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 (IV) – T. S. 엘리엇

Tuesday, March 1st, 2011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Ash Wednesday (1930) by T. S. Eliot (1888~1965)

I / II / III / IV / V / VI

IV

보랏빛 제비꽃 사이를 걸었던 이
사이를 걸었던 이
다채로운 푸르름의 여러 결이
희고 파아란 색깔 사이로 들어오고, 마리아의 색깔로,
하찮은 것들에 대해서 말할 뿐
영원한 비탄에 대한 무지와 지식
그들이 걸을 때마다 그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이
그리하여 원천을 강하게 하고 활력을 새롭게 하는 이

마른 돌을 차갑게 하고 모래를 굳게 하는
고깔 꽃 파아란 빛깔, 마리아의 파아란 색깔 안에서,
그대는 기억해야 하리니

사이를 걷는 세월이 여기 있으니,
현과 피리를 버리고,
잠들고 깨는 사이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이를 되살리느니

희고 가볍게 포개진 옷을 입고, 그 여인에게 꼭 맞게, 접힌.
새로운 세월을 걷느니,
눈물의 빛나는 구름을 통하여 되살아나며
오래된 가락의 새로운 가사로 되살아나며. 구원하라
시간을. 구원하라
더 높은 꿈속에서 본, 아직 읽지 않은 환영을
금빛을 두른 영구차를 치장한 유니콘들이 끌던 꿈속에서.

침묵하는 누이는 희고 파란 베일을 쓰고
주목(朱木) 나무 사이에서 동산의 하느님 뒤로,
하느님의 피리가 쉬지 않을 때, 자신의 머리를 숙여 예를 표했으나,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느니

그러나 샘은 솟아올랐고 새는 앉아 노래했으니
그 시간을 구원하라, 그 꿈을 구원하라
들려지지 않은, 말해지지 않은 말씀의 표시를

주목 나무에서 오는 바람이 천의 휘파람을 흔들어 없애버릴 때까지

그리고 우리의 이 유배 다음에.

(번역: 주낙현 신부)

성사: 나눔으로 거룩한 일, 혹은 생명의 상상력

Monday, February 21st, 2011

1. 십몇 년 전 신학교의 교실 풍경 하나

교수 신부님은 뜬금없이 “성사(聖事: sacrament)란 무엇이오?”하고 물으셨다. 무슨 맥락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신학생들은 이런저런 단답형 대답을 내놓았다. 대답들에 혀를 차시던 그분은 옆자리로 연이어 한사람씩 물으셨다. 어느 동료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말 그대로, ‘거룩한(聖) 일(事)’입니다.” 신부님은 한숨을 몰아 쉬셨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 광경에 나 자신도 당황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작정하신 듯 차례로 물어보시던 신부님은 내 차례가 되자 건너뛰어서 다른 학생에게 물으셨다. 아직도 그때 왜 나를 건너뛰셨는지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국 유학 중이던 외국인 부제님이 대답했다. “성사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교수 신부님이 바라던 모범 답안이었다. 너무나 쉬운 개념 정의를 모르던 학생들을 탓해야 했을까? 실제로 이 답을 모두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대답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 맥락을 설명하지 않았던 문제는 없었을까? 여러 생각을 모아서 개념과 정의로 이끌어줘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마저 그때 스스로 겪었던 당황을 변명하는 것일까?

2. 성사는 나눔으로써 ‘거룩한 일’

오늘 주일 성서 정과의 말씀에는 기쁘도록 복된 말씀이 넘친다.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레위 19:1-2,9-18). 놀랍게도, 하느님처럼 되라는 말씀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었던 뱀의 속임수가 아니었던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오늘 레위기 본문과 창세기 해당 본문의 큰 차이는 ‘독점’과 ‘공유’에 있다고 보인다. 에덴동산 타락 사건은 하느님의 ‘위치와 능력’을 탐내어, 손대지 말아야 할 공유의 영역을 사유화한 문제이다. 반면, 레위기에 나온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 저임금 노동자들, 장애인들에 대한 보호와 배려, 그리고 힘있는 이들을 향한 공정한 재판이라는 실천 목록과 잇닿아 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좀 더 확장하신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38-48). 이 말씀 역시 보복이 아닌 용서, 보호가 필요한 이들과 동행, 형편이 궁한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과 잇닿아 있다. 사람이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이 예수께서 펼치신 구원 사건의 목표였다.

성찬례는 이 구원 사건에 대한 기억 행위이다. 그리스도는 마침내 당신 몸까지 내어주신다. 이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눠 먹는다. 4세기의 성찬례 집전 사제는 영성체에 신자들을 이렇게 초대했다. “거룩한 사람을 위한 거룩한 것입니다.”

3. ‘어머니인 교회’ – 생명을 위한 상상력

중세의 마리아 숭배가 한 극단이었다면, 종교개혁의 마리아 배척은 또 다른 극단이었다. 교부들의 신앙 속에서 마리아는 ‘동정녀’와 ‘어머니’로 표상된다. 이 표상은 교리적인 ‘동정녀’나 ‘어머니’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 ‘동정녀’이며, 그 생명을 낳아 기르는 실체로서 ‘어머니’이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tokos)라 과감히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우리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만인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가능태로서 동정녀이며, 그 생명을 보살피고 키우는 실체로서 ‘어머니’이다. 이것은 거룩한 변화의 과정이며, ‘거룩한 일’이다.

성 어거스틴의 강론 한 대목을 듣는다.

거룩하신 마리아, 복되신 마리아. 그러나 교회는 그분보다 더 큽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교회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지체입니다. 다만, 고귀하고 탁월한 – 그야말로 가장 탁월한 – 지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은 전체 몸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 몸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한 지체인 그분보다 큽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니, 그 머리와 몸이 함께 전체 그리스도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머리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머리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역시, 제가 말하고 있는 그대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누가 그대들을 낳았습니까? 그대들의 마음 속에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인 교회’입니다. 그대들의 어머니는 거룩하고 고귀합니다. 마리아처럼, 교회는 어머니요, 동정녀입니다. 교회가 어머니인 증거는 바로 그대들입니다. 그대들을 낳음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를 낳았습니다.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동정녀 마리아가 그 몸에서 낳은 이를 그들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뒷걸음치지 마십시오. 그 사건은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대들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 아닙니다. 그대들은 이미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가 됩니다… 이 세례의 목욕탕에 있는 그대로 다가오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제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St. Augustine, Sermon 25

4. 거룩한 실천

여기에 에덴동산의 타락 사건을 넘어선 구원 사건이 있다. 독점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우리는 거룩해지고 완전해진다. 성찬례는 그 거룩한 변화(성변화, transubstantiation)의 본질을 말해준다(이 용어를 교리적 논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동정녀와 어머니로 부름받은 교회,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 여기에 성사인 교회가 있고, 교회의 선교가 있다. 그 실천 속에서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대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 세상의 질서를 ‘거룩한 것’으로 만들라는 부르심이 있다. 이 실천이 ‘거룩한 일’이다.

쇼리 주교, 영국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설교

Wednesday, June 16th, 2010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가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Southwark)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주일 미사에서 전한 설교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쇼리 주교의 방문과 설교, 성찬례 집전을 둘러싼 여러 논의와 논쟁들이 있다고 하나, 기회가 닿으면 그 논란의 지경을 살피겠고, 우선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설교문 및 설교 녹음(영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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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후 2주일
2사무 11:26-12:10 / 갈라 2:15-끝 / 루가 7:36-8:3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The Most Revd Katharine Jefferts Schori
Presiding Bishop of The Episcopal Church

저는 악명 높은 곳에서 왔습니다. 도박과 성매매가 합법적인 네바다에서 교구장 주교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알코올중독 치료 모임에 적용하는 12단계 치유 프로그램을 알코올중독자나 약물중독자들뿐만 아니라, 도박 중독자에게도 적용해서 진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섹스 중독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열기도 합니다. 제가 거기 있을 때, 꽤 널리 돌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 신부님이 이른바 마담이라는 포주와 그 고용인들에게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찾아오라고 권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따뜻한 환대를 통해 밤일하는 여성들이 자주 들러 쉬도록 했습니다. 물론 어떤 교회들은 예수님의 저녁 식사 참석자처럼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가 들인거야?’ 그래서 그 여성들은 그 저녁 식탁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영국 성공회에서는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성공회 어느 부류는 장소에 맞는 옷차림을 꼭 갖춰야 한다는 것으로 꽤 유명합니다. 물론 행동거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지요. 이런 식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온 마음을 다해서 응답하고, 예배에 쓰이는 여러 책을 적절하게 잘 알아서 찾아야 해. 앞문은 절대 지나다니지 않도록 해야 하고.’ 많지는 않더라도, 교회에 늘 앉는 자기 자리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앉는 걸 싫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초대받지 않았더라도 팔을 펴서 누구나 환영하는 교회 공동체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압니다.

제게는 연세 지긋한 친구 한 분이 있는데요, 수십 년 동안 대학 채플린으로 일하시던 매우 기발한 신부님이십니다. 한번은 이 분이 미국 횡단 여행을 하며 여러 교회를 방문한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캠핑해야 해서 매일 씻지는 못했죠. 그런데 성직 셔츠를 입고 교회에 가면 다른 대접을 받더라는 거에요.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로드 아일랜드 교구의 주교님은 임기 중 마지막 안식년의 일부를 노숙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면서 보냈습니다. 여성 주교인 이 분은 자기 교구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에서 잠을 자고, 주일에는 그 위층에 있는 교회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주교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노숙인인 자신을 환영해 잘 대접해 주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줄 바로 옆에 앉은 냄새 나는 노숙인 안에서 사랑의 주님을 볼 수 있거나, 기꺼이 보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불청객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타자’를 두려워하도록 할까요? 우리의 오랜 유전자 기억에는 낯선 이를 만나면 곧장 각성 상태로 이끄는 어떤 장치가 존재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생존 장치입니다. 낯선 이를 경계함으로써 우리 인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또 다른 것도 있습니다. 좀 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 사람의 죄를 두고 냉큼 심판하려는 비약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죄성, 그리고 경쟁하려는 경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이쿠, 고맙게도 저 여자는 나보다 훨씬 더 죄 많은 여자야. 감사합니다. 하느님.’

시몬의 집을 배회하던 그 여인은 머리를 가리지 않고 들어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거리에서 몸 파는 여자 아니야?”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 여인은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일을 벌이고 맙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고, 그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습니다. “저런 저런, 저 여자 이제 향유를 발라주고 있네. 어떻게 이런 일을 가만 보고 있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거야? 이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떤 작자들인 줄 알겠네, 알겠어 할 것 아냐? 참 내.”

저들이 과도하게 혹은 부적절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덮어씌우는 경멸은 아직도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예수를 향한 이 여인의 사랑스러운 응답이 바로 그 여인의 용서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하느님과 맺은 올바른 관계를 축하했습니다. 그 여인은 그걸 청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에 대한 용서의 증거가 이미 드러났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꾹꾹 눌러 담고도 넘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머리카락과 나르드 향처럼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 4;18). 예수님은 이 말씀을 끊임없이 반복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우리의 자매와 형제에게서 우리 자신을 몰아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우리 주변 사람들 속에서 그 두려움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식사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다른 식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거리의 여인이 자신의 명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용서받은 여인은 탕자의 누이입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오누이들입니다. 스스로 의로운 척하는 껍데기를 버리고자 할 때, 우리는 이들 가족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그 껍데기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덮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그처럼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껍데기가 바로 우리와 마음 깊이 ‘고향으로 환대’하는 사건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껍데기를 벗겨나가도록 하는 일은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릅쓸 모든 위험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로 성인께서 갈라디아 서신에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바울로 성인은 자신이 율법에서 지시하는 세부 사항을 지키는 것이 마치 베니어합판의 여러 층을 쌓아 붙이는 것과 같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 쌓여가는 층들이 합판을 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층들은 인간 안에서 벗겨져 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투명함과 맞바꾸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 층들은 우리를 하느님과 누리는 바른 관계로 이끌지 못합니다. 사랑이 그리로 이끕니다. 바울로 성인은 말씀합니다. “만일 내가 전에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스스로 법을 어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껍데기로 층층이 덮여 있는 자아는 상처받을 만큼 충분히 연약하지 않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기 있는 사람 안에서 사랑을 향한 인간의 속 깊은 열망을 발견할 수 있나요?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열망을 되새기고, 그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나요? 그것은 자비심입니다. 바로, 사랑에 우리를 여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가 아닌, 자비행이야말로 껍데기를 벗기는 한 시작입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모든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몰인정한 주인과 그 손님들에 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식사 잔치는 훨씬 더 흥미롭게 진행될 테니까요. 이들을 저버린다면 자비심의 실제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요, 그 여인의 눈물이 흘러 넘친 것처럼, 그들도 흘러 넘칠 가능성입니다. 껍데기가 벗겨나가도록 놔두는 일은 아주 모험 어린 큰 위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그 껍질 밑에 있는 한 형제요, 자매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이 동적인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이 저녁 잔치를 시몬에 남겨 두시고, 다른 곳을 방문하러 떠나십니다. 방탕한 이를 향한 사랑과 방탕한 이를 향한 용서가 필요한 곳으로. 그분의 길동무들은, 말 그대로 그분의 식탁 동료는, 그 열두 명과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이었습니다. 흠… 굳세고 건강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셋은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입니다.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그들은 그 공동체를 돕고 먹였습니다. 그들은 잔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깊이 받아들여지고 깊은 사랑을 알게 되어 치유와 용서를 얻은 이들은 다른 죄인들을 찍어 내려는 자기 방어적인 껍데기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눈물을 감추거나 값비싼 향유를 숨겨두는 일이 사랑을 펼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지라도 말입니다. 결국, 그 깨달음은 그들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마련된 자리로 이끌었으며, 이로써 그들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염려마저 치유했습니다. 이 식탁에 우리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환대의 눈물과 떠돌이의 입맞춤, 그리고 고향의 맛 난 냄새가 있습니다.

이 잔치에 함께 하시렵니까?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로이 나가십시오. 평화에 기대어 낯선 세 사람에게 같은 말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를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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