곧바로 따릅니다. 우리는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목격하는 예수님의 미래는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 제자들이 겪었던 삶도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이 자신의 미래를 가늠하고 확신하며 따랐으리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동료와 함께 자신을 던졌을 때라야, 우리는 오히려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경험합니다.

보장성 보험의 종교가 아니라, 낯설고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에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과 동행하며 함께 걷는 일이 성서의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며 건네는 부르심과 동행의 초대에 우리는 지금 다시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1. 주교좌성당 주보 2015년 1월 25일치 []

여성 성직, 성공회, 하느님의 선교

Friday, July 25th, 2014

여성 성직, 성공회, 하느님의 선교1

“영국 성공회, 여성 주교 성품 가능!” 최근 우리나라 언론도 ‘영국’ 성공회에서 여성 주교 성품이 법제화되었다는 소식을 앞다투어 전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영국 성공회 480년 만에 여성 주교 허용”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더 들춰보면 정확하지 않고 여러 편견을 담은 표현입니다.

첫째, 성공회는 ‘480년 전’에 시작된 교회가 아닙니다. 원래 하나였던 그리스도교회는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뉘었습니다. 이후 하나로 유지되던 서방교회는 다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으로 천주교,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등으로 나뉘었습니다. 다른 교단이 이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보든, 성공회는 기원을 초대 교회와 그 선교 역사의 경험에 둡니다. 성공회는 말 그대로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둘째, ‘허용’이라는 말은 편견에 사로잡힌 표현입니다. 여성 성직은 누가 누구에게 허용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여성은 허용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듯이, 여성 성직은 허용받아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를 억지로 금했던 역사가 모자라거나 잘못됐고, 이 잘못을 깨달은 여성과 남성 신자, 성직자들이 오래도록 잘못된 벽을 허물어 더 풍요로운 이해에 다다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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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세계성공회 주교회의 람베스 회의에 참석한 여성 주교들)

이번 ‘영국’ 성공회의 여성 주교 성품 법제화는 ‘영국’ 성공회의 많은 신자, 특히 여성들이 오래도록 바라며 분투했던 일이고, 교회의 오랜 전통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더욱이 사제직뿐만 아니라 주교직에도 막힌 벽을 헐어서 여성과 남성, 인간 전체를 향한 하느님 은총과 소명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세계 성공회 역사 안에서 여성 성직을 이끈 교회는 아시아의 홍콩 성공회였습니다. 1944년 홍콩 성공회는 리 팀 오이 부제를 사제로 서품했습니다. 억지로 막은 담이 허물어진 뒤, 1970년대에 다시 홍콩, 미국, 캐나다 성공회에서 여성 사제 서품이 잇따랐습니다. 한국에서는 2001년 민병옥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아 여성 성직의 길을 열었습니다.

1988년에는 미국 성공회에서 ‘흑인 여성 사제’ 바바라 해리스가 세계 성공회 첫 여성 주교로 성품받았습니다. 세계 성공회 관구의 절반 이상은 사제직에 성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주교직에서는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스코틀랜드, 호주가 성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현재 세계 성공회 안에서 여성 주교는 20여 명에 이릅니다. 이제는 ‘첫’ ‘여성’ ‘흑인’ 등과 같은 수식어를 모든 성직에서 없애야 할 때입니다.

여성 성직을 반대하는 정교회와 천주교 등과 나누는 일치에 문제가 생긴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더욱이 주교직은 남성 제자들을 통한 사도적 계승의 한 표현이며, 교회의 일치 수단이라는 주장 때문입니다. 성공회도 교리와 전통을 나누는 일치를 추구합니다. 동시에, 다채로움을 포용하고 초대하는 실천으로 일치의 자리가 더 넓어지고, 예언자적 행동으로 교회의 전통이 풍요로워진다고 믿습니다. 이 너른 일치와 풍요로운 전통은 교회의 선교를 더욱 든든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교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성직은 든든한 선교를 향한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1. 주낙현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7월27일자 주보에 실은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