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

Wednesday, February 11th, 2015

창세 2:4b~9, 15~17 / 시편 104:10~11,28~31 / 마르 7:14~23
* 병자를 위한 기도일

2015년 2월 1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오늘 2월 11일을 우리는 기도서 전례력에 따라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지킵니다. 연중 ‘녹색’의 절기가 계속되는데, 오늘 전례 색깔은 ‘자색’이라고 친절하게 지시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드리는 성찬례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를 기도하는데, 특별히 왜 오늘을 잡아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정했을까요?

그 연원은 이렇습니다. 정확하게 표기하면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World Day of the Sick)입니다. 이날은 성공회나 다른 단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23년 전,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지정한 축일입니다. 1년 뒤 1993년 2월 11일부터 지키기 시작하여 다른 그리스도교단에도 퍼졌습니다. 성공회는 천주교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이 축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고 기도서와 교회력에 넣은 교단이겠다 싶습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축일을 정하면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온종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을 가졌으면 합니다.” 당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 자신은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12년 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기도일을 2월 11일로 선택한 것은,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1858년 루르드 마을에 열네 살 먹은 소녀 버나뎃 수비루에게 성모가 세 번이나 나타났습니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순례자 중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곧 치유의 순례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수녀가 된 버나뎃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다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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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병자들을 위한 기도 축일의 연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부탁 가운데 있는 말이 눈에 듭니다. 오늘은 “병자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병자들의 고통을 치유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 새롭습니다. 무엇보다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말이 어떤 새로운 울림을 주지 않나요?

우리는 고통을 제거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치유가 아니라, 고통을 봉헌한다니 무슨 말일까요? 다른 여느 종교들이 손쉽게 병자의 치유와 기적을 말하곤 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많은 사람이 어떤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신앙은 치유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그 고통 자체에 관한 깊은 생각, 그 고통 자체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있는 그대로 바치는 일을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을 읽으면서, 우리는 종종 치유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참모습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에서 돋보이는 장면은 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병자들이 세상 사람에게서 손가락질받고 차별받는 현실을 향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쳐부수고, 오히려 병자들과 힘없는 이들의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통로라고 그들의 가치와 고통을 새롭게 선언해 주십니다. 병든 일은 현상이요 현실일 뿐, 어떤 나쁜 것도 아니요, 어떤 죄의 결과도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런 뒤, 예수님은 다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하여 눈과 몸을 돌려 자유와 해방을 선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따뜻하게 손을 얹어 어루만지십니다. 이 자유와 해방, 그리고 손을 얹어 어루만지는 일이 치유의 본질입니다.

둘째, 병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이 기도의 날을 제정한 요한 바오로 2세도, 성모 마리아 발현의 복된 증인이었던 버나뎃도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교황은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났고, 버나뎃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던 이들도 다시 병을 얻거나, 노환을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은 있지만 죽지 않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병이 들든지 건강하든지 모두 죽습니다. 다만 시간차가 있을 뿐입니다.

이 시간 차이를 두고 누구는 축복이 덜하고, 누구는 축복을 더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인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 시간 차는 큰 안타까움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집니다. 적어도, 우리마저 죽으면 우리가 품고 기억하는 안타까움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다릅니다. 그 누구의 고통이든지, 짧은 생명이든지, 긴 생명이든지,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잊혀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기억됩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슬픔, 그리고 병약함과 고통마저도 우리는 봉헌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우리는 평일 성찬례 동안에 마르코 복음서를 읽습니다. 마르코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부지런히 걷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눈치채셨지요? 이때,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표지는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입니다. 치유는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이지, 치유가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 목적은 우리가 모두 병든 사람이라는 깨달음과 받아들임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과연 그런가요?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고 병이 납니다. 나쁜 병균이 몸 안으로 들어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생명력의 바탕이기도 하지만,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생물학계와 의학계의 진리입니다. 이 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피할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한다고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시간 차이일 뿐입니다. 이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에서 나온 것,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많은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게다가 이것이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를 깨뜨리기 문제들이기에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일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다는 표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존중하려 할 때 이런 유혹에서 그나마 조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에 세심하게 접근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목록은 언제든지 유혹에 넘어가 넘어질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넘어집니다. 이 나약함과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가 조금 덜하다고 쉽게 남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해야 하지만 피하기 쉽지 않은 곤혹스러운 우리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연약함이 우리 모든 인간이 고통 당하는 병고인 것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높으나 낮으나, 잘 나거나 못 나거나, 젊거나 원숙하거나 모두 조금씩 병자입니다. 사람과 나누는 관계,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를 깨뜨리며 살아가는 병자입니다. 죄인입니다. 이 병고와 죄를 무엇으로 씻어내어 깨끗하게 하려는 일이 신앙일까요?

아닙니다. 이 병고와 죄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펼쳐집니다. 사람을 인과응보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향하여 측은지심을 느끼는 일이 시작됩니다. 아프고 비틀리고 억압받으며 차별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초대하고 환대하여 어루만지며 기름을 바르고 싸매며 치유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그 가운데 우리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제 마음의 어려움과 몸의 고통을 봉헌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기름을 이마에 바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화해와 용서와 치유를 생각하고 우리를 봉헌합시다. 기름을 바를 때 여러분의 손을 뻗어 서로 어깨에 얹어 삶을 봉헌하는 우리의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십시오.

(기름을 이마에 바르는 예식)
(기름을 바르는 예식 끝난 뒤)

기도합시다.

생명과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 병중에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나이다. 구하오니, 세상의 병든 이들과 우리를 돌아보시어 연약한 육신과 영혼을 강건케 하시고, 주님의 보살핌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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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며 대화하는 신앙 & 토마스 아퀴나스

Wednesday, January 28th, 2015

히브 10:11~18 / 시편 110:1~4 / 마르 4:1~20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

2015년 1월 2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 여러 가지 일에 관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해석이 있고 입장을 갖기도 합니다. 자기 인생에 닥친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어떤 해답을 이미 있거나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왜 사람에게 고통이 생기는가? 왜 착한 사람들에게 시련이 생기는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왜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는가?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 의문과 질문은 오늘도 여전히 이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또는 더 큰 보상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신다는 궁색한 대답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답은 답이라기보다는 당장 겪는 시련과 고통에 어떤 위안을 주고 진정 효과를 내려는 진통제와 같은 위로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진통제가 치료 약은 아니라면서 처방조차 주지 않고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고통과 문제의 원인과 답을 계속 찾고 그 치료책은 찾아야겠지만, 그동안 우리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고, 나 자신을 살필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여러 종교가 지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종교의 유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의 상황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절망이든 희망이든, 여전히 중요한 일은 답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고 쉬지 않고 대화하고 기도하며 연구하면서 우리 삶을 멈추지 않는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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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

오늘 복음 말씀은 매일 아침 성찬례에 참여하시는 열심을 지닌 신자들에게는 꽤 익숙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오늘 복음서 본문 전체의 구성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문제의 해답을 찾는 태도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와 그 비유에 관한 풀이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을 모아 놓고 전하신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열심히 뿌렸는데, 어떤 것들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먹고, 어떤 것들은 돌밭에 떨어져 싹이 나왔다가 곧바로 말라 죽었고,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비유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농사를 짓자고 씨를 뿌렸는데, 좋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잃어버리는 씨도 많고 실패도 거듭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목과 선교 활동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잃는 것도 많겠지만, 작으나마 좋은 땅에서 자라나 잃어버린 다른 씨앗을 보상하고도 남을 수확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입니다. 그 넘쳐나는 수확으로 더 많은 사람을 먹이며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각오가 이제 우리에게 넘어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포기하기 하지 않겠다는 희망이 간절합니다. 절망이 모든 것을 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연합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께 희망을 걸겠다는 신앙이 깊습니다. 그 절망 끝에 나오는 희망의 수확으로 자기만 먹고살지 않고, 풍족하게 나누며 살겠다는 꿈이 다부집니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 부분은 매우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많은 분은 어쩌면 원래 비유 이야기인 첫째 부분보다, 하나의 해석인 둘째 부분에 더 익숙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친히 풀어주신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 이야기 풀이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서를 쓴 마르코와 그 동료들, 그리고 초대 교회 신앙인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겪었던 전도와 선교활동의 어려움을 되새기면서 풀이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가 떨어진 땅의 여러 조건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뜻을 붙여 풀어내는 우화적 해석(알레고리)의 본보기입니다. 여기서 씨는 복음이고, 여러 가지 조건의 땅은 사람들의 신앙 태도라고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가도 금세 빼앗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신자가 되었지만 박해나 고생이 생길라치면 곧바로 포기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되 현실의 여러 걱정거리와 재물 욕심과 유혹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듬고 굳세게 하여 수십 배의 결실을 얻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 신앙의 태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교훈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의 원뜻을 늘 되새겼습니다. 예수님처럼 온갖 고생과 절망의 상황이 와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 꿈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계속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희망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수확으로 많은 사람을 풍족히 먹이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꿈을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반성으로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의 뜻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새기면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지, 흔들리면 왜 흔들리는지, 어떻게 해야 어려움과 고난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처지에서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보며 자신의 태도를 새롭게 다지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이렇게 성서의 말씀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일을 통해서 신앙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고 되돌아보게 하며, 희망을 붙잡고 나아갈 새로운 힘을 줍니다.

오늘 축일로 기억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바로 그런 본보기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특히 서방 교회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언어와 논리로 가장 끈질기게 묻고 대답하려 한 사람이었습니다.

1225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토마스 성인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널리 퍼져나가던 설교 수도회 도미니코회에 참여했습니다. 이 수도회는 머리를 흉하게 깎고 절제와 겸손과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흩어진 마음을 절제로 바로잡아 기운을 비축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했습니다.

귀족이었던 가족은 토마스 수사를 잡아다가 집에 가둬놓고 수도회 생활 포기를 종용했습니다. 그는 전혀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감옥을 탈출하여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쾰른과 프랑스 파리의 대학교를 넘나드는 굴지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성찰하는 지식과 연구가 없는 교회는 그 기초가 서서히 무너져갑니다. 여기에 부패와 타락이 스며듭니다. 토마스는 무서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위 성직자나 신학자와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토마스를 시기하며 처세술도 모르고 “무식한 황소”처럼 덤비는 ‘젊은 급진파’라고 핀잔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여러 번 교회 당국의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토는 토마스의 성실함과 총명함이 교회를 구할 것이라며 변당호하고 보호하며 응원했습니다. 이러한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토마스는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하고 글을 썼습니다.

신앙의 은총은 자연 세계와 인간 이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었습니다. 자연과 이성의 완성이었습니다.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도울 때라야 오히려 둘이 제대로 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시대의 질문을 궁리하고 시대 학문과 대화하며,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환히 밝히려고 애썼습니다. 이 노력의 결실이 바로 <신학대전> Summa Theologica 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축일은 성인 태어난 날도 아니요, 세상을 떠난 날도 아닙니다. 바로 <신학대전>이 처음 출간된 날입니다.

서방 교회 신학 전체를 주름잡던 그는 실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었고 붓을 놓고 글을 멈추었습니다. 그의 제자가 옆에서 묻습니다. “선생님, 왜 글을 쓰지 않고 멈추십니까?” “이제는 글을 쓸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이 다 지푸라기와 같구나.”

성인 토마스는 자신의 온갖 노력을 다해 교회를 지키려 했고, 자신이 이뤄낸 일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어떤 글도 쓰지 않았고, 3개월 후에 교회 공의회에 참여하는 여행길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는 토마스가 경험한 신비 체험을 적었습니다. 절필 선언 후 자신이 쓴 것을 모두 “지푸라기” 같다고 말하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토마스, 너는 나에 관해서 정말 잘 썼다. 너에게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토마스는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여전히 실패를 맛보겠지요. 신앙이 흔들릴 일도 많고, 유혹과 시련이 많겠지요. 그때마다 새롭게 오늘의 비유 이야기를 되새겨야 합니다. 온갖 시련에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꿈은 끝내 결실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계속하여 반성하고 자신과 교회와 사회를 쇄신해 나가는 한 우리의 신앙과 행동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영급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과감하게 자신 전체를 던지며 살아가다가, 삶 한가운데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우리의 수고를 잠시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우리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정말 나의 말을 잘 따랐다. 너의 삶으로 나에 관해서 참 잘 썼다.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아무래도 우리는 토마스 성인을 따라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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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o Crivelli, 토마스 아퀴나스, 15세기)

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Sunday, January 25th, 2015

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마르 1:14~20)1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부르심’입니다. 인간 밖이든 인간의 내면이든 인간이 나서서 ‘신’을 찾는 것이 여러 종교의 특징이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하느님께서 나서서 인간을 찾습니다. 이를 ‘부르심’ 또는 ‘소명’이라 합니다. 이 부르심의 특징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방향이 다릅니다. 성서의 많은 내용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면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신 뜻과 목적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복음과 하느님 나라입니다.

여느 다른 종교와 그 방향의 달라서 성서의 이야기와 등장인물도 사뭇 낯섭니다. 낯설어서 새롭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불러 낯선 땅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하고 도망치다 큰 물고기에 삼켜 그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겨우 밖으로 나옵니다. 그제야 요나가 가고 싶지 않던 곳에 가서 회개를 외치니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마음과 행실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낯설고 확신할 수 없는 곳에 자기 몸을 던졌을 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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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에도 낯선 방향 전환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선포가 낯설고 새롭습니다. 요한은 하늘나라가 ‘오고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십니다. 미래나 외계에 있으리라 생각한 하늘나라가 우리 현실 안에 이미 다가왔다고 합니다. 경전의 글귀나 설법에 있다고 생각한 복음이 실은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의 행동에 이미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와 복음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 역시 낯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여느 종교가 약속하는 미래 보장이 없고 자세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곧바로 따릅니다. 우리는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목격하는 예수님의 미래는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 제자들이 겪었던 삶도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이 자신의 미래를 가늠하고 확신하며 따랐으리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동료와 함께 자신을 던졌을 때라야, 우리는 오히려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경험합니다.

보장성 보험의 종교가 아니라, 낯설고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에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과 동행하며 함께 걷는 일이 성서의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며 건네는 부르심과 동행의 초대에 우리는 지금 다시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1. 주교좌성당 주보 2015년 1월 25일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