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틈으로 스미는 구원의 눈물, 은총의 향기

Sunday, June 12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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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틈으로 스미는 구원의 눈물, 은총의 향기 (루가 7:36~8:3)

여성은 ‘세상의 절반’이라는 말은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무슨 뜻일까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듣노라니 당혹과 충격을 감출 수 없습니다. 무고한 여성이 끔찍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목숨을 잃고, 젊은 여성 교사가 학부형 남성들이 저지른 비인간적 폭행의 무참한 기억을 뇌리에 남겨야 하고, 가난한 여학생들은 자신의 몸을 청결하게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몰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21세기 한국의 민낯이라면, 우리는 문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야만의 시대를 향하는지 모릅니다. 희생자가 된 여성의 사적인 처신을 먼저 들춰내려는 변명마저 스멀스멀 오르는 지경이라면, 온전한 세상을 이루는 ‘절반’을 우악스러운 힘으로 짓눌러 하느님의 창조 질서마저 거부하는 반(反)신앙의 행태입니다.

이미 2천 년 전 일입니다. 여성을 향한 폭력과 차별과 왜곡을 역사의 유물로 만드신 오늘 복음의 사건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나누십니다. 주님은 빈자이든 부자이든, 소위 ‘의인’이든 ‘죄인’이든, 그 누구의 초대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차별 없는 용인을 배반이라도 하듯이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은 ‘행실 나쁜 한 여자’가 벌인 일을 두고, 오히려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흥미롭게도 남성 바리사이파 사람은 이름 있는 ‘시몬’이고, 여기가 어디라고 판을 깨며 밀고 들어온 사람은 ‘근본도 이름도 없는 여성’입니다. 돋보이는 이 대비 속에서 오히려 신앙의 이해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바리사이파는 ‘구별된 거룩한 남성’으로서 율법을 수호하는 사람입니다. 내려온 관습과 율법을 지킨다면서 죄의 경계를 제멋대로 정해서 다른 사람을 쉽게 심판합니다. 사람마다 지닌 복잡하고 난처한 처지를 너그럽게 헤아리지 않습니다. 사람과 어울리되 이익에 따라 관계의 거리를 조정합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완벽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반면, 문제의 주인공은 우쭐대는 유명인사들의 파티장을 침범하는 ‘행실 나쁜 여성’입니다. 세상 풍파에 부서진 사람입니다. 그는 값비싼 향유를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며, 낯선 사람의 발에 입 맞추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닦아드립니다. 지극한 친밀함으로 경계를 뚫고, 차별의 벽을 성큼 넘습니다. 그의 눈물은 무디고 굳어버린 종교를 적시고, 그의 향유는 계산으로 이뤄진 장소에 손에 잡을 수 없는 풍요로운 향기를 선사합니다. 거짓된 웃음의 인사치레에 뜨거운 살의 접촉을 마련하여 머리카락이 휘감는 사랑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이 용기가 여인의 신앙이요,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이 펼치는 은총이요, 용서와 구원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펼치는 구원 선교의 여인들을 소개합니다.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다 셀 수 없는 여인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하느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회복하시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힘없는 사람, 연약한 사람, 부서지고 깨진 사람, 여전히 차별받는 사람이 지닌 상처를 그 자체로 죄의 결과로 말할 수 없다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오히려 그 상처의 눈물과 아픔은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는 통로입니다. 그 깨진 틈으로 은총의 향기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터진 눈물로 우리의 잘못을 씻고 새로운 은총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슬픔에 닿아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

Sunday, June 5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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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닿아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 (루가 7:11~17)

자녀를 잃은 슬픔은 그 누구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위로의 말을 찾기 어렵고, 자기 몸이 끊어져 나간 듯한 아픔을 겪은 당사자도 그 슬픔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그저 어둠의 구멍 속으로 끝을 모르고 계속 추락하는 느낌일 뿐이라는 증언과 함께 어떻게도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없는 상태를 눈물로만 확인할 뿐입니다. 오늘 성서 이야기는 극한의 슬픔에 덮인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어머니의 추락을 멈추려 그 슬픔의 밑바닥에 닿으려 온 몸을 내미는 엘리야 예언자와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 만남 속에서 구원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엘리야와 과부는 이미 인연이 깊습니다. 박해를 피해 숨어다니며 배고픔에 지쳤던 낯선 손님 엘리야에게 자신과 아들의 마지막 식사를 포기하고 바쳤던 환대의 여인입니다. 그 환대에 내린 축복으로 여인과 아들은 배고픔을 면했지만, 아들은 이내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에게 아들은 함께 죽을지언정 먼저 보낼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죽음에 책임을 지겠다는 엘리야의 태도가 결연합니다. 어머니의 슬픔을 자신의 온몸에 담아 싸늘한 아들의 몸에 겹칩니다. 자신을 죽음의 현실에 내어놓은 행동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에 담긴 뜨거운 생명을 아들의 몸에 전하려는 몸부림입니다. 슬픔이 서로 닿아 이어졌을 때 생명은 다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만난 장례 행렬은 두 겹으로 겹쳐진 슬픔을 또렷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남은 자식마저 보내는 무참한 현실입니다. 두 겹의 상실은 한 여인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 합니다. 상여를 따르는 그의 발걸음은 자기 존재의 무덤을 향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절망의 행진을 멈출 힘은 오직 연민입니다.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은 연민의 손을 뻗어 감히 오염과 부정과 죽음의 현실에 ‘손을 댑니다.’ 죽음을 멈추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당신 손을 더럽히시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나 슬픔과 절망에 닿은 손은 더럽혀지지 않고, 오히려 “젊은이”를 일으켜 세우며 여인의 존재도 지켜냅니다.

우리 사회에 상실의 슬픔과 죽음의 절망이 편만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의 목격자이면서도 종종 방관자로 머물기도 합니다. 비난과 책임을 면하려는 변명에 분노하면서도, 어쩌면 이런 사회와 공동체를 만들어낸 우리 자신의 책임은 돌아보지 않거나 손을 멀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로는 어머니에게 숙명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잃은 사람의 불행을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슬픔의 깊이에 손을 내밀고 몸을 겹쳐서 어머니의 눈물과 온기를 다른 모든 생명을 품어 전하려 합니다. 죽음의 행렬을 가로막는 이 용기야말로 세상의 젊은 생명을 더 잃지 않고 세우는 신앙의 몸부림입니다. 타인의 슬픔이 우리 몸에 닿아 우리가 그 슬픔을 부축할 때 구원의 틈이 열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연민이 낳는 구원이요,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 펼치는 구원의 손길입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 환대의 고백과 치유

Sunday, May 29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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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 환대의 고백과 치유 (루가 7:1~10)

‘이방인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지금 들으면 엉뚱한 질문 같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자못 심각한 사안이었습니다. 유대인 전통과 관습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 자주 맞섰습니다. 오늘날 고쳐 물으면 ‘우리 성공회 전통에 낯선 사람, 우리 교회의 관습을 잘 모르는 사람도 교우가 될 수 있나요?’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물론이지요’ 하고 한목소리로 대답하며 서로 초대하는 너그러움이 넉넉한가요?

오늘 복음은 이 환대의 자세와 그 결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울러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한 교우들의 태도와 새롭게 우리 공동체를 찾는 새교우들의 자세를 되새겨 줍니다. 로마 군대는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며 편견도 높이 쌓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등장한 백인대장(로마 군인 백 명을 이끄는 부대장)은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났습니다. 살벌한 위계질서의 군대에서도 아랫사람을 친절히 감쌌고, 식민지 피지배층의 종교를 존중하여 예배 공간도 지어주었습니다. ‘이방인’, 아니 ‘로마의 군인’이라는 딱지에 붙은 편견으로는 그 사람의 진면모를 놓치기 쉽습니다.

백인대장이 지닌 친절과 존중의 미덕은 그의 섬세한 배려에서 더욱 빛납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함부로 만날 수 없었고, 혹시라도 그럴라치면 ‘유대인’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이를 조심스레 살펴 이미 알고 지내는 유대인에게 부탁하여 예수님께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청을 올립니다. 이런 자세에 감동한 예수님은 몸소 그의 집에 방문하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친구를 시켜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시면 종이 낫겠다’며 겸양의 태도를 전합니다.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이런 마음이 바로 통큰 믿음이라 감탄하시고 칭찬하십니다. 결국, 어떤 만남도, 만짐도, 선언도 없이 그 종은 치유를 경험하였습니다. 서로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환대의 고백과 겸손한 경청, 그리고 감탄과 칭찬의 과정이야말로 새로운 치유 사건입니다. 초대교회 역시 이렇게 낯익은 사람과 낯선 사람이 서로 내어놓고 서로 받아들이는 관계 안에서 서로 치유하며 교회와 선교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백인대장의 너른 태도와 겸손한 고백은 우리 전례의 영성체 고백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때는 이방인이었고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친절과 존중과 겸손이 마련한 섬세한 배려 속에서 우리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편견을 지우며 한 공동체로 모입니다. 한 빵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높은 지위와 값진 체험을 홀로 누리지 않고, 더 낮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생명을 살리려 자신을 더 낮추어 베풀며, 새로운 세계에 자신을 엽니다. 이것이 복음을 따르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낯선 이들과 함께 환대의 고백 안에서 서로 누리는 치유의 은총입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낫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