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동 나눔의 집, 대안 공동체

Monday, June 16th, 2008

관계는 돈이나 재원의 전달에 기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희망과 두려움과 삶의 이야기를 교환하는 일에 기반한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의미하는 바는, 함께 먹는 일, 함께 나누는 일, 함께 마시는 일, 서로 이야기하는 일,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 서로를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일이며, 이런 일 속에서 모든 이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내쫓긴 사람들, 얻어 맞고 사는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대안적인 전망(vision)인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in Elizabeth S. Fiorenza, In Memory of Her

어제는 봉천동 나눔의 집에 다녀왔다. 성공회 나눔의 집의 선교 실천과 영성에 마음의 빚을 많이 진 사람으로서, 기회가 되는대로 들러서 경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 며칠 전에 몇몇 나눔의 집 신부님들과 작은 공동체 안의 전례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으나, 전례란 그것이 드려지는 현장에서 함께 참여할 때라야 경험되는 법, 그래서 작년 성북 나눔의 집을 방문한 것처럼 주일 미사에 함께 참여했다.

봉천동 나눔의 집은 이제 섬처럼 남아 있었다. 재개발이 완료된 뒤 들어선 주위 아파트들에 둘러 싸여 ‘아직’ 옛모습으로 남아 있는 몇몇 이웃들과 함께 그 오래된 보금자리를 20년이 지키고 있었다. 7년 전엔가 들르고 나서 다시 찾은 나눔의 집은 그때와는 달리 한없이 작게 보였다. 그러나 이웃 여러 채의 허름한 집들 사이에 혹은 뜰에 정성스럽고 소답스럽게 핀 작은 화단과 꽃들로 여전히 아름다운 생명을 피워내고 있었다. 작은 담장을 뒤덮은 푸른 잎의 넝쿨들은 그 너머 보이는 위압적인 고층 아파트의 페인트와 대비되는 푸르고 풍요로운 생명을 시위하고 있었다.

나눔의 집은 문턱 없는 환대의 공동체요, 나눔의 공동체이다.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모두 품고 와서 함께 미사를 드리고, 새로 태어난 아이를 안고 온 산모를 함께 축복하고, 축하의 떡을 함께 나누며, 콩나물밥에 간장을 비벼 먹고 시원한 콩나물국을 곁들여 배를 채웠다. 편하게 둘러 앉아 작은 공동체 안에서 누릴 전례의 기쁨과 행동들, 그리고 이를 위해 개선할 점들을 서로 나누면서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살짝 얼린 막걸리가 배달되었다. 걸쭉한 막걸리와 그 사발 만큼이나 진하고 편한 이야기들을 행복하게 나눴다. 1부의 미사에 드린 성찬례를 2부인 일상에서 실천으로 이어온 것이다.

기쁘고 반가운 하루를 마련해 준 이들, 그 착하고 맑은 마음들에게 깊은 합장.

대안적 신학 교육

Friday, February 8th, 2008

Ched Myers, “Alternative Theological Education Between The Seminary, The Sanctuary and The Streets”
(via http://www.wordandworld.org/articles.shtml)

신학교와 제단과 거리의 세계는 대체로 다른 궤도를 돌고 있다. 서로 대화하지도 않거니와, 서로에 대해 책임감이 부족하다,

이러한 고립 현상은 모든 측면에서 신학교육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전문적인 신학자나 성서학자들은 실천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들의 연구를 신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를 더 이상 지려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학위 과정을 마쳐야 하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어서 일자리를 찾아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혹은 사회 운동에 참여하리라는 생각은 별로 갖지 않는다. 한편 구제와 정의를 위한 활동에 깊이 참여하는 신앙 공동체에 기반한 활동가 혹은 사회 활동가들은 비판적인 신학적 성찰이나 정치적 성찰을 무시하기로 악명 높다. 너무나 많은 일에 치여서 너무 피곤하다. 게다가 손에 쥐어지는 자료라는 것도 너무나 얄팍하다. 한편 교회의 신자들은 – 그 교단의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 학문적인 통찰이나 사회 활동가들의 도전을 그냥 무시하고 지낸다. 대신 교회에서 제공하는 신앙 프로그램에 푹 빠져 산다. 이러한 고립때문에 이 세 영역(신학교, 교회, 사회 현장) 심각하게 훼손되고 만다. 그래서 교회의 총체적인 선교는 침체된다.

…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를 위한 쇄신의 핵심은 이 서로 고립된 세 영역이 원래 지닌 역량을 재통합시키는 작업이다.

교회를 개인적 사회적 변화의 운동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동안의 대안적 신학 교육의 전통을 네 가지 운동에서 길어 올린다.

1. 흑인 교회의 “자유 학교” 전통, 특별히 시민 인권 운동 시기에 발전된…
2. 1차 세계 대전 시기 반전 운동과 급진적 제자 운동을 통해 나타난 “지하 신학교”와 “예언자들의 학교”의 실험, 이것들이 독일 나찌 치하에서 “고백 교회” 전통을 이끌어냈다.
3. 여성 운동에서 배우는 페미니스트 페다고지와 성적 소수자를 통해서 일어난 포용적 교회 운동
4. 라틴 아메리카 상황에서 배우는 기초 공동체 운동과 해방 신학

우리 상황에서는, 최소한 우리 성공회 상황 안에서는 이 문제 제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 경험 안에서 우리는 어떤 전통을 길어 올려 제시할 것인가? 다산의 시골 학단, 민중 신학, 민중교회와 성공회 나눔의 집, 한국의 여성운동, (성적) 소수자 운동들 – 그러나 여전히 이런 전통들의 실행을 눈여겨 보는 처지에서 이 전통들이 바르게 작동할 역동성, 그리고 끊임없이 왜곡되는 구조는 어떻게 반성해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