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사랑과 사사로운 사랑

Monday, May 14th, 2012

히포의 성 어거스틴은 이분법적 세계관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깊숙이 남겨 놓았다. 그 이분법의 폐해를 의심하더라도, 수사학자요 신학자요 주교로서, 선과 악의 문제로 씨름했던 어거스틴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 현실의 문제이다. 성 어거스틴은 두 도성에 관한 이론을 나름 완비하기 전에, 이미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라는 책에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놓았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룩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높은 도성에 속한 탓에 공동선을 생각하고, 다른 하나는 그 오만하여 공동선마저도 자기 개인의 것으로 만든다. 하나는 하느님께 순종하지만,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지만, 다른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다른 하나는 반역한다. 하나는 진리에서 멀어진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칭송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나는 벗이 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다른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하나는 이웃의 선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하지만,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위를 휘두른다. 이 두 가지 사랑은 처음에 천사들에게서 드러났으며, 하나는 선한 이들에게 깃들고, 다른 하나는 악한 이들에게 깃든다. 결국, 이것이 두 도성을 구별하게 한다. 하나는 정의로운 이들의 도성이요, 다른 하나의 사악한 자들의 도성이다. 놀랍고도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로 이 두 도성이 인류 안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관장하시고 다스리신다. 이 두 도성은 세상 속에 섞여 있어 역사 속에서 계속될 것이지만, 마지막 심판이 그것을 가를 것이다. (De Genesi 11:15.20)

흥미롭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선한 도성과 악한 도성의 차이는 “사랑”의 차이에 기인한다. 탐욕마저도 사랑의 변종일 뿐이다. 게다가 이 사랑의 향방이 세상의 참된 권위, 혹은 권력의 향방을 가른다는 것이 성 어거스틴의 정치신학이다. 사랑의 방향이 하느님의 진리와 이웃의 공동선을 향할 때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권력욕이 될 때가 구분된다. 권위는 이웃의 선을 위한 다스림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지배욕으로 나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연설에는 사랑의 마음이 절절하다. 그래서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성 어거스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벗”의 관계를 깊이 되새겨 윗글에 적었으리라. 동등한 제자직, 벗 된 제자직이 복음인데도, 질시와 지배, 기어코 무릎을 꿇리려는 허세가 여전히 교회에 득세한다. 어떻게 견디고 이겨낼까?

시인 오든(W.H. Auden)은 일찍이 “반지의 제왕” 서평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결국, 선이 이긴다는 이야기는 그것이 힘에 의지하는 것일 때 오히려 모순적이다. 사랑과 자유인 선은, 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을 힘으로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정의롭든 불의하든 힘 있는 편이 이긴다…

그러나 악은 선이 가지는 상상력에서 열세이다. 선은 그것이 악이 될 가능성을 상상하여 이를 거부하지만, 악은 그 자신 말고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이 악의 눈을 가린다…

악은 선이 절대 권력의 반지를 파괴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배와 공포에 대한 욕망 만이 사우론을 이끌었던 탓이다.

다시 이분법적 세계관의 폐해를 염려하면서도,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 선과 악의 싸움이 우리 사회 곳곳에도 극명하다고. 선한 일에 힘쓴다는 이들도 실은 무엇인가에 ‘눈이 가린’ 일이 많다고. 이때 선한 이들이 지탱할 끝까지 선한 상상력이 절박하다. 신앙인에게 그 상상력 훈련은 내용 갖춘 성찰이요 기도일테다. 그런데 절박한 만큼, 성찰과 기도가, 되다.

레너드 코헨 – 할렐루야

Saturday, October 1st, 2011

할렐루야

레너드 코헨

나는 들었지요, 어떤 비밀스러운 선율
다윗이 연주한 그 선율이 주님을 기쁘게 했다고.
그러나 당신은 음악엔 관심 없지요, 그렇지요?
그 선율은 이렇게 흘러요.
4도 화음에, 5도 화음, 단조로 내리고, 장조로 올리고
낙심한 왕은 그렇게 할렐루야를 작곡했지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당신의 신앙은 두터웠으나, 그걸 증명해야만 했어요.
목욕하는 그 여인의 모습을 지붕 위에서 보았고
달빛 안에 있는 그의 아름다움이 당신을 뒤덮었어요.
그 여인은 식탁 의자에 당신을 묶고
당신의 왕좌를 깨뜨리고, 당신의 머리를 잘랐지요
그리고는 당신의 입술에서 할렐루야를 끌어냈지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마도[그대여], 나는 그전에 이곳에 있었던 적이 있어요.
이 방을 알아요. 이 바닥을 걸었었죠.
당신을 알기 전에 혼자 살았어요.
대리석 아치에 걸린 당신의 깃발을 본 적이 있어요.
사랑은 승리의 행진은 아니에요.
그것은 시리고 일그러진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래서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당신이 내게 알려줄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 당신은 내게 전혀 보여주질 않아요, 그렇죠?
그때를 기억하죠. 내가 당신 안으로 들어갔을 때
거룩한 비둘기도 들어왔어요.
우리가 나눈 모든 숨결은 할렐루야였어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마도 높은 곳에는 하느님이 계실 테고
사랑에서 내가 배운 모든 것은
당신을 유혹하려는 누군가를 쏘는 방법
그것은 당신이 밤에 들을 수 있는 울음소리가 아니에요.
그것은 빛에 비춘 어떤 사람도 아니에요.
그것은 시리고 일그러진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당신은 내가 그 이름을 헛되이 부른다고 말하죠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이름을.
설령 그랬더라도, 정말이지, 그게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죠?
모든 말씀 속에는 타오르는 빛이 있어요
당신이 들은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거룩한 것이든 일그러진 할렐루야든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는 온 힘을 다했어요.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 없었기에, 만져보려 했어요.
나는 진실을 말했고, 당신을 속이러 온 것이 아니에요.
그 모든 것이 잘못된다 해도
나는 노래의 왕 앞에 서겠어요.
다른 말은 담지 않고, 오직 할렐루야만 부르며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Leonard Cohen (1934 ~ ) “Hallelujah” (1984)
번역: 주낙현 신부

유투브 Leonard Cohen in London 2009
유투브 K. D. Lang in Winnipeg 2005

번역 후기: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는 실로 많은 가수가 새로 불렀다. 내 아들도 ‘슈렉’에 삽입된 곡으로 이 오래된 노래를 기억해 내고는, 아빠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자기도 안다고 기뻐한다.

내게는 노래의 음악성을 평가할 능력이 없으나, 그가 말한 대로 이 ‘비밀스러운 선율의 화음’과 가사는 수많은 이들의 귀를 붙잡는다. (다만, 원래 가사는 발표 이후에 코헨 자신도 조금씩 바꾸거나 보태 부르기도 했다. maybe – baby; holy dove – holy ghost – holy dark 등)

노랫말은 복잡하고 중의적이다. 다윗은 수금을 타며 하느님을 찬양하던 목동이었으나, 신경쇠약에 걸린 폭압적인 왕을 달래는 궁중 가수로도 일해야 했다. 그러다 자신의 절대 권력을 누리는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한눈에 빠져버린 사랑때문에 자신의 충신이었던, 그 여인의 남편을 죽게 만드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다시 삼손과 델릴라 이야기로 엮인다. 하느님과 나눈 약속의 상징, 그리고 힘의 상징인 머리칼을 잘리고, 회개와 더불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삼손의 처지와 겹친다.

노랫말의 ‘당신’은 절대적인 신 하느님으로,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다윗으로, 연인으로, 노래하는 자기 자신으로, 심지어는 노래를 듣는 이로 이리저리 중의적으로 교차한다. 사랑에 끌렸지만, 다시 그 사랑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것으로 전개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불완전하고 비참한 자신의 몸으로 부서지고 깨진 노래, 일그러진 찬양의 노래 ‘할렐루야’를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조건이리니, 그 나약함을 인정하고서,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일, 그러면서도 그 사랑의 진실만은 끝까지 지켜보려는 모순된 저항이 인간 자체에 대한 통찰로도 들릴 것이다.

이 포기와 저항의 모순 속에서 코헨은 이 노래 ‘할렐루야’의 뜻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세상은 갈등으로, 화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 이원론의 체계를 초월할 수 있는 순간들, 모두 엉망인 것들을 화해하게 하고 껴안을 수 있는 순간들은 있어요. 이 순간이 바로 ‘할렐루야’가 의미하는 바에요. 그 어떤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우리 입을 열어서 우리의 팔을 펼쳐서 그것들을 포용하며, 그저 ‘할렐루야! 그 이름 찬미 받으소서” 하는 순간이죠. 이러한 전적인 포기, 전적인 확신의 자세가 아니고서는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겁니다.

그것은 ‘너는 이것을 완수할 수 없을 거야’ ‘그거 안돼’ ‘이곳에서는 혁명을 할 수 없어’ ‘이 상황의 해결책은 없어’ 같은 말이 아니에요. 이렇게 완전히 화해할 방법이 없는 갈등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말할 때에요. “봐라. 나는 이런 개 같은 일을 절대 인정할 수 없어. 할렐루야!” 이때가 바로 이곳에서 온전히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순간입니다.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Monday, April 18th, 2011

어느 신부님의 부탁으로 성주간 전례에 관한 글을 써서 한국에 보냈다. 그동안 블로그에 적었던 여러 생각을 부활 성삼일 전례 전체에 맞춰 다시 엮어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바쁜 마음 때문에 격하고 날이 선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성삼일 사건이 그만큼 격하고 전복적인 사건이라며 볼품없는 글품을 변명하려 했다.

못난 자식 보내는 심정으로 글을 보내고, 다시 돌아앉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성주간 생각’을 듣는다. 그러고 보니 써서 보낸 내 글의 처지가 더욱 가련하다. 내 글은 그 못난대로 읽힐 처지를 찾으면 되겠고, 나도 캔터베리 대주교님 ‘급’이 당연히 아니다. 😉 늘 영어가 벽인 이들도 함께 나눠야 할 깊은 생각이기에 우리말 번역에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쏟았다.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모든 점에서 성주간은 정말이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바로 이 주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아주 극적으로 펼쳐지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성주간 전례와 예식은 우리를 하나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성지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되면서 이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지와 십자가 매듭의 성지를 축복하고, 그것을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 첫 성지주일의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 예수님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이 그리 환영할 만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우리 세상과 삶에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주간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인지를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그 첫 성주간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원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갑시다. 이 주간 내내 복음서에서 읽게 될 수난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십 년 전부터 여러 교회에서는 성 목요일 아침에 특별한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의 사제들과 부제들이 주교와 함께 모여서 서품 서약을 갱신하고, 복음의 사목자로 약속한 바를 갱신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교는 성유를 축복하여 여러 교회에서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서품에 사용하도록 합니다. 성주간에 이 예식은 사목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여느 신자들처럼 성직자들도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사제, 부제, 주교, 혹은 그 누구에게나, 예수의 제자로서 사목자인 것이 자기 본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자신들의 약속을 갱신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됨을 새로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밤 전례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것처럼, 성주간 중간에 이런 서약 갱신의 기회를 얻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유 축복도 복음의 사목자에게 무언가를 되새겨 줍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 기름과 물과 같은 일상의 물질이 교회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고 상징하는, 강력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매체로 쓰입니다. 또한, 성서에서 기름은 도유와 치유로 연결되는데, 이는 복음의 사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되새겨 줍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또 기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관계, 인간 사이의 소외, 그리고 병고로 공동체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교 사목 자체의 중심이 되는 실체를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갖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위대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펼쳐야 할 봉사직을 말 그대로, 그리고 완벽히 몸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시고 종처럼 그들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밤 전례에서 성직자들은 모두 신자들의 발을 씻어 줍니다. 이는 예수 복음의 힘과 권위, 그 중요성이 늘 섬김을 통해서 드러남을 되새겨 줍니다. 섬김을 보여주지 못하는 권력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로 힘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저녁,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의 식탁에 둘러앉아 예수님의 몸과 피를 거룩한 친교의 성사 속에서 나누는 일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겸손과 그분의 섬김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밤의 어둠 속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게쎄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을 지켜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 첫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고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보다는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다는 사실을.

성찬례가 끝나면, 제대포를 벗기고, 장식을 치웁니다. 교회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남습니다. 이렇게 벗겨진 채로 성 금요일을 지나 부활밤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낼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궁핍, 우리의 가난을. 그러므로 꽃이나 그 어떤 장식이 필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벽, 벗겨져 드러난 제대와 우리 자신을 성 금요일의 놀라운 현실 실체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 금요일에 많은 교회와 여러 전통에서는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교인 전체가 예루살렘의 군중이 되어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님의 죽음을 바랐던 이들과 일체가 되는 궁극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죄와 실패가 정말로 완전히 발가벗겨져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 금요일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면모를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했던 이들이 지녔던 똑같은 동기를 우리 안에서 직면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열광에 사로잡힌 여정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다가도 예수님이 위험하고 어려운 분인 것을 깨닫자, 금세 그분을 저버리게 한 열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 금요일은 우리가 인정하기 꺼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면모를 발견하는 날만은 아닙니다. 옛날 성가가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명의 나무 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펼치시는 그리스도의 팔을 봅니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근원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하시려는 그 희생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의 어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를 포용하시고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성 토요일과 부활일 아침의 사건 속에서 완벽하게 참된 이로 만들어 주심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성 토요일의 어둠 속에서 모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을 내시고, 사막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그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며 환호하고, 예언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일과 말씀이 결국에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지를 듣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위대한 신비로 초대받습니다. 빛으로 가득 찬 순간을 맞이하며, 촛불을 모두 켜고 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빛을 축하합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걸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어둠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우리 자신을 보는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패와 죄가 드러난 어둠에서 희망과 용서의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부활의 첫 성찬례는 중단했던 모든 것을 집어들고, 오르간을 울리고, 종을 치면서 한 주간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집에 당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서서 성령을 통하여 세상에 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부활일에 우리는 그저 거기에 서서 그 사랑을 흠뻑 받을 뿐입니다. 여정이 끝나고 우리는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 집은 언제나 자비로이 받아들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집인 것을 압니다. 그 사랑이 궁극적인 희생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2880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