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환대와 6.10 민주 항쟁

Tuesday, June 10th, 2014

2014년 6월 10일 화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신부

1열왕 17:7~16 / 시편 4 / 마태 5:13~1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은 6월 10일입니다. 27년 전 오늘 6월 10일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깨닫는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6.10 민주 항쟁” 혹은 “6.10 민주화 운동”이라 불리게 된 사건입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약 20일 동안 한국 사회 전역에서 진행된 민주화 시위를 일컫습니다. 27년 전 6월 10일은 수많은 사람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희생을 위에 세워진 역사였습니다. 1980년 광주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는 통제와 압제가 계속되었고 그에 따른 희생이 잇따랐습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숨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한 생명의 죽음을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 아닌 말로 덮으려 했습니다. 사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으나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었습니다. 박종철 씨가 고문으로 구타와 물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것이 의로운 몇 사람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드러났고,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열망에 불을 댕겼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군사 정권이 만든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이에 향한 반대 시위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와 함께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그리고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로 민주화의 외침을 쏟아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바로 전날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시위하던 연세대생 이한열 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6월 10일 명동 성당을 점거하고 독재 정치를 막을 내리는 싸움이 불길이 되어 올랐습니다. 이를 저지하고 억압하던 당시 정권은 결국 6월 29일 여당의 대표 노태우의 입으로 헌법 개정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를 다 써서 얻은 민주화 운동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며칠 후인 7월 5일 이한열 씨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서울 주교좌 성당 뜰 한쪽, 사제관 앞 나무 그늘에는 “유월 민주 항쟁 진원지”를 기리는 기념비가 수줍게 앉아 있습니다. 자기 업적을 내세우지 않는 이 수줍음과 27년 전 일어난 역사의 거대한 사건은 큰 대조를 이룹니다.

610_cathedral.JPG

1987년 6월 10일,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는 당시 경찰의 통제로 “국민대회’ 장소인 천주교 명동 성당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서울 주교좌 성당의 주임사제 고 박종기 신부님은 밖에서 서성이며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국민운동 본부’ 집행부를 사제관으로 안내합니다. 그리하여 서울주교좌성당과 사제관은 한국 민주화에 획을 긋는 유월 민주 항쟁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그 두렵도록 암울한 시대에 정의와 자유의 숨통이 트인 작은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이 대조에서 우리는 신앙의 사건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속에서 우연히 일어났던 작은 환대의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작고 수줍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자기 배 안에 아기를 품게 되리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마리아는 이 생명을 그 작은 몸에 받아들입니다. 수줍고 작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소식을 그 마음에 품어 환대의 공간을 열어주었을 때, 하느님께서 역사에 참여하시는 구원의 역사인 성육신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엘리야 예언자는 악한 왕 아합을 호되게 비판하고, 그와 그의 왕국에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 때문에 엘리야는 아합 왕의 탄압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렙다라는 작은 마을에도 숨어들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여인에게 음식을 청합니다. 그 가난한 여인은 아들 하나를 홀로 키우던 과부였고 겨우 한 끼가 될까 하는 식사를 아들과 나눈 뒤에 죽음을 기다릴 작정이었습니다. 여인은 그날 먹을 것 전부를 낯선 손님인 엘리야에게 내어 줍니다, 엘리야는 그 적은 음식을 다시 여인과 나누어 먹으며, 과부의 환대에 하느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마리아의 환대와 사렙다 과부의 환대는 결코 손익계산을 따진 접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평판과 효율성과도 한참 거리가 먼일이었습니다. 그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수줍고 겸손한 환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환대는 더욱 넉넉했고 더 큰 역사가 움텄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이 역사에 관여하는 성육신 사건이 일어났고, 엘리야 예언자는 선포와 사명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소금과 빛이 되는 일은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처지 그대로 낯선 이들과 나누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일과 낯선 이들에게 마음을 여는 일을 통해서 그저 그만그만한 우리 교회는 뜻밖에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됩니다.

이 환대를 주저하는 이유와 핑계와 염려가 우리 교회에는 많습니다. 낯선 사람과 주장을 불온하게 여기고 불편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염려와 자신의 편안함에 머문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낯선 이를 통해 주시는 뜻밖의 은총과 축복에서도 제외되고 맙니다. 작은 환대의 용기가 없이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도 그저 공허해질 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서 쓸모없이 밟히는 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다시 돌아봅니다. 27년 전 6월 10일 그 작은 환대의 자리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더 많은 희생을 감수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긴 고통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이 이 고통을 줄이는 일에 쓰임 받았으니 하느님께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 수줍은 환대의 신앙과 실천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이 세상을 향해 보여야 할 선교입니다.

이제 다시 물어야 합니다. 27년 전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난 세월에 자기 생각과 행동을 맡겨 변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지금 우리가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수줍은 환대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나요? 우리는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에게 마지막으로 대접한 작은 밀떡을 이 성찬의 식탁에서 나눌 수 있나요?

나는 누구인가? – 본회퍼 축일

Wednesday, April 9th, 2014

잠언 3:1~7 / 시편 119:89~96 / 로마 6:3~11 / 마태 5:1~12

2014년 4월 9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요셉 신부

1998년 7월, 영국 성공회 런던 웨스트민스터 애비 성당에서는 20세기의 순교자 10명의 입상을 세워 봉헌하였습니다. 그 순교자들 가운데는 천주교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미국 침례교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리고 독일 루터교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있습니다.

Romero_King_Bonhoeffer.png

2004년 우리 기도서가 개정되면서 한국 성공회도 마틴 루터 킹과 디트리히 본회퍼를 기념하도록 했습니다. 오늘은 방금 읽은 복음 본문, 산상수훈의 진복선언을 끔찍이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살았던 본회퍼의 축일입니다.

아마도 지난 100년 역사 속에서 성공회의 여러 지도자, 그리고 현대 성공회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꼽을 때, 그 목록에 본회퍼가 빠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1960년대 초, 영국 성공회의 주교이자 탁월한 신약성서 학자였던 J. A. T. 로빈슨 주교님이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출간하여 기존의 신앙 체계에 도전하고 세계 교회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분도 바로 본회퍼였습니다.

1906년에 태어난 디트리히 본회퍼는 1929년, 23살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촉망받는 신학자로서 기대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목사 안수에는 너무 이른 나이여서 박사후 과정으로 미국에 건너갔고, 미국의 신학교를 보면서 “신학이 없는 동네”라고 말할 만큼 신학적 총명으로 기고만장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 뉴욕의 할렘, 즉 흑인 빈민촌의 삶을 경험하고, 그들의 처지와 그들의 삶이 만들어내는 신앙과 영성 안에서 자신의 책상물림 신학을 깊이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평화, ‘샬롬’이 이뤄져야 할 이 땅이 잘못된 사회 구조와 못된 권력에 의해 계속 망가지는 사태를 목격했고 그 현실을 새롭게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경험을 마치고 그가 독일에 돌아왔을 때, 당시 독일은 히틀러가 폭압적인 정치를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속한 교회 전체가 이 폭압적인 히틀러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를 두둔하거나 침묵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 현실을 반성하고 뜻을 같이하는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고백 교회>라는 교회 개혁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치 정권을 반대하던 <고백 교회> 운동의 동료와 더불어 그는 계속 탄압을 받았고, 결국 영국 런던에 있는 독일인 교회 목사로 초청받아 영국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영국에서 본회퍼는 히틀러 나치 정권의 유대인 탄압과 학살을 반대하며 유럽의 평화를 염려하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을 친구로 얻었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 막 시작한 성공회 수도회 <부활 공동체>(the Community of Resurrection)에 방문하여 머물면서, 새로운 신학교의 모습,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삶을 더 깊이 구상하고 생각했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먼저 지하 비밀 신학교(Finkenwalde)를 세웠습니다. 그 모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영국에서 경험한 성공회 ‘부활 공동체 수도회’였습니다. 이 신학교를 이끌면서 본회퍼는 오늘 읽은 복음 본문이 들어 있는 산상수훈을 연구하는 한편, 당시 신학과 교회의 문제가 ‘값싼 은혜’(cheap grace)를 팔고 다니는 데서 나온다고 간파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에 치명적인 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값진 은혜를 구하며 싸워야 합니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상품 같은 은혜입니다. 교회는 은혜를 퍼주는 곳처럼 어떤 질문이나 고치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후하게 축복을 던져 줍니다. 값이 없는 은혜, 대가 없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미 값을 치렀으니 더는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은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당연한 것 같은 후한 말로)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합니다. 그리하여 값싸게 죄를 덮어버리고, 회개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일 없이 죄를 정당하다고 용인하는 꼴입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스스로 축복하는 은혜이며, 회개를 요구하지 않고 용서를 선포하는 일이며, 교회 공동체의 훈련 없이 주는 세례이며, 죄의 고백 없이 얻는 영성체입니다… 값싼 은혜는 제자됨이 없는 은혜요, 살아계시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찾아야 할 복음은 값비싼 은혜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이 은혜가 우리더러 예수를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인간에게 참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값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바로 하느님의 성육신입니다.”1

히틀러 나치 정권은 이 비밀 신학교를 찾아내고 폐쇄했고, 본회퍼는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와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교수 자리를 제안하며 미국에 머물라고 했고, 본회퍼는 독일을 잊고 미국에 안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자신의 결정을 돌이켜서 상황이 더 나빠지는 독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당시 독일 장교들이었던 그의 사촌들과 히틀러 제거 계획에 가담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미친 운전자가 모는 광포한 차) 바퀴에 사람이 깔려 죽을 때, (성직자와 교회의 일은 그 희생자들의 장례만 치르르는 일이어서는 안 되고), 그 바퀴를 멈추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의 히틀러 제거 계획은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곧장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어 보냈습니다.

“인간은 이제 하느님 부재의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고통을 나누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인간은 ‘세속’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에 의지해서 자신을 죄인이나, 참회하는 자 혹은 성인으로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시는 그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은 어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이 세속 사회 속에서 하느님의 고통에 참여할 때 가능합니다.”2

1945년 4월 8일 일요일, 다른 수인들과 예배를 마친 본회퍼를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수인 본회퍼는 나오시오.” 그는 감옥의 동료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고, 그 말을 가까운 친구였던 영국 옥스퍼드 크라이스처치 대성당의 주임사제인 조오지 벨 신부님(후에 옥스퍼드 주교)께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 이것이 마지막이네. 그러나 내겐 새로운 삶의 시작일세.”

다음 날인 4월 9일, 그의 교수형이 집행됐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습니다.

본회퍼가 자기 생의 막바지에 선택했던 결정을 두고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논쟁이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암살 음모에 가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신앙인이 자신을 죽음에 그처럼 쉽게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남은 가족은 생각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러나 본회퍼는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복된 사람들”을 마음 깊이 품었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목말라 하는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를 따르다가 모욕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을 마음에 깊이 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순간에도 자신을 여전히 깊이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스스로 물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
오늘은 이런 사람,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이 되는가?
동시에 둘 다일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나 자신 앞에서는 비겁하고 비탄에 잠긴 허약한 인간인가?
아니면, 내 안에 여전히 어떤 패잔병이 남아 있어
이미 이룬 승리 앞에서 패주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를 비웃는 내 안의 이 외로운 질문들.
내가 누구이든, 그대는 아시나니,
하느님, 나는 그대의 것!”3

그는 자신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느님과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 함께 걷던 사람들과 나누던 깊은 사랑과 의리에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남을 위한 존재”여야 한다는 진리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분이 본회퍼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가까운 이웃, 친구, 가족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아니 이제, 우리가 그런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죽임을 당하기 얼마 전 본회퍼는 옥중에서 아름다운 시 하나를 써서 가족에게 보냈습니다.

“넘치는 은총의 힘에 아름답게 둘러싸여
주님의 오심을 신실하게 기다리나니
주님께서 밤과 아침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매일 새로운 날에 우리에게 인사하십니다.

그러나 오래된 고뇌들이 우리 마음을 괴롭히고
나쁜 나날들이 견디기 힘든 짐을 지우나니,
주님, 이 두려운 마음에 구원을 주소서.
주님께서 고통이 넘치는 쓰디쓴 잔을 주실 때,
우리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주님의 선하고 사랑스러운 손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어떤 두려움도 없이 이 잔을 감사하며 마시겠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
주님께서는 여전히 기쁨을 주시며, 밝은 해로 비추시니
우리가 함께 살아온 날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모든 삶은 오로지 주님의 것이 되겠지요.”4

아멘.

*5

  1. The Cost of Discipleship []
  2. http://viamedia.or.kr/2008/03/18/191 []
  3. http://viamedia.or.kr/2008/12/31/384 []
  4. 미국 성공회 성가 1982 에 번역된 가사의 우리말 번역 []
  5. 인용문은 모두 주낙현 신부의 사역(영어)이며, 강론 시 전달을 위해 느슨하게 번역했다. []

신학 ‘공부’와 공동체

Wednesday, January 15th, 2014

멀리서 안부를 묻는 어느 벗된 신부님의 편지에 답장했다. 공부하는 일에 관한 고민과 여러 어려움이 담겨진 편지였고, 나를 여러모로 기억하며 격려해 주는 편지였다. 나 역시 깊이 공감하고 그분을 응원했다. 그러나 먼저 된 사람으로서 이렇게 밖에 적어 보낼 수 없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편지는 늘 나 자신에게도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3-hierarchs-icon.jpg

(대 바실, 요한 크리소스톰, 신학자 그레고리)

*** 신부님, 잘 지내셨지요? 자세한 소식을 나눠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울러 [오래 전 제가 진행한 전례 워크숍과 특강 등에 관한] 옛 기억을 되새겨 주시니 반갑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부끄럽게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지금은 그 열정이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에 하늘을 멍하게 쳐다볼 때가 많습니다. 특히 지난 5년은 제게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안팎[에서 비롯한]… 깊은 절망에 저 자신이 눌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여기저기서 밝힌 바와 같이, 지난 10여 년의 미국 생활은 제게 여러 가지로 축복이요 은총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분들을 만나서 깊은 공부와 경험을 한 것이 그것이고, 공부와 더불어 사목 현장에서 발을 떼지 않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난한 신자들과 버텼다는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그나마 하느님 앞에 덜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찌보면 지금처럼 제 공부의 진척에 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성직자로 불린 이상 어떤 이유로도 사목 현장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

교회의 변화는 그야말로 교회의 현장에서 일어나지, 신학교나 신학자의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 혹은 신학자는 [하느님의 백성이] 현장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을 좀 더 보편적인 언어로 정리해 내고, 역사와 전통 안에서 그 맥락을 이어주고 새로운 대화의 길을 열어주는 일에 종사할 뿐입니다. 이 순서가 잊히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와 신학, 특히 신학은 ‘지식인의 유희’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 현장을 누가 점령했는지 깊이 살펴볼 일입니다.

특히 신학교는 “성직자 양성 기관”이며, 신학을 가르치는 이는 그 일에 복무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신학자”의 임무이며, 이 임무를 하지 않을 요량이면, 그냥 “연구하는 신학자”로 남으면 될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직자 양성 과정에 대해 깊이 살펴보는 기회를 얻길 바랍니다. 학위는 개인적인 성취이지, 교회의 성취는 아닙니다. 그것이 교회의 성취가 되려면 교회 현장과 신앙 교육에 연결돼야 하고, 좁게 보더라도 성직자 양성 과정과 연결돼야 합니다.

[…] 여러 식으로 한국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 공통적인 아쉬움은 교회에 좀 먹는 반지성/반신학주의와 신학교의 전혀 헤아릴 길 없는 신학 교육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 편견이겠으나, 한국 성공회의 실패는 바로 이런 지점의 결핍에 있습니다. 그 와중에 교회는 더욱 피폐해져 갑니다. 더 나빠진 한국 교회로 돌아가는 마음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어쨌든 신학 교육과 성직 양성 과정에 대한 고민을 계속 고민해 주세요. […] 적어도 저는 여기에서 그 점을 깊이 경험하고 대화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깁니다.

‘꼰대’ 같은 소리를 지껄여 대서 미안합니다. 신부님께서 깊이 생각해 주시리라 믿기에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적었다고 헤아려 주세요.

평화를 빕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