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기억의 공간을 위하여

Saturday, April 16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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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기억의 공간을 위하여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하느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잊히지 않으리라.” 전쟁이나 학살, 예기치 못한 참사로 무고한 보통사람들이 희생당한 일을 기리려고 기념비에 자주 쓰는 성서 구절입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신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루가 12장 6절).

차가운 돌에 새겨진 말씀 앞에 멈춰 섭니다. 촛불 하나를 켜서 한때 뜨거운 피로 움직였던 이들과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단호한 마음을 생각합니다. 잠시나마 침묵 속에서 불편한 죽음을 애써 외면하거나 잊으려는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지상에서 함께 울며 웃고 뒹굴던 사람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몸을 찢고 나온 생때같은 어린 목숨과 힘없는 사람의 생명을 어찌 그만 잊으라 할 수 있을까요?

기억은 그리스도교에서 신앙의 동의어입니다. ‘기억 = 신앙’의 등식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 전체에서 되풀이되는 명령입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 – 지상의 생명은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으며 지금도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에집트 종살이에서 끌어내신 분을 기억하라” – 억압과 불의의 역사를 끝내고 인간에게 자유와 정의를 베푸신 하느님을 품고 그 일을 우리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이어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너희와 맺은 모든 계약을 기억하겠다” –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신앙의 약속과 희망을 품은 이들과 함께하시겠노라고 하느님 스스로 다짐하십니다.

이 기억의 절정은 “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아남네시스). 예수님께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고 당신의 찢긴 몸을 내어주시며, ‘기억은 신앙’이라는 진리를 성찬례에 영원히 새겨 놓았습니다. 씻고 내어주는 이 기억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몸에 되새기는 일이 신앙이요, 밖으로 나가 이웃과 더불어 펼쳐나가는 일이 선교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품어 기억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이 신앙의 잣대입니다. 이 잣대가 아니라 세속 이념의 편견으로 죽음과 슬픔에 정치적 혐의를 두는 일은 하느님을 가리는 인간의 오만입니다. 이 잣대로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생명을 잃은 슬픔과 고통의 울부짖음에 귀 막는 일은 신앙의 배신입니다. 신앙의 인간은 오롯하게 생명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식과 친지와 친구의 죽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 상실의 슬픔을 우리 마음에 품습니다. 세월의 바람과 안위의 물살이 그 생명의 기억을 망각할까 염려하여 돌과 거리와 공간에, 닳지 않는 사랑의 기억을 함께 남깁니다.

하느님의 기억과 인간의 기억이 만날 때 거룩한 신앙이 탄생합니다. 생명을 만드신 하느님의 아름다운 기억이 생명을 품다가 떠나보낸 인간의 슬픈 기억을 만나 서로 위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슬픔의 기억을 품어서 기억의 촛불을 밝히고 위로와 희망의 기도를 바치는 곳은 어디든 거룩한 공간입니다. 영국 런던 서덕 주교좌성당의 기도처는 1989년 템스 강 유람선 침몰로 생명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 가족과 친구들을 위로합니다. 커다란 돌판에는 하느님의 사랑 노래가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어떤 큰 물살로도 그대의 사랑을 끄거나 쓸어가지 못하리”(아가 8장 7절).

우리는 거룩한 기억의 공간을 우리 신앙과 공동체에 마련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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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복음닷컴] 2016년 4월 17일 치 []

신앙의 출사표 – 해방의 은총이 지금 여기에

Sunday, January 2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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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출사표 – 해방의 은총이 지금 여기에 (루가 4:14~21)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예수님과 하느님이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천명합니다. 하늘은 무서운 심판을 내리는 곳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마음에 품는 넉넉한 관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나누는 우리도 죄와 심판의 두려움에 떠는 여느 ‘종교인’에서 이제 하느님과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자유로운 신앙인’으로 변화합니다. 이 새롭고 친밀한 관계가 예수님께서 펼치시는 선교의 핵심입니다. 이 관계의 선교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 하느님과 신앙인의 관계를 통과하여,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삶에서 펼쳐져야 합니다.

작은 곳에서 더 넓은 곳으로, 한 개인에서 공동체와 사회로 펼쳐지는 신앙인의 삶이 명백합니다. 세상이 보기에 작고 보잘것없는 곳에서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천한 갈릴래아에서 세례의 사건이 일어나고, 작은 나자렛에서 예수님의 출사표가 들려옵니다. 갈릴래아와 나자렛은 또한 하느님의 구원과 예수님의 복음이 사회 정치의 환경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구원과 복음은 지금까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향합니다. 가난한 사람,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을 부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은총은 사회와 정치의 해방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이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의 안녕과 기복에만 갇힌 원시 종교를 초월하여 사회와 공동체 전체와 관계합니다. 예수님께서 호명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한, 우리 신앙도 이 상황에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신앙인은 복음에 따라 자신을 성찰합니다. 사회 정치의 현실에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말씀을 우리 자신의 내면에도 깊이 적용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인색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부의 가치에 묶여있지 않은가? 우리는 사회의 불의에 눈 감고, 이웃의 아픔에 귀를 막고 살지는 않는가? 우리는 세상의 권세에 억눌려 체념하며 살지는 않는가? 이 상황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용기가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리 삶의 처지에 동행하시며 해방의 은총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은 분,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를 나눈 우리 신앙인 역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에 해방의 은총을 선포하고 실천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곳, 세상의 작은 곳에서, 작은 사람들과 더불어 이 세상에 구원을 알리며 몸으로 살겠다는 신앙의 출사표를 던지는 사람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1월 24일 얀중 3주일 주보 []

구원의 길을 닦는 신앙

Sunday, December 6th, 2015

구원의 길을 닦는 신앙 (루가 3:1~6)1

예수님은 역사의 현장에 오십니다. 오늘 복음이 낯선 이름과 지명을 굳이 상세하게 기록하여 들려주는 이유입니다. 티베리오와 빌라도, 헤로데와 필립보, 리사니아라는 정치 권력자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안나스와 가야파 같은 종교 권력자들의 이름도 빠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특정한 지역과 사회를 지배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갈릴래아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고, 예루살렘은 유대교 성전의 핵심부였습니다. 이 현장에서 정치와 종교의 권력자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서로 얽혀 야합하거나 견제합니다. 이 현장에서 권력자들이 의기투합하면 힘없는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수고와 땀을 고스란히 빼앗기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차별과 격차가 깊어지고, 억압과 희생이 꼬리를 뭅니다. 이 현장에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역사의 현장에 먼저 나타난 사람이 있습니다. 중심의 권좌에 틀어 앉은 힘센 사람들 앞에 우뚝 선 세례자 요한입니다. 권력자들은 요르단 강 변방에 기이한 모습으로 나타나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푸는 요한을 우습게 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그 하찮고 연약해 보이는 일에 자신의 혼신을 담아 두려움 없이 외칩니다. ‘회개하라 – 지금 살아가는 방식을 멈추고 방향을 돌려라. 세례를 받아라 – 과거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라. 용서를 받아라 – 자신을 옥죄는 과거와 일에서 몸과 마음을 놓아 자유를 얻어라.’ 권력이든 재산이든, 지위든 명예든, 가진 것이 많으면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사회에 널리 퍼진 차별과 격차를 묵인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이를 그치고, 돌이켜, 놓아버릴 때, 우리 삶에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변화를 향한 적극적인 참여와 행동이 신앙입니다. 이 행동의 신앙이 새로운 길을 마련합니다. 대림의 준비는 소극적으로 ‘기다리는’ 일이나 ‘앉아서 받는 일’과 거리가 멉니다. 세례자 요한 성인이 밖으로 나가 외치듯이, 예수님께서 역사를 뚫고 우리 삶에 들어오시듯이, 신앙인의 준비는 ‘우뚝 일어서, 나아가 길을 닦는’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을 닦아 예수님의 길을 내고, 더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을 닦는 일꾼으로 초대합니다. 우리 삶 자체가 예수님께서 걷는 길이 되라는 호소입니다. 신앙인은 우리 삶과 사회 곳곳에 놓인 골짜기 같은 차별과 격차, 험하게 뒤틀린 억압과 상처의 방식을 “참된 지식과 분별력”(필립 1:9)으로 살핍니다. 신앙의 식별력으로 사람살이, 살림살이를 힘들게 하는 일에 맞섭니다.

다시, 대림은 우리 삶과 역사의 현장에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시간입니다. 우리 삶이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펼치시는 구원의 길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수련하는 때입니다. 자신이 일군 성공과 성취의 성곽이든, 자신이 숨어든 실패와 절망의 울타리든, 모두 자기 안에 웅크려 갇힌 감옥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신의 감옥은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되기는커녕 불안과 우울이 자라나는 음지입니다. 신앙인의 눈은 자신에게서 돌이켜 세상과 이웃을 바라봅니다. 자신을 열어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모시고, 자신과 사회의 골짜기에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입니다. 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드러내며, 그늘 아래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이 구원의 길을 닦는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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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2월 6일 대림 2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