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예언: 케네스 리치 선집 서평

Tuesday, June 7th, 2011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 1939~ ) 신부는 영국 성공회의 대표적인 성사적 사회주의 활동가요 신학자이다. 이미 그의 책이 우리말로 여러 권 번역되어 있다. 그에 대한 소개와 우리말 번역서 목록이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의 저작 선집이 수년 전에 나왔고, 그에 대한 서평을 발견하여 여기에 옮긴다. 그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간단하고도 명료한 지침이 되리라 생각한다.

서평 – 기도와 예언: 케네스 리치 선집

Prayer and Prophecy: The essential Kenneth Leech
David Bunch and Angus Ritchie, editors

피터 맥기어리 신부

케네스 리치는 위험한 인물이다. 예언자들은 대체로 그렇다. 그는 사목 활동 대부분을 런던의 이스트 엔드에서 보냈고, 거기서 그의 놀라운 저작들이 솟아났다. 슬프게도 그의 저작 대부분은 이제 읽히지 않거나 알지도 못한다(실은 피한다!). 영국 성공회가 점차로 신-국교주의가 된 탓이다.

이 때문에 지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케네스 리치가 쓴 글의 선집을 편집한 데이빗 번치와 앵거스 릿치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제 그의 여러 유명한 저작과 편지, 논문들, 다른 글, 그리고 그의 초기 시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선집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른 글들을 빼야 하니까. 그러나 편집자들은 리치의 미출간 글들을 들춰볼 수 있었다. 이 자료들은 지금 이스트 런던 성 캐서린 재단에 보관된 것들로 계속 정리 작업 중이다. 이 책에서 여러 부분을 나누는 일도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것이 연결된 리치의 만다라 같은 글들은 기도와 행동을 분리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나는 켄 리치와 같은 목소리가 오늘날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는 내게 명백함과 정직함과 진리다움을 늘 되새기도록 했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신랄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긴 했다.

그의 입장은 값싼 성상파괴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싫어하는 장난감을 내팽개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본다면, 그는 예언자다. 모든 이들, 특히 권력과 안정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항상 성찬례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예배에 근거했다.

그가 지닌 사상의 주류는 무엇일까? 그것을 정확하기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 제대로 이해한다면, 공교회주의(catholicism)는 명백한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찾는 일이요, 역으로, 거룩함 속에서 일상을 찾는 일이다.
  • 교회는 세상을 하느님의 창조 질서로 확신하면서 예언자적 증언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특별히 권력과 부의 자리에 있는 이들을 평가해야 한다.
  • 그런데 이 비판적 행동은 영국 성공회가 지닌 ‘국교’라는 지위 때문에 늘 훼손된다. 그러나 바빌론이 가져다주는 위안은 시온을 향한 싸움과 양립할 수 없다.
  • 기도와 관상, 성서와 성사에 끊임없이 기대는 일은 본질적이다. 급진적이 된다는 것은 사물의 뿌리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참여와 행동에 더 깊이 관여할수록, 관상적 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이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관계가 아니다.
  • 우리는 사람들과 있는 그대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바라는 사람으로 그들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을 사시라! 그의 다른 책을 갖고 있더라도 말이다. 재빨리 읽거나, 차례대로 읽지는 마시라. (내가 보기에 5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 리치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생각을 얻기에 좋다.) 그리고 그대가 지닌 그리스도교 신앙에 안주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다시 읽으시라. 그래서 이 살아 있는 목소리가 그대를 휘저어서 늘 새롭게 하도록 하시라.

저자: The Revd Peter McGeary, http://goo.gl/q95TC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김종명 교우 (서울교구, 대학로 교회)

마르크시즘, 학자들의 아편? – 테오 홉슨

Wednesday, May 18th, 2011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거의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그 종교인들도 역시 종교가 허약한 진통제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 수단임을 알았다. 적어도 성공회 전통 안에서 영국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를 시작했던 모리스 신부(F.D. Maurice)와 킹슬리 신부(Charles Kingsley) 등이 그러했다. 이들은 ‘그리스도 왕국’이라는 종말론적인 실체가 현실을 비추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하고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가르침과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은 잘 알려진 적대적 관계만큼이나, 그 친연성이 늘 큰 관심 주제였다. 지성사적인 근원과 근친 관계는 제쳐 놓더라도, 이 둘이 맺은 역사적 관계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근대 서방 교회의 여러 개혁은 대체로 세를 넓히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정면 대응에서 시작되곤 했지만, 실천 속에서 그 관심과 결과는 두 운동이 비슷했다. 천주교의 소위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년)은 말 그대로 ‘새로운 사태’에 대한 교회의 변화와 대응의 촉구였다. 그 사태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의 처지에 대한 관심과 공산주의 운동의 확산에 대한 우려였던 것은 역설적이다. 한국 민중신학의 주창자 가운데 한 분인 안병무는 새로운 신학적 임무의 하나로 ‘반-공산주의’를 삼았다. 그러나 이후에 민중신학은 늘 ‘용공’ 신학으로 몰려 탄압받았다. 남미의 해방신학은 당시 맥락화한 마르크시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신학에 받아들인 최초의 신학 운동이요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 그리스도교가 마르크시즘에 관심했던 데 비해, 현실과 이념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거나 적대적이었다. 그 주창자와 이후 큼직한 추종자들이 만든 ‘아편’ 규정의 무게에 짓눌렸는지 모른다. 이런 처지에 요즘 테리 이글턴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의 친연성에 대한 새로운 독서를 제공하는 것은 격세지감이겠다. 학계의 마르크스 연구와 실천 현장에서 이를 두고 논란이 많고, 이른바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이론을 꽤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그 논의와 관심의 방향에서 본다면, ‘진보적’ 신학 담론의 방향은 이제 교회 전통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접근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른바 80년대 이후로 짓눌러온 ‘과학적 방법론’에 눌린 무의식의 열등감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테리 이글턴이 낸 최근작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의 발췌를 번역해서 올렸거니와, 이 책에 대해서 한 ‘리버럴’ 그리스도인이 쓴 서평을 소개하여 짝을 맞추려 한다. 서평자인 테오 홉슨은 이글턴의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우리말 번역 제목은 ‘신을 옹호하다’)에 대한 서평도 이미 쓴 바 있다. 이 글들과 아울러 몇 년 전 고종석이 쓴 글도 읽어보면 좋겠다. 아래에 그 목록과 링크, 그리고 새 서평을 아래에 남긴다.

그리고,

마르크시즘 – 학자들의 아편? – 자신의 신앙과 씨름하는 테리 이글턴

테오 홉슨

대체로, 주장을 담은 책은 꽤 직설적이다. 저자란 그 주장을 믿기 때문에 그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문학 이론가인 테리 이글턴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전에 펴낸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에서 새로운 형태의 무신론을 비판하며 그리스도교를 변호했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다. 최근작,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에서 이제 그는 자신이 늘 지지했던 마르크시즘이라는 신조를 변호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을 믿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이 책은 마르크시즘에 대한 열 개의 관습적인 반대 목록에 따라 이뤄져 있다. 즉 마르크시즘은 더는 적절하지 않다, 폭력적이다, 경제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 불가능한 완결주의다, 정체성의 정치를 무시한다 등등. 인상적인 활력과 G. K. 체스터튼 풍의 익살을 이용하며, 이글턴은 이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

전체로 보면, 그는 무비판적인 신봉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가 펼치는 주장이 좀 더 분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합리적인 마르크시스트인 것을 보여주려고 중요한 문제들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다룬 것은 옳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 하나가 있다. 마르크시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즉 공산주의는 좋은 결과를 내면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할 수 없는가? 이 문제는 2장, 즉 마르크시스트 혁명은 늘 불행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장에서 직면하는 문제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우리는 20세기 공산주의는 여러 조건이 완전히 잘못돼서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이렇게도 경고했다, 일국 혁명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그리고 역사는 이런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줬다고 이글턴은 말한다. 좋다. 그렇다면 이글턴은 여전히 마르크시즘이 ‘적절한’ 조건들에서 작동할 수 있고, 어떤 형태의 혁명(그가 말하는 대로 유혈 혁명일 필요가 없는)이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있고, 확실히 나은 정치적인 질서를 출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자유 정치적 제도를 가볍게 무시해도 될까? 혁명이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판돈을 걸어도 될까? 이 문제에 대해서 이글턴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마르크스가 이런 문제에 모호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 텐가. 그건 변명이 안 된다. 마르크스 이후로 우리는 이런 모호성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봤다. 내가 보기에 이글턴은 자신의 중심 임무를 슬쩍 피해 가려 한다. 그 혁명이 정말 일어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해야 하는 임무 말이다. 왜 그걸까? 그 자신이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혁명의 실제 가능성을 그가 확실하게 믿지 않는다는 판단이 옳다면, 왜 이글턴은 마르크시즘을 변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글턴이 마르크시즘을 하나의 비판적 도구로, 진정한 비판적 관점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적’이라는 말은 너무 약하고, 너무 차갑다. 마르크시즘은 열정 어린 비판적 입장을 제공한다. 마르크시즘 말고, 다른 이념들은 불평등이 만드는 불의에 대해 관대하다. 이 관습적인 생각은 근본주의적 자유 시장주의가 아니라, 시장을 통제해서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도록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생각은 부(富)가 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긴박성과 열정이 부족하다. 기존 질서가 점차로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을 두고 죄책감과 낭패감 말고 다른 대안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관습적인 생각은 운명론이라는 강력한 진통제를 수반한다. 결국, 운 좋은 계급이 있어서 좋은 교육과 좋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고, 운이 좋지 않은 다수는 불안정과 실업, 하급 문화에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인종차별을 반대한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경제적 처지가 만들어내는 인종 분리를 받아들인다.

오직 마르크시즘만이 이 운명론을 거부할 수 있고, 완전하고 즉각적인 변화가 필요한 불의와 불평등을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이글턴을 마르크시스트로 남게 하는 것이다. 온정주의적 운명론에 대한 이런 반대와 완전히 다른 질서에 대한 요구를 그는 높이 존중한다. 그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보는데 집착한다. 물론 여기서 신앙적인 도약이 따르기도 하는데(혁명은 가능하다!),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는 부정적(negative) 마르크시스트라고 불릴 수 있겠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공격을 믿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덜한 것 같다. (후자를 믿는다면, 그것을 전달하는데 아주 취약하다.) 그가 긍정적으로(positively) 믿고 있는 바는 급진적으로 다른 질서에 대한 생각을 부추기는 일이며, 기존 질서에 대해 반대하는 정념이다.

그러므로 이글턴이 손에 든 마르크시즘은 정확히 과학도 아니고, 실질적인 정치적 제안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정치적 삶에 대한, 끝내 보편화해야 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어떤 전망이요, 응시요, 담론이다.

이글턴도 잘 알다시피(그의 지적 뿌리는 해방신학이다), 여기에는 종교와 강한 친연성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기는 경계한다. 어떤 점에서 그는 마르크시즘 안에 어떤 영성적인, 혹은 [초월적] ‘타-세계적’인 면이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직자들(parsons)이 생각하는, 그런 타-세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통기간이 지난 것이 분명한 어떤 것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자들이 미래에 건설하기를 희망하는 다른 세계이다.”

‘파슨스’(성직자들)라는 낡은 용어에는 어떤 기이함이 감춰져 있다. 이글턴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마르크시즘과 종교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없음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앞으로 쓸 책에서 이 점을 좀 더 공개적으로 다뤘으면 좋겠다.

원제: Theo Hobson, “Marxism, the Opium of the Professoriate?”
출처: http://goo.gl/k6DkT
번역: 주낙현 신부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 헌사

Thursday, October 7th, 2010

남아프리카 성공회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몇 달 전, 사회의 모든 공적 활동에서도 은퇴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종교와 세속을 초월한 진정한 영웅의 퇴장이 아쉬운 탓일까? 언론은 지난 몇 달간 그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운 행동을 되새겼고, 고통 속에서도 웃음과 재치를 잃지 않는 그만의 희망의 낙관주의에 존경의 예를 표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그의 투쟁을 기억하겠노라며 그의 퇴장에 헌사를 보냈다.

그 순간, 투투 대주교의 밝은 웃음 뒤로,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하여 싸운 그의 성장과 삶 뒤로 우뚝 선 한 사람이 엿보였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1913-1998)이다. 약 20년 전 서울 영국 문화원 한 서가에서 그에 관한 책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 책 어디에선가 투투 대주교는 자기가 어릴 적에 흑인인 어머니에게 모자를 벗어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하는 백인 한 명을 처음 보았노라고 적었다. 그가 바로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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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투투 대주교는 남아공 성공회의 최고 성직자(최초의 남아공 흑인 주교)로 성장했고, 넬슨 만델라와 함께 인종분리정책 철폐 운동의 두 기둥이 되었다. 그 둘 뒤에도 역시 허들스턴 신부가 있었다. 허들스턴 신부는 이후 영국에 돌아가 주교로 임명되었고, 인도양 성공회의 대주교를 지냈다. 그러나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한 싸움은 쉬지 않았다.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는 근대 성공회 신학 전통의 매우 중요한 자산인 신학과 실천 운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다. F.D. 모리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와 찰스 고어의 자유로운 성공회 가톨릭 정신(Liberal Anglo-Catholicism)의 성사주의가 만난 신학과 신앙을 몸으로 실천했던 마지막 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전통을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이라 부른다.

허들스턴 자신은 찰스 고어 주교가 창립한 부활 공동체(the Community of Resurrection: CR)의 수사 신부였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의 CR 수도원에 파견되어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서 얻은 해방의 신학으로 제도 교회, 심지어는 자신의 수도회와도 갈등을 겪으며, 복음이 선포하는 해방의 실천을 살았다.

지금 누가 그를 다시 돌아보는가? 그의 전통은 어디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여러 핑계 속에서 그의 해방을 향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쉬지 않고 저항하기보다는, 제도 교회에 대한 부정, 혹은 제도 교회로 종속되는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우리를 겨우 꾸려가지는 않는가? 그가 “안위 따위는 쓸모없어”(Naught for Your Comfort)라고 외칠 때, 우리는 흠칫 놀라며, 그를 과거에 묻어두려 하지 않는가? 교회는 보수화되고, 어디든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그 자리에 대한 변명을 일삼을 때, 교회는 여전히 “잠만 자고 잠꼬대하는 일”로 제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여러 헌사 가운데 하나를 찾아, 이곳에 옮겨 읽는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 헌사1

찰스 빌라-비센치오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 사람들은 그를 마칼리필레(Makhalipile)라고 불렀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국가의 격노에 맞서는 일에 두려움이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소피아타운의 어느 지역에서도 생명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결국, 그곳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허들스턴 신부님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을 밤새 몇 시간 동안 혼자 걸었어요.” 만델라 대통령은 내가 소피아타운에 대해서 묻자 그렇게 말했다.

“두려움이 없는 분이어서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았어요. 누구도, 깡패들도, 소매치기들도 그분을 건드리지 못했죠. 모두 그분을 너무나 존경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분을 해치지 못했는데, 혹시라도 누가 그런다면, 그 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분의 위대한 용기가 그런 존경의 공간을 만든 것이죠”라고 만델라는 말했다.

언젠가 허들스턴 신부님을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신부님은 정치적인 사제인가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남아프리카에 도착하는 순간 그렇게 느꼈어요. 제도화된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정책은 복음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물론 내 소명은 사목하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의 영혼과 삶을 돌보는 것이었죠. 그런데 내가 복음에 대해 설교를 하면 할수록 모두 이 체제를 향한 것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정부와 싸우게 된 것이죠.”

“나는 사제로서 책임이 있는데다, 인종분리정책에 따른 경계선 침해 위반 등으로 체포된 남편들, 아내들, 그 자녀과 형제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을 찾는 일도 해야 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잡범이 되거나 깡패가 되거나 술에 빠져 살았죠.”

“내 선교 사명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어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질긴 생명력과 무한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복음은 이러한 자원을 창조적이고 책임있는 방법으로 새롭게 쓰라고 요청합니다.”

“나는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놓인 비참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루 내내, 일주일 내내 그들은 위험을 안고 살고 있었습니다. 인종분리정책(아파라트헤이트)은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범죄이자,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파괴하는 악마적인 권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신성모독이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제거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소피아타운에서 지낸 세월은 내게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가르쳐 줬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이 될 요량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열정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함께 슬퍼하고 우는 것, 함께 웃고 승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열정이 넘쳐나는 거칠고 혼란스러운 삶에서 도망치는 일은 비극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도적 교회는 그가 바라는 지원을 하는데 주저했고, 그 때문에 때로 실망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케이프타운의 제프리 클레이턴 대주교와 1949년부터 1957년까지 불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주교는 당시 ‘반투 교육령’에 대한 허들스턴 신부의 견해와 행동을 과도한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지금도 반투 교육령이 모든 인종 분리 법령 가운데도 가장 사악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법령은 무고한 어린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과 그 가능성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들이 박차고 일어나 한목소리를 냈다면, 무시무시한 그 반투 교육령은 철회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이 법령에 반대하는 우리를 힐난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정부 권력자들은 교회가 저항을 그만두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옳았습니다.”

결국, 소피아타운의 그리스도 왕 교회의 신실한 신자요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 졸업생이었던 올리버 탐보를 공산주의자 진압령으로 유죄를 선고했을 때, 허들스턴 신부가 보기에 교회는 한없이 비겁했다. 허들스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침묵과 무관심, 그리고 항복은 자신의 귀를 틀어 막는 일입니다.”

“교회는 잠만 자고 있다”는 제목으로 그가 옵서버지에 기고하자, 교회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허들스턴 신부는 G.K. 체스터튼의 “백마의 발라드”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데, 너의 안위 따위는 쓸모없어
“그래, 너의 욕망 따위는 쓸모없다고.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그것을 구해야 해.
“바다가 더 높아지기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교회는 잠만 자고 있다. 종종 잠꼬대하기도 한다. 그걸 정부가 들을 것이라 기대하면서(기대나 하는 것일까?) 말이다.”

허들스턴 신부에게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 물었다. “아, 많은 게 변했죠. 내가 소피아타운에 있을 때만 해도, 해방신학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없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의 목소리는 교회 안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죠. 여전히 교회는 요구되는 사명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그전과는 다르기도 하고요.”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는 1998년 4월 20일, 자신이 1939년 입회했던 영국 머필드 부활 공동체 수도원에서 별세했다. 그의 재는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에 뿌려졌다.

  1. Charles Villa-Vicencio, “Father Trevor Huddleston: A Tribute,” Journal of Theology for Southern Africa 101(July 1998):69-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