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린칭, 그리고 밥 말리 “구원의 노래”

Friday, September 12th, 2008

첫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투표권도 없는 이방인인 내게 이게 중요한 질문인 것은 역시 미국이라는 ‘제국’의 위치때문이다. 미국이 기침하면, 우리 한반도는? ‘같은 “제국”이니 그 통치자가 부시-매케인이든 오바마이든 매 한가지’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적어도 지난 8년 간 우리는 그 차이를 실감했다.

오바마 당선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까? 뉴욕 타임즈에서만도 여러 생각들이 엇갈린다. 빈정거리는 사람부터 시작해서(브룩스), 사람의 뱃속을 건들지 못하는게 약점이라고 훈수두는 듯하면서 싫은 속내를 은근히 들이미는 사람(프리드먼), 그리고 이른바 미국 문화에 편만한 반지성주의를 찬찬히 분석해 보이는 시선(크루그먼)까지 다양하다. 오바마 지지자들의 걱정을 물어보니, 많은 이들이 크루그먼과 생각을 같이 한다. 게다가 시꺼먼 속이 훤히 보이는 공화당의 페일린 부통령 후보 지명 이후의 판세에 우려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인종차별 문제는 순서에서 밀려 있다. 백인들만 만나봐서 그런가? 아마 반지성주의, 전쟁과 애국주의, 그 다음으로 인종 차별을 걸림돌의 순위로 두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야 내 피부가 “살색”이라 당연히 받아들여지지만, 이곳에서는 내 피부와 머리칼은 도드라진다. 피부는 감출 수 없다. ‘오바마가 흑인이 아니라면 이번 선거는 따놓은 당산 아니냐?”는 내 물음에 백인 리버럴들은 그리 쉽게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게 이면에 작동하지만, 이미 미국 대선은 워낙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임이 되었고, 양 당 지지자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분열의 폭이 크다는 이유다.

“육체의 힘을 취하고, 영혼을 빼앗아라.”

피부색이 다른 나는 여전히 끙, 하니 앉아 다른 생각을 한다. 미국 백인들이 전혀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미국 흑인들의 삶과 역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런던 행 비행기 안에서 쭈그리고 보았던 영화 “The Great Debaters”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1930년대 미국 흑인 대학의 유명한 토론 경쟁 팀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는 흑인 차별과 학대의 참혹한 표현이었던 “린칭”(lynching)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팀의 지도 교수인 톨슨 교수(덴젤 워싱턴 분)는 “린칭”의 기원과 속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말이 있지…] ‘노예들을 죽이지 마라. 대신에 그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어라. 노예는 쓸모가 있으니 잘 사육해야 한다.’ 린치가 누군지 아는 사람 있나?… 그는 웨스트 인디의 악독한 노예 소유주였네. 식민지 버지니아에 살던 노예 주인들은 이 노예들을 다루는데 문제가 생겼어. 그래서 이들은 린치(Mr. Lynch)를 보내서 그가 쓰는 방법을 가르치게 했지. ‘린칭’이라는 말은 그 사람 성을 딴거네. 그의 방법은 아주 간단했네. 하지만 아주 악독한 것이었지. ‘노예의 육체를 강하게 유지시켜라.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약하게, 노예 주인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어라. 육체의 힘을 취하고, 영혼을 빼앗아라.’

린칭이 실감 있게 안들어 온다고? 이곳을 열어 보시라! (노약자들은 삼가시라). 린칭 장면을 담아 우편 엽서로 만들어 보냈던 여러 백인들의 ‘시선’에 동참해 보시라.

실제로 린칭은 노예 해방 선언 이후 더욱 극심해졌다. 이 참혹한 사적 형벌인 린칭은 20세기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1960년 대의 미국 인권 운동 이후에야 린칭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대신 이 린칭의 ‘철학'(차라리 신학)은 다른 온갖 차별의 효과적인 원리로 작동하며 여러 곳에 숨어 들어 있다.

밥 말리 – [구원의 노래]

독일 공연에서 노래하는 밥 말리(Bob Marley)를 엿보았다.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이 눈물처럼 느껴졌다. 흑인 노예들의 땀은 그들의 피눈물이었다.

Redemption Song

Old pirates, yes they rob I
Sold I to the merchant ships
Minutes after they took I
From the bottomless pit
But my hand was made strong
By the hands of the Almighty
We forward in this generation
Triumphantly
Won’t you help to sing
These songs of freedom
‘Cause they all I ever had

Redemption Song, Redemption Song

Emancipate yourself from mental slavery
None but ourselves can free our minds
Have no fear for atomic energy
‘Cause none of them can stop the time
How long shall they kill our prophets
While we stand aside and look
Some say it’s just a part of it
We’ve got to fullfill the book
Won’t you help to sing
These songs of freedom
‘Cause they all I ever had

Redemption Song, Redemption Song, Redemption Song

교회와 구원: 성사적 원칙과 성공회 전통

Thursday, May 8th, 2008

그동안 몇몇 신부님과 대화하는 참에 사목적 경험에서 나온 신학적 관심들은 결국 구원론과 교회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나눴다. 그렇다. 전통적인 신학적 논쟁뿐만 아니라, 교회 분열까지 야기하는 최근의 신학적 논란들도 실은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한 변주인 경우가 많다.

역사적 경험과 신학적 자료를 통해서 좀더 너른 성공회 신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을 해 온 폴 에이비스(Paul Avis)는 Anglicanism and Christian Church 개정 증보판(2002)을 거의 새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교회와 구원”이라는 장을 새로 섰다.

에이비스에 따르면, 근대 성공회 신학자들의 생각에서 어떤 통일된 이념을 잡아내기는 어렵겠지만, 거칠게 나마 교회와 구원이라는 주제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잡아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한다.

  • 근대 성공회 신학자들이 구원과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드러나는 근본적인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는 원칙이다.
  • 이 새로운 삶은 하느님에 의해 제정된 사회, 즉 교회 안에 자리한다.
  • 교회의 삶 속에서 성사적 원칙(the sacramental principle)이 중심이 된다.
  • 교회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은 세상 전체를 위한, 특별히 사회적 문제들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
  • 교회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은 몸의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을 이끌어 낸다.
  • 몸의 부활이라는 교리는 우주(cosmos)의 구원을 향한 희망을 동반한다.
  • 이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은 하느님의 전망에 담겨진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완성을 가리킨다.

상세한 개념풀이가 필요해서 이를 당대의 신학자들과 대화하며 설명하는 것이 그 새로운 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생각을 진척시켜 나가 볼까? 이 특징들은 서구적 근대 신학과 성공회 전통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 안에서 두루 확인되는 것들인데다, 또 현대 신학의 몇몇 흐름에 대해 매우 고전적인 도전을 담고 있으니 깊이 살펴보기에 적절한 것들이다.

위의 특징들은 에큐메니칼 신학 대화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교회와 세상 안에서 성사 혹은 전례의 위치(cf. Karl Rahner)에 대한 확장시킬 수도 있겠다. 이 점은 곧장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교회와 전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선교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통치”(the Reign of God)에 대한 종말론적인 선체험(foretaste)이라 할 전례와도 연결된다.

도전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우선 소위 몇몇 포스트(post)주의의 변종 신학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또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지거나, 그것이 혹은 전통주의나 근대주의로 도매금 처리되면서 “이 세상”을 쉽게 인정해버리는 경향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긍정과 바라 볼 저 세상 사이의 긴장감이 약화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긴장감 상실이 이른바 근대 성공회 신학 자체 안에도 여러모로 깊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전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해서라면, 성공회는 우선 성사론적 이해(cf. Avery Dulles, Models of the Church)에 기운 특성이 강하므로, 여기서 비롯한 “세례적 교회론”(Baptismal Ecclesiology)과 “성찬례적 교회론”(Eucharistic Ecclesiology)은 그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적절하겠다. 이런 근거와 실천에서라야 교회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를 비추고 몸소 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폴 에이비스가 최근 이 점에서 다시금 “선교”1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은 적절하고 마땅한 방향이다(Ministry Shaped by Mission, 2005).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서는 전례와 선교를 이어가는 점들이 뚜렷하지 않아 아쉽다. 아니 그건 전례학자들의 몫이겠다. 이를 위해서라면 근대 전례 운동의 지향점들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특별히 성공회 전통 안에서 실험되었던 이런 성사주의 운동의 경험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그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다시 이런 말들을 정리하자면… 교회와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사목적 신학적 주제는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펼쳐지는 교회의 전례와 선교를 통해서 실천하고 몸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전망은 교회와 신학과 그 실천(전례와 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의 기준점이다.

  1. 여기서 말하는 “선교”는 내내 “하느님의 선교”에서 바라본 것이니, 19세기 제국주의 선교의 역사를 흉내낸 “전도 여행” “단기 선교 여행” 혹은 “교회 성장 전략” 등과는 아무런 혈친적 관계가 없다. 노파심이다. []

캔터베리 대주교 2005 부활절 메시지

Friday, March 25th, 2005

최근 아일랜드에서 열린 세계성공회 관구장 회의의 문서는 널리 읽히며 토론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팎에서 그 문서 가운데 한 문단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관구장 주교들은 유엔(UN)이 정한 새천년 발전 목표들에 대해 투신할 것을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이 가운데는 2015년까지 가난과 기아 문제를 반으로 줄인다는 희망도 담겨져 있습니다. 이 목표들은 또한 HIV/AIDS에 대한 교육과 방지책을 담고 있으며, 거듭 번지고 있는 결핵과 말라리아의 위협을 막아내려는 일에 대한 헌신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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