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출사표 – 해방의 은총이 지금 여기에

Sunday, January 2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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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출사표 – 해방의 은총이 지금 여기에 (루가 4:14~21)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예수님과 하느님이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천명합니다. 하늘은 무서운 심판을 내리는 곳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마음에 품는 넉넉한 관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나누는 우리도 죄와 심판의 두려움에 떠는 여느 ‘종교인’에서 이제 하느님과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자유로운 신앙인’으로 변화합니다. 이 새롭고 친밀한 관계가 예수님께서 펼치시는 선교의 핵심입니다. 이 관계의 선교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 하느님과 신앙인의 관계를 통과하여,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삶에서 펼쳐져야 합니다.

작은 곳에서 더 넓은 곳으로, 한 개인에서 공동체와 사회로 펼쳐지는 신앙인의 삶이 명백합니다. 세상이 보기에 작고 보잘것없는 곳에서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천한 갈릴래아에서 세례의 사건이 일어나고, 작은 나자렛에서 예수님의 출사표가 들려옵니다. 갈릴래아와 나자렛은 또한 하느님의 구원과 예수님의 복음이 사회 정치의 환경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구원과 복음은 지금까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향합니다. 가난한 사람,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을 부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은총은 사회와 정치의 해방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이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의 안녕과 기복에만 갇힌 원시 종교를 초월하여 사회와 공동체 전체와 관계합니다. 예수님께서 호명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한, 우리 신앙도 이 상황에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신앙인은 복음에 따라 자신을 성찰합니다. 사회 정치의 현실에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말씀을 우리 자신의 내면에도 깊이 적용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인색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부의 가치에 묶여있지 않은가? 우리는 사회의 불의에 눈 감고, 이웃의 아픔에 귀를 막고 살지는 않는가? 우리는 세상의 권세에 억눌려 체념하며 살지는 않는가? 이 상황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용기가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리 삶의 처지에 동행하시며 해방의 은총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은 분,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를 나눈 우리 신앙인 역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에 해방의 은총을 선포하고 실천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곳, 세상의 작은 곳에서, 작은 사람들과 더불어 이 세상에 구원을 알리며 몸으로 살겠다는 신앙의 출사표를 던지는 사람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1월 24일 얀중 3주일 주보 []

예수 – 평등한 은총과 영광의 손길

Sunday, October 4th, 2015

예수 – 평등한 은총과 영광의 손길 (마르 10:2~16)1

메말라 굳어진 마음은 금세 푸석푸석해져서 부서지기 쉽습니다. 본래 깊은 신앙 체험에서 나왔을 아름다운 고백과 신념도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면 고집과 아집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자신과 신앙을 지키려는 선한 의도의 굳센 다짐도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면 유연함이 떨어지고 외로워지고 맙니다. 열린 마음은 이 변화와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흐르는 세월과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솔직하게 식별하면 억지로 자기를 세울 일이 없습니다.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계를 인정할 때 오히려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사실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새로운 힘으로 또 다른 삶의 순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 이야기는 이혼 문제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혼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는 상대방을 “버려도 좋은 존재”로 여기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도 덫을 쳐놓고 “속을 떠보려”는 행동입니다. 이런 질문과 행동은 모두 자기 자신의 굳어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걸고 넘어뜨리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창조 때” 마련된 관계, 곧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품는 삶을 회복하는 일만이 우리 삶의 기준입니다. 오늘날 이혼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는 굳어진 마음에 물을 주고, 닫힌 마음을 열어 넉넉한 마음의 삶을 누리도록 격려하는 일입니다. 창조 때 모습대로 우리 인간의 삶을 회복하는 일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불변하고 초월하는 진리의 실체를 알려준다고 유혹하지 않습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삶을 미끼로 눈먼 확신을 주지도 않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비밀스러운 진리를 가르치는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모든 사람과 창조세계 전체가 공평하게 누릴 때 하느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안아 축복하십니다. 오늘날과 달리 예수님 당시 어린이는, 있으면 불편한 존재, 짐이 되는 이, 보살핌이 없으면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어린이를 향한 축복은 하느님 은총의 평등함을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신앙과 은총을 독점하여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나무라시고 화를 내십니다”(13,14절). 그 처지와 상태가 어떻든 모든 사람을 향해 긍정하고 받아들여, 그들을 사랑받아야 할 존재로 확인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형제자매로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을 들어 올려 영광과 구원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그러니 히브리서의 감사 노래는 이제 우리의 찬양이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내밀어야 할 손길의 확인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잊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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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0월 4일 연중27주일 주보 []

환대의 신앙

Sunday, September 20th, 2015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환대의 신앙 (마르 9:30~37)1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예레미야 예언자는 “원수를 갚아달라”고 애원했을까요? 삶이 이처럼 억울한 고통으로 이어질 때면 우리도 같은 절규를 내지릅니다.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종교와 신을 찾는 일은 인지상정입니다. 어려울 때만 다급히 도움을 찾고, 좋은 것만 골라서 축복을 구하는 종교와 신을 ‘도구적 종교와 해결사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도구와 해결사는 사람이 부려 쓰는 것이니,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부활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질서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새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힘주시고 고난 속에서도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통념과 말재간으로 우리 신앙을 풀이하면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지혜와 지식을 굳이 구별하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지혜는 연륜이요, 지식은 정보일 뿐이라며 차별하여 다루기도 합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구분은 부질없습니다. 새로운 배움으로 연륜을 늘 새롭게 물갈이하지 않으면, 지혜도 고인 물처럼 썩습니다. 부질없는 구분보다는 지혜의 이중적인 성격, 우리 자신의 이중성을 살피는 것이 낫습니다. 겉보기에는 같은 지혜이지만, 멋대로 가진 지혜는 ‘시기심과 야심으로 분란과 더러운 행실을 낳습니다.’ 그러나 ‘위와 밖에서 오는 지혜’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한결같은 순결함과 평화와 자비행으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 즉 정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자신과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입니다. 신앙인이 세상의 고통을 없애고, ‘원수 갚는’ 방법은 끊임없이 밖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도전과 씨름하고 대화할 때 나옵니다. 예수님을 늘 따라다니며 가까이 지낸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했던 이유는 새로운 도전과 배움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죽음은 옛 질서와 고정관념, 과거의 유산과 지위가 끝낸다는 뜻입니다. 이 죽음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인 부활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과거에 묶여 자리다툼만 합니다.

이런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제자들 바깥에서 ‘어린이’를 불러들여 와 세우십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이는 무력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지위는커녕, 특별한 보호와 배려가 없이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입니다. “받아들인다”는 낱말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37절)에서 우리는 지극한 ‘환대의 신앙’을 발견합니다. 환대의 신앙은 하느님을 도구 삼아 자기만 좋은 축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멋대로 신앙과 지혜라고 우기지 않습니다. 환대의 신앙은 ‘위에서 오시는 하느님’을 향하여 눈을 열고, ‘밖에 있는 이웃’에게 귀를 열어, 하느님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껴안아 동행합니다. 힘이 없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를 밖에서 초대하여 보살펴 키우며 동행할 때라야, 우리의 신앙, 우리 교회의 미래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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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9월 20일 연중25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