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 자기 중심성을 끝내는 신앙

Sunday, November 15th, 2015

종말 – 자기 중심성을 끝내는 신앙 (마르 13:1~8)1

“저것 봐요.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가요?” 오랜 세월 주교좌 성당을 가로막았던 추레한 건물이 무너지고 단아한 아름다움과 품격을 지닌 성당이 세상에 환히 드러나자 사람들은 감탄했습니다. 우리 성당에 찾아온 방문객이 지난 달에만 이천오백 명을 넘었습니다. 즐거워하는 우리에게 어디선가 “저 성당이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말이 들려온다면, 우리의 느낌과 반응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바라보며 안타깝게 하신 말씀을 어찌 감히 우리 성당에 빗대느냐고 매우 성낼 모습이 선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당시 유대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성전은 유대와 로마의 전쟁으로 서기 70년에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사람이 감탄하고 소원하는 일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 처지에 따라, 시대 상황에 따라 운명이 뒤바뀌고 불안은 반복됩니다. 사람 마음과 세상 현실은 다르게 돌아갑니다. 사람은 마음의 안녕과 세상의 태평성대를 원하지만, 세상은 즐거움과 기쁨, 고통과 슬픔이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사람이 품은 소원은 거의 비슷한데도, 세상이 그렇지 않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람이 품은 소원과 기대가 서로 다르고, 그 기대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길 바라면, 저마다 품은 소원은 서로 충돌하여 갈등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세우기도 어렵고, 어렵고 만들고 유지한 웅장하고 멋진 사회도 금세 무너지는 위기가 닥칩니다.

성서가 전하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자신만의 편리와 복락을 위해 세운 삶은 매우 위태롭다는 경고입니다. 지금 이뤄놓은 일이 아무리 굳건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뒤편에서 애쓰는 수고와 땀을 되새겨 기억하고 서로 감사하지 않으면 사회와 세상의 기초는 흔들립니다. 웅장한 성취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이 연약해지고 힘들어지는 상황을 나 몰라라 하면서 건강하게 지탱 가능한 사회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르치는 종말은 자기 이익으로만 세운 세상의 질서가 모든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피는 질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경고와 희망입니다. 자기 이익을 내려놓고 서로 양보하여 보살피려는 변화는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럽습니다. 이 고통을 함께 감내하여 파국을 피하고 함께 사는 질서를 마련하는 용기가 신앙입니다.

반복되던 옛 희생제사는 예수님의 ‘단 한 번’ 희생으로 종말을 맞았습니다. 더는 누구에게도 ‘자기 대신’ 희생을 강요하거나 덮어씌우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복음입니다. 사람을 옥죄고 통제하는 데 쓰이던 율법도 원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율법은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 마음에 새겨진 행동 양식과 예법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 곳곳에서 지위나 재산과 권력으로 희생이 여전히 일어난다면, 이를 멈추어 끝내게 하는 일이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가르고 분리했던 휘장을 몸소 찢어 자유롭게 하느님을 예배하게 하셨듯이, 신앙인은 우리 사회에 여전한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는 사람입니다. 눈과 귀를 막고 가르고 차별하는 벽을 뚫고 나온 우리 성당입니다. 서성이는 이들을 환대하며 친교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격려하며 고통받는 사람을 넉넉히 껴안을 때, 우리 성당은 세상에 새로운 질서와 꿈을 주는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으로 영원히 빛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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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1월 15일 연중33주일 주보 []

하느님 나라 – 모든 성인의 감사 잔치

Sunday, November 1s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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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 모든 성인의 감사 잔치 (마태 6:25~33)12

성찬례의 어원은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티아’입니다. 성공회는 이 뜻을 잘 알아서 예전부터 성찬례를 ‘감사제’로 불렀습니다. 2004년 기도서 이후로 우리는 말씀과 성찬을 함께 나누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를 ‘감사 성찬례’로 부릅니다.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잘 헤아린 표현입니다.

‘감사 성찬례’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드러난 구원 사건을 아우르는 잔치입니다. 배고픈 이들을 배불리 먹이신 음식 기적은 교회가 어떤 사람들에게 먼저 눈을 돌려 어떤 일을 실천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힐난을 들었던 예수님은 당신의 식탁에서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성 목요일에 제자들과 나눴던 마지막 저녁 식사는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듯이 신앙인의 삶이 다른 사람을 향한 희생과 헌신이어야 한다는 간절한 부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절망하여 엠마오로 낙향하던 제자들이 낯선 나그네를 만나 동행하며 그의 ‘말씀’을 듣고 ‘음식’을 나눌 때 부활한 예수님을 깨달았던 사건은 그 자체로 성찬례의 구조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성찬례를 드렸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 구원의 잔치를 미리 노래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높이시고 누구 한 명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초대하여 베푸신 잔치입니다. 나라 잃고 헤매던 이들을 거룩한 산으로 초대하여 ‘연한 살코기’와 ‘맑은 술’의 잔치를 베푸십니다. 삶 속에 겪은 상처와 아픔, 실패와 좌절 때문에 고개 숙일 필요 없다며, 잔치의 당당한 손님으로 환영하십니다. ‘살코기와 술’로 마련된 예수님의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며, 그 넉넉한 환대에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흥을 누리는 잔치가 바로 성찬례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 잔치가 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잔치는 몇몇 사람과 특정한 지역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눈물과 슬픔과 고통에 있는 이들을 먼저 일으키시어 아름다운 ‘신부’로 높이 삼아 사랑해 주십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교회가 누리는 혼인 잔치에서 우리 신앙인은 모두 ‘신부’처럼 아름답고 귀한 존재입니다. 이 잔치에서 우리 수고의 땀방울이 포도주와 떡으로 결실을 맺고, 우리 아픔의 눈물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보혈로 거룩하게 됩니다. 이 아름다운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먹고 마시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은 오늘 이곳에 모인 ‘모든 교우들의 얼굴’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는 “솔로몬의 옷보다 화려한 꽃 한 송이들”입니다. 모든 성인과 모든 교우가 모인 교회는 있는 그대로 저마다 다채롭게 피어올라 서로 어울려 다른 색깔을 축하하고 보살피는 장엄한 꽃들의 정원입니다. 이 정원에서 펼쳐지는 환대와 친교의 잔치가 감사 성찬례입니다. 이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우리가 서로 귀하게 여기고 서로 고마워하며 누리는 새로운 관계가 우리가 구하며 맛보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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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2 독서와 시편은 모든 성인의 날, 복음은 추수감사절 복음 []
  2.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1월1일 모든 성인의 날, 모든 교우의 날, 추수감사절 주보 []

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Sunday, October 25th, 2015

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마르 10:46~52)1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답변을 얻으려면 먼저 성서가 전하는 구원에 시선을 돌리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구원의 핵심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은총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일입니다. 구원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일어나 새 힘을 얻는 공동체로 드러납니다. 구원은 신앙 공동체에서 경험하고 나누는 깨달음과 실천입니다.

예레미야는 슬픔과 눈물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권력의 남용과 부패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사는 일이 참담했습니다. 예언자는 정의로운 신앙이 살길이라고 외쳤으나 권력자들에게서 온갖 박해를 받고 절망했습니다. 이 절망 속에서 예언자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권력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희망과 구원을 세우십니다.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자기 안에 갇혀 절망과 눈물의 포로로 사는 이들을 불러내시어, 서로 섞여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특별히, 세상이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우는 공동체에서 구원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사의 온갖 슬픔과 고통은 이제 구원을 꽃피우는 거름이 됩니다. 더 아프고 슬펐던 사람이 더 큰 위로를 받으며, 더 고생하고 땀 흘렸던 이들이 더 큰 찬양을 바칩니다. 성서가 굳이 여러모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열거하는 까닭은 그들의 존재와 경험을 교회의 밑바탕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사제들은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대물림하기에 바빴으나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작은 이들과 함께 스스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더는 되풀이되지 않는 “단 한 번”으로 희생의 악순환을 끊어버리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영원한 대사제가 되셨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체험과 신념을 움켜잡을 때가 아니라, 밖에서 우리를 뚫고 낯선 이처럼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지할 때, 상처로 불구가 된 자기 중심성을 벗어납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던 “앞을 못 보는 거지” 바르티매오처럼, 용기를 내어 자기 안위와 보호의 마지막 ‘겉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께 매달릴 때, 새로운 삶의 시선이 열립니다. 여기에 구원의 은총과 기적이 있습니다. 위대한 구원 사업의 바쁜 발걸음 속에서도 작은 자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처럼, 낯설고 작은 사람들의 울음과 아픔을 둘러보며 바쁜 삶을 멈출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함께 슬픔을 건너고 낯선 이를 환대하며, 함께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넘어 구원을 누리며 축하하는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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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0월 25일 연중30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