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는 누구인가?

Sunday, October 3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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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는 누구인가?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서울교구는 오는 11월 26일 정기 교구 의회 중에 새 주교를 선출한다. 서울교구만이 아니라 전국 교회가 바른 주교 식별과 선출을 바라며 성령의 인도 아래 한마음으로 기도드리고 있다. 때가 가까워지면서 복잡한 논의와 민망한 논쟁도 적잖다. 바른 지도자를 뽑겠다는 신앙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참에 주교제를 없애면 안되느냐?’ ‘임기만 짧으면 된다’는 차가운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먼저 물어야 한다. ’주교는 누구인가?’ 그 대답을 복음과 교회의 선교 전통 안에서 찾고 있는가? 이 물음과 대답이 없다면 후회를 되풀이한다고 역사는 말한다. 다시, 주교는 누구인가? 우리 기대와 판단 기준은 교회 전통에 근거가 있는가?

주교직은 교회 선교의 필요에 따라 마련된 역사의 산물이다. 성공회는 초대교회 신앙과 삶에 새겨진 주교 상을 온전히 담으려 했다. 복음의 전파와 교회 선교의 방편으로 주교제를 택했다. 그래서 주교제는 그리스도교의 필수 요소가 아니지만, 성공회 전통에는 필수 요소이다. 주교제를 포기하면 적어도 성공회는 아니다. 여기에 이견을 달 수 없다. 문제는 주교직을 바로 이해하고 세우는 일이다.

초대교회와 성공회 전통은 주교를 신앙의 교사, 공동체의 사목자, 복음의 진리에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로 가르친다.

교사로서 주교는 생각과 신념이 어지러운 신앙을 바로 세우고, 변화하는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득하는 사람이다. 교회와 세상을 위태롭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경험을 분석하여 신학으로 정리하고 이를 신앙의 행동으로 이끈다. 주교는 현장의 신학 교사이다.

사목자로서 주교는 ‘교구’라는 한 교회를 신앙의 기준과 전례의 행동으로 아우르고 돌보는 사람이다. ‘교구’라는 한 교회의 책임 사목자인 주교는 자신의 대리자인 사제를 지역교회에 파송하여 주교의 권위로 신자를 보살핀다. 다양한 지역교회의 신앙과 선교의 일치는 전례 안에서 확인하고 쇄신한다. 이것이 선교를 위한 권위와 위계질서의 본질이다.

순교자로서 주교는 복음 전파와 선교에 삶을 바치는 사람이다. 여기서 권위가 선다. 순교(마티리아)라는 말은 ‘복음 증언’의 다른 말이었다. 순교자는 권력과 지위와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신앙을 세우고 이를 공동체가 누리며 증언하도록 돕는 일이다. 그 밖의 일은 순교의 의지를 꺾는 온갖 유혹일 뿐이다.

주교는 교사와 사목자와 순교자로서 일만 하면 된다. 신자들은 주교에게 다른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지위로 생겨난 여러 다른 일에 귀와 눈을 파는 주교나, 주교에게 불필요한 책임을 다 맡기면서 그 업무 수행을 비판하는 신자나 모두 주교직을 위험에 빠뜨린다. 주교에게서 최고경영자(CEO)를 기대하면, 주교도 망치고 교회도 망친다.

본연을 되찾아 거듭 물어야 올바른 주교 식별이 가능하다. 이제 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다음 호에 계속)

  1. [성공회신문] 2016년 10월 30일 치 – 서울교구 주교 선거를 앞두고 [성공회 신문]의 요청으로 짧은 글을 썼다. 이번 호에는 “주교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주교의 근본적인 직무를 되새기고, 다음 호에서는 “주교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주교 선출을 위한 식별의 기준을 제공한다. []

자캐오 신앙 – 돌무화과 나무 아래

Saturday, October 29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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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 신앙 – 돌무화과 나무 아래 (루가 19:1-10)

자캐오의 삶에는 여러 결이 가로지릅니다. 그 탓에 싹둑 잘라 판단하거나 손쉬운 교훈을 끄집어내기보다는, 겹친 결들을 조심스레 들춰야 합니다. 그는 부자 세관장입니다. 동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세리들의 우두머리인지라 부정하게 재산을 모은 부자입니다. 한편, 그는 키가 ‘작다’고 합니다. 사람이 겪는 열등감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약탈하는 로마제국의 부역자가 된 까닭은 이 복합감정 안에서 자신을 ‘더 크고 높게’ 만들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이룬 부와 권력으로 그는 행복할까요?

자캐오가 오른 ‘돌무화과나무’에도 여러 뜻이 겹쳐있습니다. 말 그대로, 내다 팔 열매는 맺지는 못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길을 오가다가 잠시 허기를 달래는 데나 쓰입니다. 자캐오가 그 나무에 올랐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의 등에 올라타서 그마저 빼앗아 먹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전혀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며 살기보다는, ‘작다’는 열등감과 창피를 무릅쓰고 소년처럼 나무에 오릅니다. 다른 이들보다 불의한 자신으로서는 결코 가까이할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예수님을 멀리에서나마 꼭 보겠다는 다짐입니다. 인간 양심의 마지막 안간힘입니다. 이 의지가 신앙이며 구원을 향한 도약입니다.

반전은 여기서 일어납니다. 군중의 인기와 환호가 예수님을 둘러쌀 때, 여러 면에서 ‘작고 부도덕한’ 자캐오는 이 사이에 낄 수 없습니다. 대중의 인기와 추종은 고정관념이 되어 종종 사람의 눈을 가립니다. 사람은 대세에 자신을 맡겨 안위와 안전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군중과 함께 떠밀려 누리는 고정관념의 종교는 얕고 가벼워서 인생의 파도를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더 나쁘게는, 신앙의 진실에 더 깊이 다가오려는 이들도 막아서기 일쑤입니다. 이때는 외로움의 위험과 연약함의 노출을 무릅써야 합니다. 새로운 곳에 오르는 수고로 넓고 멀리 바라봐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만남은 ‘회복’입니다. 돌무화과나무의 히브리말 ‘쉬크마’의 뜻입니다. 자캐오를 불러 권력과 탐욕의 사다리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자신의 작음을 있는 그대로 세상 사람 앞에 내보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무시겠다고 하십니다. 자캐오는 다시 한 번 위험을 무릅쓰고 이 초대에 용감하게 응답합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새로운 행동으로 과거의 빚을 갚겠노라는 회개의 약속입니다. 여기에 그의 환한 기쁨이 서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이 이 기쁜 다짐과 행동을 확인하여 회복합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 하느님의 자녀이다.”

세상 종교가 말하는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은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에서 사라집니다.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서나마 더 멀리 보려고 수고할 때,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서로 배우며 초대할 때, 우리 삶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저마다 다르고 독특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인정하며 펼쳐집니다. 우리는 모두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 겨자씨 한 알의 인내와 생명

Sunday, October 2n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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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겨자씨 한 알의 인내와 생명 (루가 17:5~10)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무너졌으며,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하바 1:4). 하바꾹 예언자의 탄식이 오늘도 세계 곳곳 멀고 가까운 여러 지역과 세대를 불문하고 계속 터져 나옵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지키며 하느님께서 약속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뿌린 땀과 눈물과 피가 세월 속에 흥건한데도, 세상은 좀체 바뀔 줄 모르는 것 같아 야속합니다.

고통과 슬픔에 지쳐 절망하는 목소리도 커갑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이 헛된 짓을 한다는 비아냥도 들리는 듯합니다. 눈에 띄지 않고 적당히 살자는 처세술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이때 신앙이 흔들립니다. 예언자의 절규에 하느님께서 단호한 목소리로 응답하십니다. “끝날은 기어이 온다, 멋대로 설치지 마라, 의로움은 신실함에 있다”(하바 2:4).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을 판단 기준으로 삼지 말며, 하느님의 가치에 충실할 때 우리는 정의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 대한 신뢰와 투신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사도들은 눈에 띄는 효과와 성과를 당장 달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크기로 재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의 핵심은 작은 바람에 흩날리도록 미약하고, 마음 먹고 부릅뜨지 않으면 금세 지나칠 수도 있는 ‘겨자씨 한 알’에 있습니다. 미약한 채로도 견뎌내는 힘입니다. 그 안에 숨 쉬는 생명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우리 삶의 최고 판단 기준으로 삼고, 세상의 작은 것들이라도 쉽게 무시하지 말고, 새롭게 발견하고 눈길을 주며 보살피라는 당부입니다.

하느님의 약속과 예수님의 당부는 믿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잘해드려서 그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거래가 아닙니다. 작은 인간은 크신 하느님께 그 무엇으로도 잘해 드릴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고뇌와 고통을 없애려는 진통제도 아닙니다. 그 호소가 믿음이라면 세상의 고통은 이미 없어졌어야 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지켜보시며 함께하신다는 신뢰 속에서 싹 틉니다. 동료 신앙인과 더불어 이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가치를 지켜나간다는 확신으로 협력할 때 자라납니다.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서로 지탱해 주며 풍파에 꺾인 상처를 위로하고 격려는 헌신으로 튼튼해집니다. 이 줄기에 수많은 신앙인의 땀과 눈물과 피가 스며들어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고, 많은 이를 먹이며 생명을 키웁니다. 이 일이 믿음의 교회가 할 일이며, 신앙의 종이 따라야 할 의무입니다.

신앙인은 이러한 믿음의 행동에 부름받은 종입니다. 하느님의 종인 우리는 군말 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입니다.

“하느님, 부족한 종들에게 믿음을 깊이 심으시어,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