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 – 실패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Sunday, April 2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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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 – 실패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요한 13:31~35)1

“사랑 –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 깨나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며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마음의 상태. 이루어지게 되면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 된다.”

몇 년 전 우리나라 극장에도 개봉했던 영화 “행복한 사전”에 나오는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랑에 관한 수많은 책과 자료를 골몰히 살펴서 단순 명쾌한 설명을 담아 사전을 펴내려는 수고 끝에, 그 단어를 삶으로 체험하면서야 그 낱말풀이가 생명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마음을 들뜨게 하여 “하늘에 오르는 기분”을 마련합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 독서에 나오는 대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 땅의 기쁨을 누리고, 새 하늘로 오르는 희망의 환시는 모두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서로 사랑’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설레고 들뜬 사랑 뒤에는 실패와 상처의 어둠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 직전에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에 이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 가리옷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고 “나간 뒤에” 오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제자들은 서로 사랑과 상호 신뢰를 확인하고 다짐하며 스승의 몸과 피를 나누었지만, 그중 한 명은 곧바로 배신의 길을 걷습니다. 뒤이어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부인할 것입니다.

자신의 복락을 바라며 우리가 다짐하는 신앙은 흔들리기 쉽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맹세하는 사랑은 연약합니다. 굳은 신앙으로 성찬례에 함께한 경험도 서로 배신하는 실패를 막지 못하고, 거친 풍파가 넘실대는 삶 속에서 우리가 약속하는 사랑의 감정은 흔들리고 상처 입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걷는 실패와 상처를 아십니다. 이 처지를 아신다는 사실이 오히려 우리의 위로입니다. 이러한 이해와 위로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자신을 향하고, 자기만 바라봐 달라는 사랑은 ‘옛 것’입니다. ‘새 것’은 자기사랑이 가져온 실패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타인에 눈을 돌릴 때, 타인과 더불어 ‘서로 사랑’을 마련할 때 일어납니다. 이때라야 새로운 생명과 삶이 하늘과 땅에 펼쳐지는 약속이 이뤄집니다.

이 약속을 견디어 사랑을 이뤄내는 조건을 눈여겨 보십시오. 유다는 배신했습니다. 배신은 거대한 결단이 아닙니다. 손쉬운 해결책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한 실패를 받아들이며 함께했던 기억 ‘안’에 머물렀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과 통회를 안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모든 기억과 경험을 괴롭도록 벼리고 담금질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새로워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삶을 자기 몸으로 재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우리 삶의 실패와 절망 속에서 우리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으로 우리는 ‘자나 깨나 여전히 그리워하고 몸부림치며’ 서로에게 머물며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 위로와 격려의 사랑을 더 넓은 세계에 펼치는 일이 ‘서로 사랑’의 선교 명령입니다. 헤아리시고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타인을 초대하며, 자신을 용서하고, 서로 용서하는 용기를 북돋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 삶에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집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4월 24일 부활 5주일 주보 []

‘첫’ 소녀 친구들에게 쓰는 편지

Saturday, April 23r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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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녀 친구들에게 쓰는 편지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GFS (Girl’s Friendly Society) 동행사제)

꽤 야릇한 편지글 제목을 뽑았지만, 쓰기까지 여러모로 주저했어요. 꼭 한 해 전 우물가 소식지에 써달라 하여 쓴 글을 읽어보니 너무 많은 소망과 청을 GFS 회원들에게 던진 터라, 더는 적을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게다가 올해 한국 GFS 지도사제를 맡으라는 명을 받은 후에 느낀 부담이 적지 않았고, 그동안 GFS 가 걸어온 길의 수고와 땀이 고마우면서도 무겁게 다가오기도 했으니까요.

“여기에 제가 무슨 말을 더 보탤까요?” “곁에서 이야기하시듯 써 주세요.” 글쓰기가 안 된다고 투정을 부렸더니, 예의 밝은 웃음으로 건네는 격려의 말씀을 회장님과 회원들께서 들려주시더군요. 좀 멀리서 관망하며 뻔한 소리나 하는 일은 접고, 가까이서 뵙는 이에게 드리는 편지라도 써볼 량 마음을 다잡기로 했어요.

얼마 전 문학 관련 글을 쓰시는 교우 한 분이 자신의 글에 김혜순 시인의 “첫”이라는 시 한토막을 옮겨다 놓았더군요. 시 읽기를 좋아했던 시절이 아스라해져 버린 제 처지에 아주 반갑게 다가왔어요. 그 반가움에 시인의 어둡고도 깊은 뜻은 헤아리지 않고 ‘첫’이라는 말이 열어주는 추억과 생각에 저 자신을 멋대로 맡겨 읽었답니다.

“… 당신은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 속에 숨어 있는데, (…) 당신의 첫.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옛날 당신 몸속으로 뿜어지던 엄마 젖으로 만든 수증기처럼 수줍고 더운 첫. 뭉클뭉클 전율하며 당신 몸이 되던 첫. 첫을 만난 당신에겐 노을 속으로 기러기 떼 지나갈 때 같은 간지러움. (…) 세상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 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 잊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김혜순, “첫” 부분)

여기서 저는 GFS 와 관련하여 세 개의 “첫”을 생각했어요. 51년 전 폐허가 된 한국 사회에서 작은 성공회의 더 작은 여성들이 시작한 한국 GFS 의 첫 마음과 다짐은 어땠을까요? 6년 전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탈북여성들의 삶을 도우려는 우물가 프로젝트의 첫 꿈과 각오는 어땠을까요? 그리고 한국의 활동 50년의 땀을 넘어서 100년을 향한 첫 희망은 무엇일까요?

GFS 의 ‘첫’ 마음을 시인의 언어 속에서 발견합니다. 세상 속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여성들에게 “엄마 젖”을 나누며, 서로 사랑으로 “뭉클뭉클” 한몸이 되고, 서로 울고 웃고 떠드는 사귐의 마음이지요. 여성들의 몸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처지 속에서 그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고 “서로 짐을 나누어 지라”는 말씀을 깊이 새기며 걸은 세월이었어요. 그 ‘첫’ 걸음이 우리 땅에서만 50년을 넘어 이제는 원숙한 중년의 삶과 지혜를 얻었고요. 서로 짐을 나누어 질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지워진 멍에를 벗기는 일에도 애를 썼고, 쓰러진 이들을 보살피고 일으켜 세우는 노력을 기울였지요. 이 거친 길은 자칫 우리 중년의 삶을 피곤하게 하여 자기끼리만 보살피는 생활로 이끌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세월의 쇠락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 되고 말 수도 있어요. 이때 우리는 ‘첫’ 마음에 담아서 ‘젖’을 물렸던 아픔과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간절한 아쉬움으로 세상 속 많은 여성과 “뭉클뭉클”하고 서로 “간지러움”을 나누는 삶을 회복했으면 합니다.

우물가 프로젝트의 ‘첫’ 각오는 참으로 감사하고 감동스러웠지요. 우리 역사에 새겨진 분담의 아픔, 여전히 이어지는 대결과 긴장, 그리고 그 안에서 특별히 고통받는 여성들은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눈감지 않고, 우리 ‘소녀 친구들’은 탈북 여성을 돕기 위해 우물가 프로젝트를 시작했지요. 분열과 아픔의 옛 역사를 매정한 마음으로 칼로 끊어내고 새로운 역사의 ‘첫’ 장을 열려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었어요. 여성들의 불안한 갈망을 평화롭고 기쁜 희망으로 바꾸는 그 소중한 발걸음은 이제 걸음마를 떼고 달음질쳐야 할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어린이로 치면 학교 갈 나이인가요? 좀 더 배우고 대화하고 사귀며, 더 큰 장소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더 많이 품는 일로 커나갔으면 해요. 아직 어리고 젊은 ‘소녀 친구들’을 더 얻어서, 원숙하고 너그러운 지혜의 ‘소녀 친구들’이 품어주고 응원해주었으면 해요.

저 개인으로서는 GFS와 첫 인연이 지도사제라는 발령입니다. 귀하고 복된 일이에요.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꽤 무거운 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꼭 짐을 나눠 주세요. 그 ‘첫’ 시작은 ‘지도사제’라는 말이 아니라 ‘동행사제’로 불러주었으면 합니다. ‘동행’은 깊고 아름다운 ‘친구’가 되는 길이니까요. 발령 후에 첫인사로 모인 ‘소녀 친구들’에게 물었어요. 지금까지 한국 ‘소녀 친구들’의 역사에서 전국 ‘지도사제’ 가운데 여성 사제가 있었느냐고요. 없었답니다. 그러니 다음에는 꼭 ‘첫’ 여성 동행 사제를 이 아름다운 모임에 모셔주시기를 바랍니다. 훌륭한 여성 사제들이야말로 가장 멋지게 동행할 ‘소녀 친구’이니까요. 그 ‘첫’ 동행사제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여러 아픔의 기억과 희망의 기억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거에요. 그 ‘첫’을 여는 순간, 이제 우리는 ‘첫’ 생각에 담긴 어린 처지를 잘라내고, 오히려 환하고 젊고 원숙한 삶을 열어가며 더 많은 ‘소녀 친구들’과 기쁨의 짐을 나누게 될 테니까요.

“잊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마음과 각오를 되새기고, 끊어낼 것은 끊어내고, 다시 시작할 일의 ‘첫 시작’을 과감하게 펼쳐갔으면 합니다. ‘첫’ 마음의 축복을 담아 ‘소녀 친구들’에게 깊은 동행의 인사를 드립니다.

  1. 성공회 전국 GFS 탈북여성지원 프로젝트 ‘우물가’ 소식지 2016년 봄 []

부활의 증인 – 역사의 눈물과 상처를 입고

Saturday, March 26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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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 역사의 눈물과 상처를 입고1

‘“이제 기뻐하라, 하늘의 모든 천군 천사들이여, 이 세상의 만물들이여,
이제 즐거워하라, 이 신비하고 거룩한 빛 가운데 감싸인 모든 이들이여.” (부활 찬송)

이 부활밤을 찾으신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지난 사십 일 사순절 여정을 걸어오신 여러분 참 애쓰셨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화해의 시간에 도달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정의와 자유의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사랑의 시간에 당도했습니다.

지금까지 걸었던 사순절 여정은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과 해방의 탈출을 감행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때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일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절제와 기도로 지켰던 사십일 여정은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아가 추위와 싸우고 사방에서 덤비는 날짐승의 위협을 이겨내고, 홀로된 외로움의 고통을 이겨낸 사십일을 가리킵니다.

성서의 전통과 더불어 지난 사순절 여정은 오늘 밤 여기에 모인 우리 자신의 인생과 우리 가족의 역사,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역사를 비추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십일 전 성당에 모여 이마에 재를 받으며, 우리 자신의 운명을 되새겼습니다.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례는 어쩌면 얄밉게도 다른 종교들처럼 축복과 기복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합니다. 우리가 종내에 맞닥뜨려야 할 역사와 운명을 분명히 직시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일 때 우리 신앙은 비로소 발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신의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청소년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걷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며 깨달아갈 때이지만, 공부의 압박과 피로가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성숙과 성장을 저해할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청소년은 몸과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청년은 자신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그동안 갈고 닦는 배움과 기능, 패기와 꿈이 펼쳐지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때가 많은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청년은 두려움 없이 세상을 어깨에 짊어질 꿈을 키워나갑니다.

중년의 세대는 자라나는 자녀들을 키우느라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퇴근하는 밤과 출근하는 새벽을 혼동할 정도로 일하면서도 다가오는 퇴직과 정년을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서로 남편과 아내가 되어 토닥이며 격려하는 손길에 감사하고, 자녀들이 곤히 자는 모습을 슬며시 들여다보며 피로를 잊습니다.

장년과 노년의 삶도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걱정과 손주들을 향한 기도의 땀방울이 잦아들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어머님과 아버님들은 그 인생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삶의 마지막 장을 적어나갑니다.

이 모든 일은 질곡이 많았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도 겹칩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모두 그 증인들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 아래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지만, 우리는 광복과 해방을 맞았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우리는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흘린 눈물과 땀방울은 흙과 먼지와 뒤섞여 건물을 올리는 벽돌이 되어 이 나라를 다시 세웠습니다. 우리는 피와 땀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전 파병에서 흘린 피와 외국 땅의 사막과 탄광에서 흘린 땀으로 사회의 혈관을 마련했습니다.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려고 우리는 불의한 정치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모든 사람이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만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고 스스로 대견해 합니다.

우리 사회는 광야를 지나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듬뿍 받았노라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사회를 세워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일에 하느님께서 동행하셨다고 믿습니다. 이 모든 일에 하느님께서 은총을 부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목격하고 경험하는 삶은 우리가 광야 생활을 끝내지 못하고, 오히려 더 모진 광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합니다. 광야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악마의 시험에 걸려들어 지옥에 빠져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0여 년간 타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좋지 않은 변화의 방향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돌아와서 이곳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나눈 2년 전 첫 설교의 시작은 생활고에 찌들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송파 세 모녀 이야기였습니다. 몇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우리 사회는 304명의 꽃 같은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침몰이라는 허망하고도 절망스러운 사건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눈물처럼 젖은 어린 딸과 아들의 시신을 퍼렇게 멍든 가슴에 품고 절규해야 했습니다. 그 절규의 눈물이 아직도 우리 거리와 가슴에 흥건합니다.

이때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부르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을 뜻하는 영어 단어 ‘헬’(hell)과 계급과 억압의 왕조 사회를 뜻하는 ‘조선’이라는 말을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굳이 따져보면, ‘헬’은 종교적인 용어고, ‘조선’은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용어의 결합은 어제 성금요일에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과 겹칩니다. 이 사건은 종교 권력이었던 바리사이파와 대사제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게다가 정치권력자들인 헤로데와 빌라도는 모함과 불의를 알면서도 예수님의 처형을 인가했습니다. 정치권력자들은 군중의 소요 사태를 두려워하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며 진실에 눈을 감았습니다. 불의한 지시를 내린 정치권력은 협잡하였습니다.

정치의 원론은 말합니다. 개인의 삶을 보호하고 공동의 이익을 보살피는 기술이 정치입니다. 이 가치를 지키고 실행한다 하여 ‘보수’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보호와 보살핌의 ‘보수’는 날로 희미해지고, 헤로데와 빌라도가 ‘서로 다정하게’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고,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불의가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말합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제 눈에 있는 것들만 바라보는 데 빠져들기 쉽습니다. 주위를 다 헤아려 보살피지 못합니다. 이때 종교는 우리 눈이 다른 이들을 살펴보도록, ‘나’ 자신보다 더 큰 세상과 가치를 바라보도록 새로운 창을 제공합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람, 연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눈으로 찾아서 마음에 품으라고 말합니다. 눈앞에 있는 일만, 자기 몫의 떡만 바라보지 않고, 더 멀고 깊은 하느님의 시선을 우리 눈으로 삼아 세상의 가치를 비판하고 수정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걸은 사순절 내내, 눈을 달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치시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뜨게 하셔서 하느님 나라를 보게 하셨습니다. 멀쩡한 다리와 손을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을 물리치시고, 절름발이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어 다른 이들을 보살피는 손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건강한 신체를 지니고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일에만 바쁜 사람을 외면하시고, 열두 해를 앓던 여인을 치유하시고 열두 살 밖에 안되어 죽은 소녀를 일으키셔서 다른 이들과 더불어 가족과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순절 여정은 이처럼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키는 사건이 우리 인간의 삶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내어주기 시작하십니다. 우리 삶의 처지를 잘 헤아리시는 주님은 우리를 조금씩 일으켜 세우십니다.

성 목요일 저녁, 예수님은 우리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2 이미 우리는 모두 세례의 은총 안에서 거룩해진 사람입니다. 거룩한 신앙인도 여전히 세상을 걸으면서 끊임없이 발을 더럽히고 상처 입습니다. 그 발은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그 현실의 발을 어루만지며 씻어주는 일이 성목요일의 세족례였습니다. 주님은 우리 발이 더럽다고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발의 더러움을 인정하고 씻도록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 주님의 명령대로 이제 우리가 다른 이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고, 그 상처를 싸매줘야 합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이 세상을 이겨내는 힘을 얻도록 서로 용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 일로 하나 되는 몸이 교회이며, 이 일이 교회의 선교입니다. 계급사회 ‘조선’이 아니라, 새롭고 평등한 관계의 사회, 서로 섬기고 치유하고 격려하는 사회를 만들라는 사명입니다.

성 금요일에 예수님은 자신을 모두 내어 주셨습니다. ‘나’ 혼자 잘 나서 이룬 성에 갇혀 지내지 말고, 그 성과와 지위마저 내려놓아 자유롭게 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모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치욕을 몸소 받으셨습니다. ‘내가 이룬 지위와 권력과 명예’를 못 박으라는 초대입니다. 이 초대를 거절하며, 완력과 폭력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에서 손떼라는 처절한 당부였습니다. 그 당부마저 거절한 우리를 예수님은 비난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남을 쉽게 정죄할 수 없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침묵의 어둠과 부재의 슬픔에 휩싸여 우리가 웅크리고 있던 성 토요일에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지옥’에 들어가셨습니다. 인생의 가장 낮은 곳, 가장 어둡고 슬픈 곳으로 몸소 내려가셨습니다. 그 삶의 밑바닥에서, 그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을 건져 올리셨습니다.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지긋지긋한 지옥처럼 보이는 ‘헬’ 사회의 바닥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더불어 절망을 딛고 일어서라는 초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헬-조선’을 이겨내며, 부활밤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이 부활밤을 밝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셨던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 여성들은 어떻게 부활의 목격자가 되었을까요?

그들이 흘렸던 눈물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절망의 눈물이 그동안 세상 가치의 오물로 가려진 눈을 씻어내렸습니다. 그 눈물이 흥건하여 그들의 눈에 오목렌즈가 되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삶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이 휑 뚫린 상처를 지닌 탓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라도 품어 만지고 싶도록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의 상처가 예수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뚫은 상처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상처에만 갇혀있지 않고, 예수님의 상처와 겹쳐진 자신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자신의 상처와 예수님의 상처를 포개어 세상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주님의 부활한 몸에 여전히 남아있던 상처 안에서 다른 이들의 상처를 발견하였고, 그 상처를 창으로 삼아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눈물과 상처를 통해서 여인들은 부활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눈물보다는 두려움이, 상처보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던 남성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바로 이 어둠을 뚫고 무덤을 찾았던 여성들이 부활의 증인과 새로운 사도로 일어섰습니다. 여성들이 전한 부활의 증언을 남성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존재의 연약함을, 두려움과 실패를 인정하고,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 내딛는 이가 신앙입니다.

오늘 이렇게 어둠과 두려움의 물속으로 뛰어들어 세례를 받으며 그리스도인의 눈물과 상처를 지니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 공동체 안에 환영합니다. 우리 자신도 세례 언약을 갱신하며 다시금 우리 삶에 있는 눈물과 절망과 상처를 되새깁니다. 우리의 수고와 땀과 피로 마련한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봉헌하여 변화하게 해달라고 청원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신 성체와 보혈을 우리 몸속에 받아들이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과 몸의 변화를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바쳐서 봉헌하시며, 우리의 삶을 봉헌하도록 이끄신 예수님의 몸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서로 용서하고 하나 되어 세상을 이기는 공동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일어선 부활 생명입니다. 이 밤에 여러분은 이 부활 생명의 증인입니다.

이 믿음과 확신 안에서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모두 모여 오늘밤 우리처럼 이렇게 소리쳐 외쳤습니다. “크리스토스 아네스티, 알리토스 아네스티”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3월 26일 부활밤 전례 강론 []
  2. 성목요일 성유축복예식 직후 임종호 신부님과 대화에서 정리한 성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