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공장’의 정화 – 캔터베리 대주교 사순절 설교

Thursday, March 15th, 2012

세계 성공회의 맏 어른이신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께서 로마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서 전하신 설교를 번역하여 올린다. 로완 대주교께서는 베네딕트 전통의 갈마돌리 수도회 설립 1천 주년 기념 강연에 초청받은 참에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돌며 강연과 강론, 설교를 펼치셨다.

한편, 천주교의 한복판 로마에 성공회라니? 로마에는 성공회 두 개 교회와 교회 일치 대화 연구소인 성공회 로마 센터가 있다. 한 교회는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유럽 교구 소속이고, 다른 한 교회는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 유럽 교구 소속이다. 이 두 교회 신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을 맞아 사순 3주일 미사를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미국 성공회 소속)에 모여 함께 드렸다.

대주교께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에 담긴 뜻을 고금의 우상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개인의 안위와 위로를 위한 ‘종교 공장’이 되어버린 요즘 교회에 대한 비판과 극복으로 풀어내셨다. 하느님과 인간이 아니라, 그 형색만 갖추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비지니스로 전락한 종교의 행태, 특히 그 비지니스(business)에 바빠(busyness) 정작 헤아리고 살펴야 할 것은 돌아보지 못하고 대량 생산 공장이 되어가는 종교 비지니스에 대한 성서의 경고를 되새겨 주셨다. 원래 신앙이 가진 이 대안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되새김이 여전히 절실하다. 그뜻을 널리 나누려고 동영상을 링크하고 설교 전문을 졸역하여 올린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설교

사순 3주일
로마,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 St. Paul’s ‘Within the Walls”
2012년 3월 11일

출애 20:1-17 / 시편 19 / 1고린 1:18-25 /요한 2:13-2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다시 한번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영국 성공회의 형제자매들은 제가 여러분에게 이 위대한 도시에 있는 성공회 교회들을 향한 사랑과 기도를 전해주길 바랄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 함께 나누는 그들의 연대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펼치는 여러분의 증언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아침 성서를 읽으면서, 저는 제가 주교로 있던 남부 웨일스 지방의 여러 공장을 방문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규모 철강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엄청나게 큰 공장에 들어가면 귀를 먹게 하는 소음이 감쌌습니다. 실제로 공장 어느 부분에서는 꼭 귀마개를 하고 안전모를 써야 했습니다. 소음과 활력, 그것도 귀를 먹게 하는 강한 것들이죠. 아마도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이랬다 싶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작은 교회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철강 공장에 들어가는 것과 더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이 거대한 ‘공장’에서 그들은 무엇을 만들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철강 공장에서 철을 만들 듯이, 성전은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성전은 아주 강하고 바쁜 활동을 온종일 만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큰 명절이 되면 말 그대로 수천 명의 제사장들이 희생제의에 바칠 동물들을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적절하게 표현할 상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독서 세 본문의 주제는 실제로 우리가 종교 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종교’와 참 하느님, 즉 참 하느님의 사랑과 섬김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시작부터 우리는 참 하느님의 자리에 어떤 것도 가져다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듣습니다. 하느님을 가장한 ‘우상’, 우리를 만족하게 할 어떤 그림을 가져다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우리 마음과 우리 기도를 채우곤 합니다. 우리 자신의 선호에 따라, 우리 자신의 생각에 따라, 우리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채웁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틈을 막는 데 사용합니다. 무엇을 생산하고,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하여 참 하느님께 깃든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 대신에,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을 끌어내어 그것을 천국의 화면에 투사하고, 그것을 지상에 끌어내려 예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 공장’입니다.

똑같은 경고를 제2독서에서 바울로 성인께서 전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능력은 세상이 생각하는 지혜와 능력과는 너무도 낯설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 발짝 물러선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지혜와 능력에 만족한다면 말이죠. ‘어떤 이들은 기적을 찾고, 어떤 이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이 마술처럼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철학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다시 한번,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참 하느님의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사랑 속에서 알려진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아침 성서 독서의 도전은 분명합니다. 우상이냐, 진리냐? ‘종교 공장’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냐? 우리의 유혹은 너무도 강력하여 늘 종교 공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은 아마도 시끄럽고 북적북적하며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하느라 바쁘고, 좋으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쁘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더욱 사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 속에서 가져온 그림을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능력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요,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을 치우라고 합니다. 이것들과는 달리,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세계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간으로 살고,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실패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들로도,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으로도 절망하게 하거나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을 묵묵히 보여 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순간의 하느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십니다.

사순절기 동안 우리가 대면해야 할 임무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이 ‘종교 공장’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모든 도전에도, 그리스도인은 꽤나 잘 이 종교 공장을 운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십자가 자체는 종교적인 장식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는 삶의 쇄신에 대한 부르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부르심이 아니라, 종교인이 그저 장식처럼 걸고 다니는 어떤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순절기는 어쩌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다시금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력의 성주간 동안 교회의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사실 그 시기는 십자가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매년 우리에게 새로운 놀라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거나 치웠다가, 다시 한번 우리 앞에 충격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충격을 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 안녕에 대한 모든 것들을 뒤엎으십니다. 멋진 레저 활동이 된 ‘종교’에 대한 생각을 뒤엎으십니다. 그리고는 종교 공장에서 우리를 끌어내시어 신앙으로 이끄십니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고, 누구도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신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 신뢰가 우리를 움직여 매일의 삶 속에서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전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완전히 잊혀진 사람들을 섬기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종교 공장을 나와 섬김으로 가는 길로 이끕니다. 섬김과 사랑과 침묵, 그리고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세상을 향한 활동으로 이끕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후한 너그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순절기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여러 형태의 신을 우리 안에 짜맞추어 생산하고 있지 않나 살펴 봐야 합니다. 사순절기는 우상숭배를 넘어서 한 발짝 더 나가는 시간입니다. 우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죄수로 묶어놓고 옛 세상으로 끌어당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종교 공장에 연루된 이들을 내치시고, 당신의 벗들과 더불어 거대한 침묵과 거대한 공간에 우뚝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집으로 여길 곳입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붐비지 않는 넉넉한 공간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곳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이곳이 모든 인간의 집이 되어야 할 곳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함께 예배하러 모일 때, 성찬례라는 성사를 거행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그 거대한 공간에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바쁘지 않습니다. 조바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과 성취해야 할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곳에 서서, 가만히, 듣고, 받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손을 내밉니다. 무엇을 움켜쥐고 우리 생각대로 쥐어짜서 만들려는 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생명과 사랑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성사 속에서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님께서 정화하시는 공간입니다. 그분의 몸인 성전은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리하셔서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며 만드신 공간입니다. 크고도 경건한 철강 공장 같은 ‘성전 종교’는 1세기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21세기 어느 곳에도 널려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가 그동안 ‘종교를 만드느라’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마음을 열어 되돌아 봅시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봄날의 대청소를 시도해 봅시다. 조금이나마 정적과 열림을 위해 노력해 봅시다. 그때야 비로소 생명의 기적, 하느님의 생명이 그 열린 빈손에 다가올 것입니다. 신비와 경외, 아름다움과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은 패배할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최은희-유상신 신부님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

모든 수요일 – 부활을 향한 길목

Wednesday, February 29th, 2012

전례학자 알렉산더 슈메만 신부(정교회)는 사순절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했다.

[사순절기는] 여정이요, 순례이다! 이를 시작하면서, 이 사순절기의 “밝은 슬픔” 안으로 첫발을 내딛으면서, 우리는 멀리, 저 멀리 있는 종착지를 응시한다. 그것은 부활의 기쁨이요,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전례학자 돈 E. 샐리어스(감리교)는 오래된 이 ‘여정’의 비유를 좀 더 내면화했다.

사순절기는 두 겹의 여정이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구원의 손길이라는 신비를 향하여 함께(그리고 홀로서) 걷는 여정이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인간의 심연을 향한 여정이다.

사순절과 부활의 연결의 돋보인다. 그 여정 길에는 온갖 고통과 수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순절은 겨울을 이겨내는 봄(Lent)이니, 그 봄이 부활처럼 피어오를 것이다.

탁월한 구약성서학자요, 설교가인 월터 브루그먼(그리스도의 연합 교회)은, 자신의 강의와 수업을, 자신이 지은 시나 기도로 시작했다. 사순절기를 걷는 그는 자신의 기도-시 “재를 바르고”(Marked by Ashes)에서 부활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길인 사순절기의 여정을 ‘재의 수요일’과 한 주간의 ‘가운데’인 수요일의 이미지를 엮어 이렇게 노래했다.

재를 바르고

월터 브루그먼

밤을 다스리는 분, 낮을 지키시는 주님
이날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느니.
이날은 주님께서 주신 여느 날, 우리가 받은 여느 날과 다르나니
이 수요일은 선물과 새로움과 가능성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나니
이 수요일은 하루의 임무를 우리에게 지우나니, 이미 집을 향해 반을 걸었으니
여러 모임과 메모들의 반절을 뒤로하고
여러 전화와 약속들의 반절을 뒤로하고
다음 주일을 향해 남은 반절
반절을 뒤로 한 채, 반절은 벌써 지치고, 다른 반절을 기대하는 날
반절은 주님을 향하고, 나머지 반절은 그렇지 않은 날

이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에서는 이미 멀어진 날
그러나 모든 수요일은 재를 바른 수요일이니
우리는 이날을 입에 든 재를 맛보며 시작하나니
실패한 희망, 깨진 약속들의 재
잊어버린 아이들, 놀란 여인들의 재
우리 자신은 재에서 재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니
우리 혀 위에 있는 재로 우리의 죽음을 맛볼 수 있으리니
우리가 흙이요 재인 것을 깊이 생각하리니
모든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요, 확신하나니
모든 수요일은 이 메마른 파편 맛인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탓이리니

이 수요일, 우리는 재처럼 창백한 우리의 길을 주님께 드리나니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부활 행진에 드리나니.
해가 지기 전, 우리의 수요일을 받아 주시고, 우리를 부활케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기쁨과 활력과 용기와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두려움 없이 주님의 진리를 살게 하소서.
여기에 오시어 우리의 수요일을 부활케 하시고
자비와 정의와 평화와 너그러움이 넘치게 하소서.
곧 오실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번역: 주낙현 신부)

토마스 머튼 – 재의 수요일 생각

Wednesday, February 22nd, 2012

“전례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마저 기쁨이 넘친다. 사순절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은 행복의 날이요, 그리스도인의 잔칫날이다.”

토마스 머튼은 “재의 수요일”에 대한 짧은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반세기 후 재의 수요일 아침, T.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과 더불어 그의 글을 번역하여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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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은 자신의 영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젖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재의 수요일 전례는 참회자의 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춘다. 죄에 대해 묻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그날이 자비의 날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은 자비의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순절기에 시작에 주님께서 당신을 자비로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이유가 분명하다. 이 사순절의 목적은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려는 일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누릴 기쁨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준비는 그분의 자비라는 선물로 이뤄진다. 그 선물은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만 받을 수 있다. 자비와 함께 동거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 안에서 몰아내야만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몰아내야 할 것 가운데 첫째가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우리 마음의 문을 좁게 만든다. 두려움은 우리가 사랑할 가능성을 찌그러뜨린다. 두려움은 자신을 거저 주는 우리의 능력을 얼리고 만다. 우리가 하느님을 지독한 심판자로 보고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신뢰하며 그분의 자비를 기다릴 수 없다. 기도 속에서 신실하게 그분께 다가갈 수 없다. 사순절을 통해서 누리는 우리의 평화, 우리의 기쁨은 은총으로 보장된 것이다.

재로 그은 빛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면서, 교회는 우리 어깨 위에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길 갈망한다. 걱정과 죄책감이 얽혀 짓누르는 무게와 우리 자신을 향한 이기적인 사랑이라는 죽음의 무거움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전 세계를 어깨에 진 아틀라스 신처럼 참회의 짐을 스스로 지고 비틀거릴 필요가 없다.

아마도 이런 참회는 조금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교회가 말하는 참회는 해방보다 더한 짐일 수는 없다. 그 짐은 어쩔 수 없이 져야만 하는 짐일 뿐이다. 사랑은 그 짐을 가볍게 하고 기쁨을 선사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재의 수요일은 사랑이 비추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수도 공동체서는 수사들이 맨발로 나가서 재를 받는다. 맨발로 거니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신발 없이 걷는 한 사람의 침묵으로 가득 찬 교회가 정적에 들 때가 참 좋다. 왜 굳이 신발을 벗느냐고 궁금해할 분도 있겠지만, 기도는 거추장스럽게 입고 신는 것이 없을 때 훨씬 더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신발을 늘 벗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주 기본적인 충만감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보기에는 돈키호테 같은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

“재의 수요일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좀 더 따뜻하게 표현하는 시간을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친절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한 없이 따뜻한 사랑을 더해서” 우리를 바라보신다. 입당성가가 울린다. “모든 이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사랑 (Misereris omnium). 주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그 어느 것도 미워하지 않으시니, 참회하고 절제하는 이들의 죄를 눈감아 주시네.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을 미워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만연한 가운데, 이 지혜서의 말씀은 얼마나 좋은가?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을 미워하는 분으로 생각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미워하시고 그래서 세상의 악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마저도 종종 신을 화난 아버지로 생각한다. 화가 난 신은 자기를 거역한 사람들의 악행을 두고 심판하고 복수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신은 어떤 사소한 잘못도 참지 못하고 하나씩 세어 천벌을 내리며, 갚지 않은 빚을 전혀 탕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신은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숨겨주시고 (dissimulans peccata) 우리 앞에 보이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더러워진 얼굴을 금방 닦고 씻어주고 깨끗한 얼굴로 나오도록 하시는 것처럼. 재가 전해주는 축복은 하느님을 “죄인의 죽음을 전혀 바라지 않는” 하느님으로 알게 한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굴욕에 감동하시고, 우리가 보이는 참회를 보고 마음을 달래시는” 분이다. 그분은 어디에서든 “풍요로운 자비”를 보여 주실 뿐이다 (multum misericors).

이러한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통하여 참회의 선물을 가져 주신다. 이는 비열한 두려움이 없는 슬픔이다. 이 슬픔은 자비로우신 주님의 평온하고 고요한 사랑을 통하여 용서를 받는 것이며, 그 때문에 더 깊고 부드럽다. 전례는 이 사랑을 번역할 수 없는 두 단어로 표현했다 – serenissima pietas. 재의 수요일의 하느님은 고요한 자비의 바다와 같다. 그분 안에는 분노가 없다.”

출처: Thomas Merton, “Ash Wednesday,” Worship 33 (1958): 165-170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