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Monday, April 18th, 2011

어느 신부님의 부탁으로 성주간 전례에 관한 글을 써서 한국에 보냈다. 그동안 블로그에 적었던 여러 생각을 부활 성삼일 전례 전체에 맞춰 다시 엮어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바쁜 마음 때문에 격하고 날이 선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성삼일 사건이 그만큼 격하고 전복적인 사건이라며 볼품없는 글품을 변명하려 했다.

못난 자식 보내는 심정으로 글을 보내고, 다시 돌아앉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성주간 생각’을 듣는다. 그러고 보니 써서 보낸 내 글의 처지가 더욱 가련하다. 내 글은 그 못난대로 읽힐 처지를 찾으면 되겠고, 나도 캔터베리 대주교님 ‘급’이 당연히 아니다. 😉 늘 영어가 벽인 이들도 함께 나눠야 할 깊은 생각이기에 우리말 번역에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쏟았다.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모든 점에서 성주간은 정말이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바로 이 주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아주 극적으로 펼쳐지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성주간 전례와 예식은 우리를 하나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성지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되면서 이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지와 십자가 매듭의 성지를 축복하고, 그것을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 첫 성지주일의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 예수님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이 그리 환영할 만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우리 세상과 삶에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주간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인지를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그 첫 성주간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원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갑시다. 이 주간 내내 복음서에서 읽게 될 수난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십 년 전부터 여러 교회에서는 성 목요일 아침에 특별한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의 사제들과 부제들이 주교와 함께 모여서 서품 서약을 갱신하고, 복음의 사목자로 약속한 바를 갱신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교는 성유를 축복하여 여러 교회에서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서품에 사용하도록 합니다. 성주간에 이 예식은 사목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여느 신자들처럼 성직자들도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사제, 부제, 주교, 혹은 그 누구에게나, 예수의 제자로서 사목자인 것이 자기 본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자신들의 약속을 갱신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됨을 새로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밤 전례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것처럼, 성주간 중간에 이런 서약 갱신의 기회를 얻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유 축복도 복음의 사목자에게 무언가를 되새겨 줍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 기름과 물과 같은 일상의 물질이 교회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고 상징하는, 강력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매체로 쓰입니다. 또한, 성서에서 기름은 도유와 치유로 연결되는데, 이는 복음의 사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되새겨 줍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또 기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관계, 인간 사이의 소외, 그리고 병고로 공동체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교 사목 자체의 중심이 되는 실체를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갖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위대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펼쳐야 할 봉사직을 말 그대로, 그리고 완벽히 몸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시고 종처럼 그들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밤 전례에서 성직자들은 모두 신자들의 발을 씻어 줍니다. 이는 예수 복음의 힘과 권위, 그 중요성이 늘 섬김을 통해서 드러남을 되새겨 줍니다. 섬김을 보여주지 못하는 권력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로 힘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저녁,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의 식탁에 둘러앉아 예수님의 몸과 피를 거룩한 친교의 성사 속에서 나누는 일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겸손과 그분의 섬김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밤의 어둠 속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게쎄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을 지켜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 첫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고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보다는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다는 사실을.

성찬례가 끝나면, 제대포를 벗기고, 장식을 치웁니다. 교회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남습니다. 이렇게 벗겨진 채로 성 금요일을 지나 부활밤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낼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궁핍, 우리의 가난을. 그러므로 꽃이나 그 어떤 장식이 필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벽, 벗겨져 드러난 제대와 우리 자신을 성 금요일의 놀라운 현실 실체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 금요일에 많은 교회와 여러 전통에서는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교인 전체가 예루살렘의 군중이 되어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님의 죽음을 바랐던 이들과 일체가 되는 궁극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죄와 실패가 정말로 완전히 발가벗겨져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 금요일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면모를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했던 이들이 지녔던 똑같은 동기를 우리 안에서 직면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열광에 사로잡힌 여정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다가도 예수님이 위험하고 어려운 분인 것을 깨닫자, 금세 그분을 저버리게 한 열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 금요일은 우리가 인정하기 꺼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면모를 발견하는 날만은 아닙니다. 옛날 성가가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명의 나무 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펼치시는 그리스도의 팔을 봅니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근원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하시려는 그 희생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의 어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를 포용하시고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성 토요일과 부활일 아침의 사건 속에서 완벽하게 참된 이로 만들어 주심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성 토요일의 어둠 속에서 모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을 내시고, 사막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그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며 환호하고, 예언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일과 말씀이 결국에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지를 듣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위대한 신비로 초대받습니다. 빛으로 가득 찬 순간을 맞이하며, 촛불을 모두 켜고 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빛을 축하합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걸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어둠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우리 자신을 보는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패와 죄가 드러난 어둠에서 희망과 용서의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부활의 첫 성찬례는 중단했던 모든 것을 집어들고, 오르간을 울리고, 종을 치면서 한 주간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집에 당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서서 성령을 통하여 세상에 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부활일에 우리는 그저 거기에 서서 그 사랑을 흠뻑 받을 뿐입니다. 여정이 끝나고 우리는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 집은 언제나 자비로이 받아들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집인 것을 압니다. 그 사랑이 궁극적인 희생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2880
번역: 주낙현 신부

희망해 본 질문과 도전 – 미국 성공회를 향해서

Monday, April 4th, 2011

세계 성공회 안에서 이어지는 여러 논란에 대한 내 생각은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말했다. 그 전개가 예상을 빗나가지 않으니 이전에 적은 관전평과 판단도 그대로다. 그러니 더 적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사자들과 만나서 이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성공회의 시각과 방향을 물을 때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저 외교적 언사로 누구 편이 되어주는 것보다는, 비판적인 질문과 도전을 던지는 일이 더 중요하겠다. 짧게 주어진 시간이라면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문제의식과 그 방향을 잡고 질문하고 도전했으면 한다. 그것이 서로 도우며 자라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원칙도 정리할 수 있고, 자기비판의 근거와 방법으로도 삼을 수 있겠다. 미국 성공회를 향해서, 특히 주교원에서 발언한다면 이런 내용을 희망해 본다. (발뺌: 다른 이의 위치와 입을 가상하여 급하게 ‘초안’한 생각일 뿐이다.)

여러분도 아시고, 계속해서 기도하시는 바와 같이, 일본과 일본 성공회가 겪고 있는 희생과 고통을 깊이 느끼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일본에 있는 사람들과 일본 성공회를 위해서 계속 기도해 주시고 지원해 주십시오. 이 거대한 고통과 슬픔의 사건 속에서 피조물은 우리 인간 모두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하느님의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일본과 한국은 고통스러운 역사적 경험을 나누고 있으며 일본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여기저기에 깊게 남아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 성공회와 일본 성공회는 서로 협력하여 이 역사적 고통을 치유하고 화해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는 초창기에 양국의 많은 사람은 우리의 이런 화해 노력을 의심했습니다. 아직 미움과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양 교회는 계속해서 양 국민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일했고, 이제는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함께 애쓰고 있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이런 우리 노력을 알아차리고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미국 성공회, 특히 미국 성공회 정의평화위원회의 노력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국 성공회가 이러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바로 약자들과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이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른 것입니다. 한국 성공회는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소수자로 살아갑니다. 보수적이고 거대한 여러 다른 교단들이 지배하는 처지에서 생존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작음이 우리에게는 은총이 되었습니다. 작은 이로서 우리는 작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이들 속에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을 통해서 미국 성공회와 세계 성공회의 일치 문제를 고민해왔습니다. 한국 성공회 주교원은 이미 ‘성공회 계약”(the Anglican Covenant) 문서에 대해서 주교원의 생각을 세계 성공회 사무소에 전달했습니다. 한국의 주교들은 어떤 ‘문서’로 우리의 신앙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또 이 계약 문서가 “고전적인 성공회 전통”(classical Anglican tradition)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계약 문서가 누군가를 배척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배척당하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동성애자와 같이 사회에서 배척당한 이들을 포용하는 여러 교회의 선교와 사목은 그리스도의 선교와 사목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미국 성공회는 그 대가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포용과 환대의 사목과 선교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약한 자들과 함께 하는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여러분과 깊은 연대의식을 나눕니다.

아시아와 세계 성공회의 작은 교회로서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과 도전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그 원칙은 힘없는 이들에 대한 경청입니다.

첫째, 세계 성공회 안에서 미국 성공회는 세계의 힘없는 이들과 함께 했습니까? 특별히 미국이라는 제국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불의를 저지를 때, 미국 성공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비록 오해이긴 하지만, 세계의 많은 사람은 미국과 미국 성공회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여러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LGBT에 대한 미국 성공회의 실천은 예언자적입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예언자는 없었습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은 여러분의 노력을 부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이야기로 취급합니다. 이 오해를 극복하려면 여러분은 미국이라는 제국에 도전해야 합니다. 또 이 논란을 통해서 여러분과 미국 성공회가 세계 성공회에 있는 힘 없는 이들에게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계 성공회의 다른 이들을 더 방문하고 더 초대하며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이 설정한 예언자적 행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둘째,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윈저 위원회가 요구한 핵심적인 내용은 “잠정중지”조치가 아닙니다. 가장 핵심은 경청 과정(listening process)입니다. 그런데 이때 누구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세계의 주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몇몇 유명한 신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아닙니다. 힘없는 이들입니다. 목소리가 없는 이들입니다. 미국에 앉아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의 주교들을 통해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그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는 첩첩이 숨겨져 있습니다. 복잡한 연유로 싸인 겹을 어떻게 펼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겠습니까? 우리는 더 깊이 투신해야 합니다. 더 많이 관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미국의 소수자 문제에 집중하는 만큼 세상의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 성공회와 더불어 여러 다른 나라 성공회는 세계 성공회가 필요합니다. 세계 성공회는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측은지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연대의 네트워크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세계의 힘없는 이들, 그리고 힘없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대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성공회는 “성공회 계약”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아직 모릅니다. 작은 교회로서 갖는 두려움과 염려가 우리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과 상관없이 한국 성공회는 계속해서 우리의 선교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작은 이들과 배척받은 이들과 함께 하는 선교와 사목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걷는 모든 이들과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어떤 조건에서라도 우리의 연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의 그늘 – “재의 수요일” 번역 후기

Tuesday, March 1st, 2011

다시는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희망하지 않기에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이 사람의 재주와 저 사람의 기회를 탐내는 일
더이상 이런 것들을 얻으려 애쓰지 않기에
(늙은 독수리가 왜 날개를 펴야 한단 말인가?)
여느 통치의 권력이 희미해진다고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재의 수요일” I, 부분)

사순절이 다가올 때마다, T.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을 조금씩 번역하여 올려두었다. 이번에 번역을 마쳤다. 번역의 부족함이 분명하지만, 이 일을 하는 동안 그 말에 담긴 생각을 더 느리게 살피며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그 동행의 전후 사정과 그 느낌을 모두 적어 밝힐 수는 없다. 그의 시와 시어가 드러내는 대로 삶의 희망과 절망은 너무 얽혀 있다. 지난 몇 년간 내 여러 처지를 되새기고 삶을 관조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만 할 뿐.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Ash Wednesday (1930) by T. S. Eliot (1888~1965)
I / II / III / IV / V / VI

201103011454.jpg 201103011455.jpg

(‘재의 수요일’ 표지 및 속지 – 스콧 피츠제럴드에 쓴 시인 친필)

그의 시와 함께 다시 깨닫는 사순절의 의미들: 자기 안에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 언제나 구원은 밖에서 ‘틈’과 ‘사이’로 선물로 오는 것이니, ‘도통’하려 들지 말 것, 하느님 앞에서 내 작음을 알되 큰 구원이 감싸는 은총을 거부하지 말 것. 값싼 희망과 절망에 휘둘리지 말 것.

엘리엇은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귀화하고, 종교마저도 성공회로 이적하여, 자신을 당시 성공회 내 강력한 전통으로 거듭나던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이라 불렀다. 그의 “재의 수요일”은 그런 신앙의 여정과 전통의 성격을 매우 잘 드러내는 탁월한 시로 읽힌다. 언젠가 자신을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왕당파, 종교에서는 성공회-가톨릭”이라고 한 것처럼, 가장 고전적인 의미의 보수주의자로서 자신의 덕을 이 시와 다른 글들에서 드러낸다. 인간의 부질없는 작음, 개인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이마저 회의와 물음의 대상으로 삼아 덧없는 낙관의 위험을 경계했다. 한편, 끊임없이 ‘초월’이라는 ‘밖’의 은총에 기댔지만, 이 초월은 이미 우리 삶에 여느 구석에서든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엘리엇의 몇몇 시와 글에서 발견하는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보수의 얼굴이다.

그는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이 시를 출간했다. 비슷한 나이에, 궤를 같이하는 신앙적 전통 안에서, 닮은 정치 신학적 견해를 겹쳐 보며, 스스로 흠칫 놀란다. 나는 전통에 기댄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물론 나는 그의 여러 ‘보수주의적’ 비관에 모두 동의하지 않고, 그의 ‘보수주의적’ 낙관주의에 다른 비관주의로 대답하겠지만.) 그동안 여러모로 나를 주저하게 하는 내 태생의 ‘보수성’과 씨름했다. 이를 받아들일 무렵, 이미 내게는 그와 정반대되는 딱지들이 셀 수 없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항변은 부질없는 일이다. 오염 없는 언어가 불가능한 마당에, 이 현실을 인정하고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약속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 말고는 소통은 불가능할 테다. 누구를 비판하거나 나무랄 힘도 이젠 없다. 다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만드는 그늘 속에서 벗을 만나 틈과 틈 사이로 대화하며 기도할 뿐. 구원은 깨진 틈 사이로 드는 빛이니.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
희망하지 않더라도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

얻음과 잃음 사이에서 흔들리느니
꿈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를 꿈처럼 교차하는 황혼은
(신부님, 저를 축복하소서) 내 비록 이를 바라노라 바라지 않더라도
바위 해안을 향해 난 넓은 창으로부터
하얀 돛배들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비상하느니, 바다를 향한 비상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

(“재의 수요일” VI,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