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옳았는가? – 테리 이글턴

Tuesday, April 12th, 2011

역자 주: 이미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얻은 테리 이글턴이 최근에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를 펴냈다. 그 책 전체를 살피기 전에, 미국 천주교의 진보적인 잡지 Commonweal 에 실린 이글턴의 <마르크스는 옳았는가? – 아직 늦지 않은 질문>을 접했다. 출간된 책과 비교하니 1장의 부분을 순서를 조금 재편집하여 실은 것이다. 이 글을 거의 같은 때에 접한 @lightfaraway 님과 함께 번역하기로 했다. 알아보니 한국에서는 그 책 전체가 번역될 것이 확실하단다. 오히려 안심이다. @lightfarway 님이나 내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므로 번역의 허점이 많을 테니 말이다. 다만, 전문가의 전체 번역이 나오기까지 맛뵈기가 되었으면 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린다. @lightfarway 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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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옳았는가? 아직 늦지 않은 질문

테리 이글턴

35년 전만 해도 미국과 유럽의 많은 사람은 마르크시즘에 기꺼이 귀 기울이려 했다. 겨우 10년이 지나자 마르크시즘은 신봉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거의 모두가 동의했다.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변했을까? 어떤 새로운 발견으로 마르크시즘 이론의 오류가 입증된 것일까? 마르크시즘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더는 관심이 없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 문제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일까?

사실 문제의 그 시기에 무언가 일어나긴 했다. 1970년대 중반 이래로 서구의 체제는 몇몇 중대한 변화들을 겪었다. 전통적인 제조 산업에서 상업주의, 커뮤니케이션, 정보 기술, 서비스 산업과 같은 “탈-산업적” 문화로 바뀐 것이다. 소규모, 탈중심적, 다목적, 비위계적 기업들이 유행했다. 시장의 규제는 철폐되었으며, 노동계급 운동은 야만적인 법적-정치적 공격에 내몰렸다. 지역적, 젠더, 인종적 정체성은 더욱 꾸준히 성장했지만, 전통적인 계급 충성도는 약해졌다.

새로운 정보 기술은 이 체제의 세계화가 증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한 줌의 초국적 주식회사들은 가장 손쉬운 이윤을 추구하면서 전 지구를 가로질러 생산과 투자를 분배했다. 상당수의 제조공장은 “저개발” 세계의 저임금 지역을 외주처로 삼았다. 이로써 일부 편협한 생각을 하는 서구인들은 중공업이 지구 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전 지구적 이동에 뒤이어 대규모 국제적 노동 이주가 따랐다. 그와 더불어 빈곤한 이민자들이 더 나은 경제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인종주의와 파시즘이 부활했다. “주변부” 국가들이 저임금 노동, 사유화된 시설들, 삭감된 복지, 초현실적으로 불평등한 무역 조건에 얽매여 있었다면, 메트로폴리탄 국가의 수염을 기르신 사장님들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고, 사원들의 정신적 웰빙에 조바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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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성공회는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Saturday, January 29th, 2011

번역자의 발뺌

영 가디언 지에 난 테오 홉슨(Theo Hobson)이라는 젊은 신학자의 글을 올린다. 그의 경력에서 보이듯, 조직신학 분야에서 학위를 하고(교회의 권위 문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신학, 특히 그의 성사적 교회론에 대한 비판적 저작을 펴낸 바 있다. 제도적 교회의 문제, 특히 영국 성공회의 국교회 지위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제도 교회를 나와 가족과 함께 거리에서, 혹은 어느 곳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짧은 글 하나는 우리 말로도 소개된 적이 있다. 테리 이글턴의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기괴하게도 <신을 옹호하다>) 서평.

그의 칼럼을 내 식대로 읽는다면, 그의 중요한 지적 하나는 교회 전통 안에서 발전된 제도적 교회의 어둠 뒤로 새롭게 발견하는 제도적 교회의 경험과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례'(ritual)의 전통에 대한 재발견과 연결된다. 이는 내가 언젠가 말한 바 있는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 예를 들어, 위계(hierarchy)는 늘 오용 자체, 혹은 오용의 근원인가? 권력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며, 저항의 대상만 되는가? 이 의문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위계와 어떤 권력과 맞서고 있으며, 어떤 위계/질서와 어떤 권력/힘을 만들어 내려 하는가로 고민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지배하는 권력(power-over)이 아닌, 보호하며 섬기는 권력(power-within)으로 위계와 권력을 재규정할 때라야, 정치 혹은 권력에 대한 만연한 혐오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와중에 ‘의례’는 이러한 새로운 위계와 권력의 삶을 실험하고 훈련하는 새로운 시공간이다. 이는 전례(liturgy)의 목적이기도 하다.

번역은 맥락과 맥락을 연결한다. 번역어는 그 사이에서 불안하게 휘청거린다. 아랫글에서 가장 휘청거리는 번역어는 ‘리버럴'(liberal)과 ‘자유주의'(liberalism)이다. ‘리버럴’과 ‘자유주의’는 그 번역어 이전과 이후에도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좁은 이해로 공격받아 고생해 온 서러운 개념이다. 그 서러움을 여기서 다 풀 수는 없겠고, 번역자의 발뺌을 일러두기로 삼는다.

원문의 “liberal”은 대체로 ‘리버럴’ 혹은 ‘자유로운’으로 번역했다. (즐겨찾는 맞춤법 검사 사이트는 이를 ‘혁신적’ 혹은 ‘진보적’으로 고치라고 조언하지만, 무시했다.) ‘자유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냄새가 나는 표현으로 제한하기에는 그 경계가 넓고 모호하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에 일관되지 않게 “liberalism”을 통상 번역하는 대로, “자유주의”라고 했다. 이 비일관성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지만, 이른바 ‘자유주의’ 개념을 인식하는 우리 안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원래 글에서 말하는 ‘리버럴’과 ‘자유주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용례는 고종석에게서 본다, 고만 적는다. ‘Post’는 ‘이후’ 또는 ‘탈'(脫)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 그 의미의 이중성때문에 ‘포스트’로 남겨 두었다.

“미국 성공회는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테오 홉슨

단골 독자라면 알겠지만, 그동안 나는 이 난(가디언지 Comment is Free: 역자 주)을 비롯하여 이곳저곳에서 좀 더 급진적으로 리버럴한 그리스도교를 논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썼다.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국교 유지를 맹렬히 비난한 것으로 시작하여, 교회 모든 주요 형식들이 자유와 동떨어진 사고방식들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했다. 정말로 리버럴한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고, 아나키적이며, 포스트-교회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중요한 지점에서 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조직을 갖춘 종교가 그렇게 나쁜 방식은 아니겠다고 이제는 생각하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적 형식들은 피할 수도 있거니와, 구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생각을 고쳐 먹은 데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 몇 년 동안 살핀 끝에, 새로우면서도 포스트-제도 교회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는 실체를 찾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둘째, 내 생각에 반대되지 않는 교회의 한 형식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약 10년 전, 9.11 사태 직후에 일어난 논쟁을 통해서 나는 영국 성공회에 대한 내 헌신을 재고하게 되었다. 나는 영국 성공회가 그 국교회의 위치를 박차고 나오면서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고 믿었다. 개혁이 있었나? 전혀 아니었다. 영국 성공회 내부에는 그러한 개혁에 대한 의지가 거의 없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보수적인 목소리들이 점차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 보수적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세속의 자유주의가 암울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들 떠들었다. 나의 환멸은 교육 분야에서 영국 성공회가 하는 역할을 보면서 끝을 봤다. 영국 성공회는 이류 학교 운영에 점차 관여하면서, 실속 없는 교회 참석률 올리기에 급급했다.

다른 교회들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모든 제도 종교들은 구제 불능의 꼴통들 같았다. 비국교 교회들도 오야붕스런 교리주의로 끌려가는 것 같이 보였고, 그리스도교와 자유주의 사이의 친화성을 선포하는 데 실패했다. 그 때문에 나는 새롭고, 좀 더 급진적이며, 리버럴한 그리스도교를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교는 세속의 진보적 생각을 인정하면서, 제도적인 정통주의를 경계한다. 전통적인 교회 대신에, 나는 자유로운 형식과 축제적이며 예술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어떤 느슨한 문화를 제안했다. 새롭고 자유로운 종교 문화 말이다.

그러나 참여할 만한 이런 문화를 찾지 못했다. 나도 경험해 본 대안 예배 운동(alternative worship)의 몇몇 시도들은 영국 성공회가 소심하게 진행하는 것들이었다. 교회를 멀리하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어떤 일을 하는 데는 너무 냉담했다. 정말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은, 제도에 기초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의례의 중요성을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들만이 고대의 어느 팔레스틴 사나이에 대한 예배의 의례에 깊이 참여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참여 없이는 그 무엇도 그리스도교라 부를 수 없다.

조직된 종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조직된 종교만이 그리스도교 의례를 조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이 의례가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그저 모호한 관념의 집합에 불과하다. 나는 의례(ritual)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이 질문을 몇 년 동안 살폈지만, 그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 작년에 나는 미국 뉴욕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 좀 더 강력한 포스트-제도적 그리스도교 문화가 있는지 보고 싶었다. 좀 더 구체적인 “이머징 처치” 운동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있다. 그러나 제대로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궁금했다. 미국 성공회는 국교회가 아닌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세계 성공회 여러 교회와는 달리 동성애 혐오의 원리주의와도 단절했다. 그러면 여기서 자유주의의 어떤 모델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제도 종교의 다양한 병증에 시달리고 있는가? 아마도 후자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 성공회 예배의 맛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거 아냐?”

세계 성공회의 위기를 뒤돌아 보면서, 미국 성공회의 담대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 자신을 발견한다. 진 로빈슨 주교의 성품을 유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칙 하나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도덕적 원리주의에 반대할 필요가 있으며,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로의 프로젝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울로는 보수적인 인사들에게도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위기는 바울로의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논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리버럴한 성공회 신앙을 (모호하게) 믿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것이 대부분 신화였다는 것을 점차 알게됐다. 영국 성공회는 항상 자유주의에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문제에 과감하게 직면하기보다는 점잔빼며 무시했다. 정말 영국 성공회에도 지적이며 리버럴한 목소리가 있지 않나? 그렇다. 그러나 그들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그들은 방 안에 있는 코끼리를 무시하는 실용적 방법을 택했다. 교회를 어슬렁거리는 그 늙은 반(反)리버럴의 저주를 말이다.

이곳의 공기는 더 상쾌하다. 미국 성공회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리버럴한 그리스도교의 전 지구적 선구자로 등장했다. 이 점이 내가 아직 교회를 포기하지 않도록 나를 설득하고 있다.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英 가디언 誌 2011년 1월 28일 치 http://goo.gl/PgnPx

소비주의 시대의 종교와 신비주의

Monday, March 8th, 2010

제도적 종교는 쇠퇴하지만, 영성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노라는 게 서구 종교 흐름에 대한 많은 이들의 관찰이다. 스스로 제도 종교에 속한 사람(religious)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사람(spiritual)이고 싶다는 이가 많아지고 있단다. 일전의 글에서 이를 두고 나는, 서구 사회, 특히 미국 사회의 개인주의와 엮인 영성주의(spiritualism)의 확대라 했었다. 이 점에서는 메가 처치, 그리고 우파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앙적 보수주의가 대체로 교리적 전통에 닻을 내리고 있고, 교회나 사회의 리버럴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가 차이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모두 영성의 상품화, 그리고 그 소비주의 속에서 살아간다는 비판을 받는다. 현재 영적/종교적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을 한 꺼풀만 들춰보면, 원래 영성과 신비주의가 가졌던 깊고 혁명적인 초월이 상실된 채, 오히려 훨씬 세속적이며 치료 요법의 한 형태로 소비되는 현상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섯(Ross Douthat)이 묘사하는 바, 이러한 영성/신비주의 소비자들은 어느 날은 오순절 계통의 치유 예배에 참석하고, 이튿날에는 불교 강좌를 듣는다. 아침마다 요가를 하고, 주말에는 동방 정교회 피정 센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수피 기도법을 배우는가 하면 성체조배도 하고 밀교의 방중술도 배운다. 영적 관심과 훈련의 홍수라 할 만하다. 그는 이를 두고 ‘종교적 영성의 민주화’라고 표현하면서도, 원래의 종교 전통이 뜻하는 수행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길이라고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본래의 변화와 초월의 문제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다우섯은 미국의 한 진보적 천주교 저널에 실린 신학자 루크 티머시 존슨의 글을 언급한다. 존슨은 이른바 유일신 신앙 전통에 있는 3대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신앙적 동력을 외적 동력(exoteric)과 내적 동력(esoteric)으로 구별한다. 존슨은 이들 종교에 나타난 이 긴장 관계의 사례를 들면서, 그 바른 관계가 그 종교의 건강에 필수적이라 역설한다. 특히 외적 동력인 종교의 제도, 위계, 교리 등이 내적인 신앙적 갈망의 영적 운동들(하시딤, 신비주의, 수피)을 억압해 왔던 점들을 지적한다. 그 자신이 소속한 천주교의 제도적 교권주의와, 이슬람교의 원리주의, 그리고 율법주의로 흘렀던 유대교의 사례들 속에서 신비주의와 같은 초월의 영적 차원에 대한 고민을 전개한 것이다. 다우섯은 존슨의 지적을 존중하면서도, 실은 신비주의마저 미국 사회의 소비주의 안에서 그 대안적인 도전과 변화의 힘을 잃고 있다고 염려한다.

이 염려를 세계로 확장해 보면, 소위 몇몇 내로라는 신학자들의 종교 현상 진단에 아쉬움을 갖게 된다. 미국에서든 그 밖의 세계에서든 제 3천 년에 ‘신앙의 귀환’ ‘종교의 귀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필립 젠킨스와 하비 콕스 등은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그리스도교 신앙 운동의 주도권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하는 현상에서 찾는다. 그리고 오순절 운동(물론 해방신학도 언급하지만)의 급격한 팽창을 그 예로 든다. 그러나 그 오순절 운동 자체가 콕스 자신이 비판하는 ‘번영 복음과 번영 신학'(성공의 사다리 복음)을 여러 모양으로 촉진하고 있으며,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 아래 소비주의의 한 형태로 변모하는 방식과 문제 등에 대한 지적은 찾기 어렵다.

이 처지에 이런 의문들은 단견이요, 편견일까? 제도적 교회와 교권주의에 대한 반대로 신앙과 영적 흐름의 종착은 개인주의에 엮인 영성주의라는 새로운 상품은 아닐까? 외부의 폭발적인 신앙의 힘을 보는 그 눈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과 이전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에 대한 무의식의 향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국과 한국의 오순절 운동과 시작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를 목격하는 처지에,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는 운동은 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특히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지배가 강화되는 터에, 신앙적 열광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한편, 그 수와 힘에 기대어 차근차근 주류의 권력을 구축하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이 과정에서 강화되고 내면화되는 신앙이 자본의 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얼마 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뉴욕 월스트리트에 자리한 성공회 트리니티 교회의 포럼에서, 자본의 시장에 포섭된 이런 소비주의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고객과 공급자의 언어 논리가 우리 사회생활 전역을 스멀스멀 좀 먹고 있으며, 이는 우리 인간의 상호 관계가 물적 자원의 교환으로 교묘하게 측정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에 저항하여, “모든 것이 하나의 지배적인 모델이나 가치에 환원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인간의 행동 양식에는 또 다른 길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붙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기서 종교는 여전히 “자신이 지닌 행동 양식과 충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는 인간의 길”이다. “인간성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그 진리의 답을 드러내는 관점에서 행동해야 한다.”

이 외침은 어느 지점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찰인가? 종교는 어떻게 삶의 어떤 끝(end/목적/종말)을 되뇌고, 그 끝(의 가치)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 가치와 삶의 실천들을 실험하고 펼칠 수 있는 사이와 공간은 어디이며,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를 위한 공동체와 그 네트워크로서 교회의 역할과 또 나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